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
가짜 용사 이야기-9화(9/310)
제9화
유년기, 여름의 서막 (8)
여름이 덮인 숲은 메마르고 건조했다.
죽어가듯, 습기를 빼앗긴 신록들은 점점 말라비틀어져 간다.
당연한 일이다. 여름은 이 땅에서 모든 걸 빼앗아 가니까.
“불과 기름만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증기총은 왜 갖고 왔지?”
앞서 걷던 카이센이 물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학도병 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입가가 바싹 말랐는지 목소리가 공포로 떨렸다.
“그야…… 우, 우루크가 나타나면 싸워야 되잖아.”
“싸워? 벌벌 떨고 있으면서.”
“아, 안 떨고 있거든!”
인류는 아인족이 만들어낸 증기문명의 결정체인 증기총(蒸氣銃; SteamGun)을 사용했다.
증기총의 장점은 명백했다.
절망적인 힘의 격차를 단번에 줄여주는 동시에 신병 훈련 기간을 기적적으로 단축시킨다는 것. 하지만 단점 또한 존재했다.
“여차하면 도망칠 궁리나 해. 그런데 그렇게 무거운 걸 짊어지고 어떻게 도망치려고?”
바로 증기기관, 등허리에 초소형 증기기관을 메야 한다는 점.
기관에서 뻗어 나온 대여섯 다발의 호스가 허리춤 양쪽에 찬 가스통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가스통과 연결되는 것으로 총기는 동력을 공급받아 총알을 발포할 수 있었다.
“우리 앞가림은 우리가 알아서 해!”
그때쯤 카이센이 멈춰 섰다.
소년병들이 움찔 놀라며 허리띠에 맨 총신에 손을 얹었다.
카이센이 말했다.
“여기에 기름이나 뿌려. 그리고 불을 질러.”
소년병들이 투덜거리면서 나무에 기름을 뿌리고 횃불을 당겼다.
초여름은 세상을 건조하게 만들었다. 불이 붙기 쉽도록.
기름을 따라 쉭 타오르던 불길은 순식간에 숲의 이곳저곳을 게걸스레 핥기 시작했다. 탄내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자, 이제 도망쳐. 10초 안에. 총 같은 거 집어 던지고.”
“……?”
“아니, 5초인가? 서둘러!”
바로 그 순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죽음의 무도(舞蹈)가.
“어?”
희끗한 무언가가 반짝이더니, 횃불 쥔 소년의 머리통이 둘로 쪼개지면서 뇌수와 뼛조각이 허공 가득 날았다.
그리고 어둠이 튀어나왔다.
그 참경을 보고 멍하니 뒷걸음질 치던 다른 소년병의 상반신은 철퇴를 맞고 척추만 남긴 채 비틀거리다 어둠 속으로 고꾸라졌다.
“젠장, 그러니까 튀라니까!”
반 박자 늦고 만 카이센은 입술을 짓씹으며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뒤엉킨다, 혈향과 탄내가.’
횃불이 바닥을 나뒹굴며 숲의 그림자가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그 그림자 속으로 이형의 거구가 섞여들었다.
“Kun Ta Ni shiRaooooOOOO!”
즐거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카이센은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눈동자만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 개 같은 상판으로 좋아 죽겠다고 웃어젖히고…….
등허리에서 태도를 뽑자, 산을 삼키는 화염의 불길이 칼날에서 아롱거렸다. 카이센이 말했다.
“Oshide(덤벼).”
반쯤 동시였다.
우루크 전사가 철퇴를 휘두르며 돌진한 것과, 카이센이 지면을 박차 하늘로 솟구친 것은.
휘리리리릭───!
아래쪽을 휩쓰는 철퇴를 피해내는 그 순간, 허공에서 몸을 두 바퀴나 휘돌려 칼날을 팽이처럼 휘두른다.
────탁.
카이센이 베기를 마치고 지면에 착지한 순간이었다.
우루크의 머리통과 상반신에 얇은 혈선이 그어지나 싶더니, 초절간에 피분수가 용솟음치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푸하아아악─────!
일단 하나.
카이센이 칼을 바닥에 휘둘렀다.
칼날에 묻었던 핏물이 그 궤도를 따라 흙바닥에 새빨갛게 펼쳐졌다.
“까불지들 말고 동시에 덤벼!”
카이센이 제법 능숙해진 괴어로 그렇게 말하자, 횃불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구들이 걸어 나왔다.
불길은 계속 거세져갔다. 산을 모두 집어삼킬 만큼 크고 힘차게.
우루크 외곽 부대는 카이센과의 전투에 눈이 팔려 불을 끌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카이센 녀석.”
이만치 멀리에서조차 그 산불은 선명하게 보였다. 별들이 섬뜩하게 돋아난 능선에 앉아 있던 울프가 미소를 지었다.
“하루도 아니고 한나절 만에 성공했는데?”
흥, 카밀라가 등허리에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을 차며 일어섰다. 용병대장 엘토람이 병단에게 고함을 쳤다.
“어서들 일어나, 이 쓸모없는 자식들아! 파티 타임이다!”
그 시각, 카이센은 칼집과 칼을 교차시킨 채 자세를 낮추었다.
십문자도 제1식, 원(圓).
십문자도의 기본자세이자 모든 자세의 연계 동작이 되는 극한의 수세.
“GGGGGGSHEEEEEEEEEEEEEEEEEEEEEEEEKKKK!”
일순 짓쳐들어오는 도끼날.
공격의 궤도로 이 십자를 밀어 넣는 걸로 십문자도의 형(形)이 시작된다.
카아아아앙───!
날붙이끼리 부딪친 후의 반동.
보였다, 아주 짧은 찰나에 열린 허점이.
으스러질 듯이 울리는 손목의 격통을 억누르고, 한순간에 칼을 칼집 속으로 집어넣은 다음.
─ 십문자도 제4식, 발(發).
빼내면서 벤다.
허점을 베어낸 뒤에 물러선다.
그렇게 물러났을 때, 우루크 전사는 카이센의 발치에 고꾸라져 각혈을 토하고 있었다.
자, 웃어봐.
이래도 재미있는지.
그 머리통을 짓밟고, 목을 깊숙이 베어냈다.
피거품이 질퍽하게 터져 나오는 목을 붙잡은 우루크가 고통스레 울부짖었다.
다른 우루크 전사들이 멈칫하며 이 기이한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Waaaaarrr……?”
“Anu on Shikeraber……?”
단 일합에 전사가 둘이나 죽었다.
그것도 인간 꼬맹이에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멍하니 주춤거리던 우루크들에게 카이센이 손가락을 까딱해 보였다.
“뭘 꾸물거려. 바로바로 덤벼!”
카이센의 혈투가 이어지던 그 시각, 우루크들은 문득 공세로 전환한 민병대에게 허를 찔린 참이었다.
그 허점을 노리고.
옆구리로 치고 들어온 페이쿼리어 병단은 우루크의 전열을 마구잡이로 유린했다.
“제1열, 당겨, 쏴!”
“제2열, 대기, 쏴!”
“제3열, 당겨, 쏴!”
쉭쉭쉭, 총성이 일 때마다 우루크들이 무너지듯 고꾸라졌다. 총알을 연신 맞고도 달려 나온 초자연적인 크기의 거구가 있었다.
“전투 족장이다!”
“나리!”
일반적인 우루크보다 더 거대한 그 부족장을, 가짜 용사 카밀라가 맞았다.
“나는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성검이 대리자의 부름에 응한다.
거칠게 울부짖으며 토해져 나오는 홍련의 검강. 피로 물든 세계를 붉게 씻어내는 성검, 아라다만텔의 고유 색채.
“널 죽여 버리겠다.”
그 싸움은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공화국 병사들은 분명 족장과 페이쿼리어가 충돌한 것까지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허나, 아라다만텔의 칼날에서 핏빛 번개가 번뜩였나 싶던 순간, 놈의 거구가 일도양단되며 핏물을 사방에 흩뿌렸다.
“저, 저게 바로 필두 페이쿼리어……!”
그 광경을 우연히 보았던 민병대는 전율하며 고취되었고, 우루크들은 사기를 잃고 하나둘씩 뒷걸음질 쳤다.
“모조리 쓸어버려, 한 새끼도 남기지 마.”
족장의 시체를 짓밟고 서서, 그 위로 칼날의 피를 털어내는 카밀라의 눈빛은 형형했다.
이형의 역겨운 피비린내 속에서 살육전이 시작되었다.
총성이 끝없이 울리는 가운데, 숲이 타는 탄내와 시체가 타들어가는 누린내가 뒤엉키며 꿈틀거렸다. 전쟁의 시대였다.
암흑시대, 1696년.
인페르노 라인 전선의 전화가 더없이 격렬해져 가던 그해, 카이센은 이러한 전장을 전전했다.
그때 소년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 * *
“사상자 숫자는?”
전투는 대승으로 끝났다.
카밀라가 아라다만텔을 칼집에 납도하며 묻자 엘토람이 대답했다.
“사망 서른셋에 경상자 오십일곱입니다.”
“그리고?”
“죽은 우루크는 4천 마리는 넘을 듯합니다.”
병단의 병사들은 돌아다니며 덜 죽은 우루크들을 죽이고 있었다. 숲에 숨거나 도망치던 놈들을 모두 끌어내 베었다.
“별동대치고는 꽤 많네. 그나저나 총알도 최소 4천 발은 넘게 썼단 소리네.”
병참을 보충하고 가야겠군.
그것뿐만이 아니야.
인페르노 라인 안에서 우루크 별동대가 4천 마리나 나타나다니…… 대체 어떻게 여기 안으로 들어온 거지?
‘섬뜩할 정도로 불길해. 그 영감탱이한테 되도록 빨리 보고해야겠는걸.’
할테네, 곧 민병대 대장 잭이 다가온 건 그즈음이었다.
“더,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고개를 숙였던 잭은 일순 넋을 잃었다. 처음 만난 페이쿼리어의 용모가 더없이 아리따웠으므로. 카밀라가 말했다.
“여기 싸가지 출타한 꼬맹이 하나 왔었지?”
“꼬맹이요? 아, 예.”
“어딨어, 걔.”
“봉화를 올리러 간다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근데 정말 그딴 꼬맹이가 페이쿼리어 병단 소속인 겁니까?”
그딴 꼬맹이?
그 말에 목뼈를 우득 꺾으며 발끈하고 나선 것은, 병단의 최고참 중 하나인 장총 진이었다.
“덕분에 살았다면서 말하는 뽄새가 좀 이상하지 않나?”
“예……?”
“당신, 카이센 덕분에 산 줄 알아. 하, 진짜 공화국 얼간이 새끼들은 뭐 이런지.”
요한 울프 프로스트가 그 사이를 가로막으며 중재에 나섰다.
“진정하게, 진. 미안합니다. 전투 직후에는 모두 예민해져 있어서.”
그때 엘토람이 곰 대가리를 쳐들고 코를 킁킁거리나 싶더니 씩 웃었다.
엘토람이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간 카밀라는 곧, 사체를 매장한 구덩이에 흙을 덮는 중인 카이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루크의 도끼날을 삽으로 삼아 흙을 덮던 소년은 페이쿼리어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뭐 하냐?”
“불을 피울 때 도와줬던 녀석들. 우루크의 기습에 죽었어.”
“아는 사이였냐?”
“아니. 내가 너처럼 강했으면 이 녀석들을 지켜 줬겠지만.”
카밀라는 흙 덮기를 마쳐가는 카이센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흙무덤 앞에 조약돌 몇 개를 묘비처럼 쌓았다.
“여름은 아직 본격적으로 오지도 않았어. 이런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다가는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수분이 고갈돼서 뒤진다.”
그리고 카이센의 등을 때렸다.
평소의 구타와는 다르게, 묘하게 자상한…… 지금 이 행동을 칭찬해 주기라도 하듯이.
“그러니까 울지 마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이런저런 덕담을 가벼운 마음으로 주고받을 수 있던 마지막 순간이었던 것이다.
* * *
인류의 남방 한계선(限界線)인 인페르노 라인이 돌파당하던 날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핀 기수가 숨이 넘어갈 듯한 급보를 전해오던 날…… 그래, 그 순간이었지.
그 전에 카이센이 소속된 카밀라 병단은 물자 보급을 위해 <아퀴타이나>에 체류 중이었다.
“저것 봐. 백골 병단이야.”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라던데.”
“난 실제로 같이 싸워본 적도 있어. 저건 그냥 괴물들 집단이야.”
<아퀴타이나>.
고대부터 번성해온 이 군사도시는 본래 구공화국의 중서부 소도시였다.
벨리소르 대하를 따라서 도시는 중부의 대도시 <아우렐리노플>과 남서부 항구 <아리스타포>와 연결된다.
또한 인페르노 라인의 철도를 따라서 각종 병참 보급 열차가 통행하기도 하였으니, 현재 인류의 중서부 요충지 역할을 수행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진, 네가 책임지고 보급품 확인해.”
긴 전란 속에서도 <아퀴타이나>의 전경은 화사했다.
도로는 판석으로 포장되었고, 피난민들은 공장에서 노동하여 정당하게 음식을 배급받고 있었다.
시계탑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도로를 걸으며 카밀라가 지시했다.
“싸구려 총알이나 총 주는 새끼 있으면 나한테 데려와. 강냉이 다 털어줄 테니까”
“예입, 맘.”
“내가 왜 니 애미야, 개새야.”
“아니, 나리, 마님이라고 한 겁니다.”
카밀라의 주먹을 피해 도망치며 장총 진이 항변했다. 카밀라가 말했다.
“울프, 너는 교회에서 대금 제대로 치러주는지 확인해.”
“알았어.”
“엘토람, 너는 기껏 쉬라고 했더니 하루 종일 떡만 치지 않게 잘 감시하고. 바로 출발해야 될 수도 있으니까.”
“넵.”
“나는 도원수 그 변태 늙은이한테 보고하고 올 거야.”
길 양쪽으로 물러난 시민들이 존경의 시선을 보내며 감히 움직이지 못하던 그때, 누군가가 병단의 앞길을 막아섰다.
“……?”
모두의 시선이 당혹감으로 물들었으나, 대상의 외형을 확인하자마자 납득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카밀라.”
그녀의 머리색도 백발이었다.
눈동자 또한 황금빛 용안이었다.
“용케도 살아 있구나.”
허리춤에 차고 있는, 유려하게 세공된 칼집에 꽂힌 장검은 극위성검 타스알포.
칼집 안에서 타스알포가 푸르른 기운을 뿜어내자, 그에 공명하여 카밀라의 허리춤에서 아라다만텔이 붉은 기운을 토해냈다.
“너야말로 명줄 참 오지게 기네, 샤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