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0)
가짜 용사 이야기-90화(90/310)
제90화
타르혜 론델, 더럽혀지고 썩어 문드러졌던 모든 시공의 파편들을 빛으로 밝히는 창세의 격랑.
「시 시시 시시 싫 어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다차원에서 들려오는 듯, 뇌를 송두리째 뒤흔들던 안리달의 목소리가 절규로 차원을 찢는다.
아무리 시공을 뒤틀어서 그 공격을 피하려 해도, 그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항력이었다.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초고속 재생으로 발버둥 치는 육신 한 점 남지 못하고, 그 소름 끼치는 얼굴을 가린 가면조차도 불타 사라지고.
오직, 말끔하게 핵(核)만이 허공을 날았다.
[테르시아 : ───메이안!]그 핵이 드러난 걸 확인한 순간.
핵의 주위에서 월화(月華)들이 수없이 피어난다. 이 또한 월광검으로 자아내는 메이안의 기적.
그 달빛의 덩굴들에 휘감기던 와중의 어느 순간, 핵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다시 육신을 재구축하려 시도한다.
그러자마자 번쩍이며 날아든 황금의 창날에 그 중심부가 꿰뚫렸다. 테르벨의 뇌창이었다.
[테르벨 : 테르시아!]빛의 군주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합주를 쳐다보는 시간은 끝났다.
왜일까.
아니, 당연한 걸까.
테르시아는 혼절하여 쓰러져 있었고, 테르벨이 다급히 달려가 그 몸을 안아들고 있었다.
[알카이오스 : 카렌덴 성하!]그리고 이 이야기의 마지막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안리달의 마지막 명령이었을까.
안리달의 마지막 발악이었을까.
공간 전체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붕괴하는 공간 속에 갇혀서, 공간과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메이안 : 카렌덴 오빠!]차원의 붕괴를 막기 위해, 카렌덴의 검은 안개가 균열 곳곳으로 파고들어 틈을 메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카렌덴 : 아, 이런…….]지금까지 얼마나 무리했는지, 화면에 비치는 카렌덴의 눈과 코와 입으로 핏물을 폭포처럼 쏟다가 눈자위를 뒤집으며 쓰러졌다.
[뤼카엘 : 주인님?!] [테르벨 : 카렌덴!] [화룡 벨’다키둔 : 아빠!]안리달의 단말마 섞인 깔깔거림이 메아리치던 파멸의 시간 앞에서, 개인 회선으로 전언이 왔다.
[카듀엘 : 에누엘, 샤릴리온의 형질흡력을 준비하십시오.]시공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전리품으로서 시공 정원을 장식하고 있던 고대의 열주나 석조물들이 차례차례 무너지고 부서지며 쏟아진다.
제대로 자세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한 격렬한 진동, 아니 한 세계가 붕괴하는 지진.
[카듀엘 : 제 힘을 일곱 배 증폭시킨다면 차원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겁니다.]이건 두 가지 이유로 성립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하나.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곳에 올 때처럼 두 번의 구멍을 뚫어야만 했다. 샤릴리온이 힘을 발출할 수 있는 건 한 번뿐이므로.
둘. 차원 역장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으므로, 지금 여기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카듀엘 : 우리는 세상의 장작. 장작으로서의 긍지를 품고 사명의 끝으로 나아가십시오, 에누엘.]누군가가 여기 남아, 계속 그 균열을 지키는 게 아니라면.
[카듀엘 : 장작이라고 해서 세상을 밝히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장작이 없으면 빛은 타오를 수 없고, 세상의 낮은 곳으로 갈 수 없지 않습니까.]이때 에누엘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때 에누엘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나는 그저 멍하니 영상 속의 카듀엘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동기화율 감소 경고가 떠오르지 않았다.
[카듀엘 :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 빛을 전하는 통로가 되십시오.]에누엘은 그런 카듀엘의 시선을 그대로 받았던 것 같다. 그 신념의 불꽃을 받아낸 것 같다.
아니, 안 돼…….
성화를 넘겨주듯, 진성검 히스기비드의 섬광이 들이닥쳤다. 그 시공 붕괴의 힘을 삼킨 샤릴리온의 칼날이 어지러이 일렁인다.
[카듀엘 : 대장, 제가 길을 만들겠습니다.]그렇군요. 이게, 카듀엘 당신의 마지막이었군요…….
그 고철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선택한 삶의 마지막이었군요.
이것이, 당신의 사명의 끝. 우리 가짜 용사들과 너무나도 똑같은 삶의 종막.
[알카이오스 : ……카듀엘, 지금까지 고생했다.]시공의 외벽이 크게 갈라지더니, 수많은 파편으로 부서지며 위협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뤼카엘 : 좋았어, 카듀엘! 카듀엘! 너희들도 어서 와!]뤼카엘이 요니울란을 휘둘러 엄호하는 가운데, 테르벨이 테르시아를 안고 나갔고 메이안이 그 뒤를 따랐다.
[카듀엘 : 시간이 없습니다, 에누엘! 어서 나가서 차원 끄트머리에 구멍을 뚫으십시오!]몇 번을 망설였을까.
그 족히 수천 번을 망설였던 찰나의 시간 속에서 동기화 실패의 경고는 없었다.
살리겠다고, 같이 돌아가겠노라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하나 모두 실패로 이어졌을 뿐…….
[카듀엘 : 에누엘!]왜죠? 어째서, 당신들의 죽음은 꼭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리고 어째서, 당신들은 당신들의 죽음을 이렇게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까?
그 무엇도 묻지 못한 채, 몸을 돌려 내달렸다.
히스기비드의 섬광이 끝없이 박히는데도 닫히기 직전인 시공의 균열 속으로.
카듀엘이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카듀엘의 유언이었다.
[카듀엘 : 고맙습니다. 뒤를 부탁합니다.]그 균열이 닫히려 하자, 뤼카엘이 마침내 상황의 진실을 깨닫고 카듀엘에게로 돌아섰다.
[뤼카엘 : 카듀엘! 카듀엘!]그리고 닫히기 직전인 균열 밖으로 빠져나가려 하자, 알카이오스가 뤼카엘을 강제로 붙잡았다.
시공의 균열이 닫혔다.
그리고 차원 회랑 끄트머리를 흡수한 히스기비드의 힘으로 깨트린 것이 안리달 토벌의 끝, 시공 정원이 소멸하기까지의 과정이었다.
후세의 페이쿼리어들처럼.
카듀엘 또한 웃으며 죽었다.
진성검 히스기비드는 창세의 시편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소멸하지 않았다. 나중에, 카렌덴이 공허 차원의 떠돌던 히스기비드를 회수했다고 한다.
신화시대(神話時代),
타르혜 론델ㆍ엘디아ㆍ거듭남 (11)
이제 단 세 명만이 남은 엘디아 숙영지에는 구슬픈 적막만이 감돌았다. 들리는 건 뤼카엘이 요니울란의 칼날을 신경질적으로 가는 소리뿐.
[알카이오스 : 뤼카엘, 에누엘. 지휘통제실로 와라. 카렌덴 성하께서 작전 회의를 소집했다.]요니울란의 칼날이 갈리던 소리가 멎었다. 뤼카엘이 반항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뤼카엘 : 조금은 애도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던가요?] [알카이오스 : 그 불경한 태도는 그만둬라.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시다.] [뤼카엘 : 예, 알겠습니다.]뤼카엘이 통신을 끝내고 일어서더니 요니울란을 등갑에 차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말해주지 않아도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고. 근데 자식이 죽든 말든 눈물 하나 안 흘리는 게 정말 부모인가? 왜, 이번에는 아들이라도 하나 더 만들까?」
「뤼카엘.」
「실언이야. 잊어줘.」
이 세상의 온갖 불합리함 속에서, 카렌덴이 뤼카엘에게 원망의 대상이 된 것처럼 보였다.
보지 못한 거야.
슈르비엘이 죽었을 때 카렌덴이 뤼카엘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려 했던지를.
어색한 침묵 속에서 숙영지를 떠나 지휘통제실에 도착했다. 수뇌부가 다 집결해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온 것들>과 알카이오스와 삼신룡과 카렌덴의 제자 에밋사(후일 페이지 가문의 시조)와 아인 수석 기술관 귄터와 크힐림까지.
「이제 시작하지. 다 알고 있는 것들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겠다. 헬멧은 벗어라. 브리핑에 방해된다.」
그 명령을 받은 건 뤼카엘이었다. 뤼카엘은 짧은 한숨으로 반감을 숨기며 헬멧을 벗었다.
「예.」
카렌덴이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 장치가 허공에 대륙 지도를 크고도 상세하게 영사해냈다.
「알다시피 이 산맥은 안리달의 영지였다. 안리달은 슈’율큘라나 켈렉─샼과 동일한 힘을 받은 왕이야. 서열로만 따지면 놈들보다 아래였다. 하지만 직접 상대하면서 뭔가 느낀 점이 없나?」
알카이오스가 정중히 대답했다.
「2등급 권속들이 상당히 강력했고, 2.5등급 권속들까지 많았습니다.」
「그래, 그거다. 나도 삼륜 나리아두크와 정면으로 충돌했으나 예상외로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테르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쉽게 끝났다. 그러니까…… 에누엘과 카듀엘의 도움이 있어서 쉬웠지.」
「죽은 이의 이야기는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뤼카엘이 발끈하듯 눈썹을 떨자, 에누엘의 동기화 동작이 그 어깨를 힘줘서 붙잡았다.
동기화가 없었어도 이랬을 거다.
그만해. 원망의 대상이 잘못되었어. 이 잘못된 원망이 뤼카엘이 심연에 타락하게 된 배경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요토스가 이변을 눈치챈 것 같다. 안리달에게 새로이 권능을 부여한 것이 분명해.」
「요토스가? 확실해?」
창성의 달, 메이안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창백한 달 막센시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느꼈단다. 이 세계가 잠시 외우주와 연결되던 순간을. 아주 짧았지만……. 정말 섬뜩한 일이었어.」
「그리고 안리달의 심연 농도는 556,427로 슈’율큘라와 켈렉─샼의 수치를 두 배 가까이 뛰어넘었습니다.」
광룡 하라데리만의 말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의 골이 깊고 날카로웠다. 의문의 침묵이라기보다는, 불길한 예감에서 비롯된 침묵이었다.
졔안니르가 고개를 들었다.
「왜 너희들이 떼거리로 덤볐는데도 그렇게나 고전했나 했더니만…….」
「이제 우리에게는 이중 전선을 수행할 여력이 없어. 그랬다가는 무조건 패배한다.」
「카렌덴의 말대로다. 이제 내 함대도 3할도 채 남지 않았어.」
「그래. 라세핀도 이제 30개 편대가 전부다. 클론들은 이제 1할도 남지 않았어. 해방민 군대에게도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진왕도 고작 한 놈밖에 안 남았잖아? 이 정도면 충분해.」
메이안의 말에 카렌덴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지도가 사라지고, 눈보라 속에서 소름 끼치게 포효하는 불경의 형상이 비쳤다.
본 것만으로 식은땀이 등판을 적시고 머릿속에서 공포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언뜻 보기에는 거미처럼 생겼다.
그러나 그 어떤 거미도 저토록 거대하지도 않고 육신이 검푸르지도 않다.
고결한 연푸른색의 머리칼과 속눈썹을 지닌 여인으로 성장한 예리세리카가 말했다.
「거미 군주, 아쉬론입니다. 세계를 삼키는 거미황(皇)이라는 이명을 가졌어요. 왕이 아니라 황제입니다.」
저게 바로 그 아쉬론인가…….
아쉬론 사변 때, 온전하지 않은 상태를 노려 용현 레인 루드윅이 토벌했다던데…….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그때처럼 봉인에서 막 깨어난 참이라 힘이 불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몇 배는 강화되어 있으니 말이다.
「황제? 그런 호칭을 쓰는 진왕은 처음인데.」
「아쉬론이 요토스의 일등 권속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예리세리카는 요토스가 우리의 작전을 눈치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그래. 이 상황으로 볼 때 아쉬론을 쓰러뜨리는 건 엄청난 시간 싸움이 될 거다. 그런데…….」
「그런데?」
메이안이 재촉했다.
망설이던 카렌덴이 이어 말했다.
「이걸 믿어야 할지 모르겠더군. 누군가가 이 정보를 주고 갔다.」
다음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군주들과 요인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눈을 의심했다.
다시 지도가 떠올랐는데, 그 지도에는 여러 색의 광점이 떠올라 있었다.
아쉬론의 거미 제국의 지도였다.
모든 세력도와 군사 요충지, 그리고 권속들이 배치된 곳까지도 상세히 나타나 있었다.
「뭐야, 이게? 오빠, 분명 북극 쪽은 위성 스캔이 불가능했지?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그래. 그랬지.」
「근데 어떻게?」
「나도 의문이다. 그렇게나 강대한 창세의 힘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 준하는 심연의 힘까지 거느리고 있었단 게 꺼림칙해.」
등줄기에 불쾌한 땀이 촉촉이 배어 나왔다. 영혼의 심장이 꿰뚫렸던 장소가 간질거렸다.
‘설마……?’
그럴 수가, 아니, 하지만.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창세와 심연의 존재가 유르벨뭉이라는 신검을 영혼에 넣어두고 갔었다.
‘다른 존재인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존재가 둘씩이나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근데 2천 년 전에 어떻게 카렌덴과 접촉한 거지……?’
카렌덴이 띄워낸 정보를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던 <온 것들>의 리더, 테르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 자료를 안 믿고 오빠가 작전을 세우면, 시간에 맞춰 요토스를 잡을 수 있을까?」
「99.6% 확률로 불가능하다. 그 0.4%도 수백 번의 기적과 수천 번의 요행이 반복되었을 때에나 가능했어.」
「그럼 오빠의 0.4%를 믿고, 내가 한번 해볼게.」
그 한순간, 왜였을까. 나중에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멍하니, 테르시아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이유를.
테르시아가 항상 그토록 처연한 눈빛을 짓던 이유를.
그런 테르시아를 바라보던 모든 <온 것들>의 눈빛에도 슬픔이 깃들었던 이유를.
그저 그때에는 무언가를 막연히 느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럼 다녀오렴, 테르시아.」
막센시아가 작별 인사를 건넨 것을 기점으로, 테르시아의 얼굴이 변하였다.
외형적인 변화는 없었다.
눈동자의 무언가가…… 변했다.
마치, 어딘가 다른 시간대의 인장이 찍힌 것처럼. 다른 시간대 속에서 수십 살을 먹고 온 듯이.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일순간 황급히 커졌던 눈으로 동료들을 슬프게 바라보는 테르시아는 꼭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그때, 테르시아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카렌덴이 물었다.
「어땠지?」
「미안, 다 실패했어. 정말 모두 열심히 해줬는데…….」
「시도한 횟수는?」
「세 번. 아쉬론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게 고작이었어. 그때 요토스가 강림하고 말아.」
테르시아는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대체 어떤 슬픔을 안고 온 거지?
도저히 알 수 없었는데, 막센시아가 모든 걸 안다는 듯이 테르시아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 작전 설계의 미스다. 면목이 없다.」
「오빠 잘못이 아니야. 참, 여기, 그 정체 모를 존재가 줬단 정보는 완벽하게 맞더라. 이걸 믿어야 해.」
슈리간이 눈을 끔뻑였다.
「테르시아, 진심이야?」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죽어간 모두를 생각하자. 허무하게 끝나는 것보단 뒤통수를 맞아서 끝나는 게 나을지도.」
테르벨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당혹스러운데, 그 당혹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심연의 힘이 그토록 강했다지 않았나? 요토스도 원래 창세신이었으니 그 비열한 놈이 속임수를 쓴 걸지도 몰라. 우릴 파멸시키려고!」
「그러면 다음 기회를 노려서 철수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 방법밖에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
메이안의 발언에 뤼카엘이 입술을 멍하니 떠듬거리다가, 쉴 듯 말 듯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켈렉─샼을 쓰러뜨리고 죽은 슈르비엘은? 우릴 살리려고 죽은 카듀엘은요?」
테르벨이 침묵했다. 메이안도 입을 일자로 다물고 말았다.
테르시아가 뤼카엘에게 정말, 정말 뤼카엘의 그것보다도 더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짊어지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철수를 결정한 적 없어, 뤼카엘. 절대 그 아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아.」
「……!」
「뤼카엘, 걱정 마. 난 절대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아. 너희들이 어떻게 열어준 길인데.」
뤼카엘이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며 겨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다시 카렌덴이 손가락을 튕겨 허공에 지도를 영사시켰다.
「그럼 결정됐군. 정체불명의 존재가 준 정보에는 하르바도니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관문을 열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관문?」
「관문은 양쪽에 위치한다. 한쪽은 대륙 좌측의 영겁의 습지. 그리고 한쪽은 하르바도니아 중심부로부터 내려오는 산맥의 말미. 그리고 두 곳에는 모두 권속이 포진해 있다.」
「그냥 권속이면 뭐.」
메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친절하게도 그 권속들의 심연 수치까지 알려줬다. 하라데리만.」
광룡 하라데리만이 설명했다.
「아쉬론의 일등 권속, 베샨시두그는 34만으로 켈렉─샼과 슈’율큘라를 뛰어넘고, 다른 하나는 사등 권속 레퀸입니다. 26만으로 앞서 말한 두 진왕에 필적하는 수치이죠.」
테르벨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미쳤군. 황제라서 이게 가능한 건가?」
카렌덴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수치가 너무 지나쳐. 요토스가 아쉬론에게 엄청난 양의 권능을 나눠준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쉬론이 권속들에게 또 힘을 나눠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손가락이 떨렸다.
권속 하나하나가 진왕보다 강하거나 그 진왕에 필적하는 힘을 갖게 되다니.
그리고 그것이, 심연의 대군주가 이 땅에 강림하고 있다는 파멸의 전조라니.
「알겠나? 요토스가 오기 전에 아쉬론을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놈이 그토록 약화될 테니 말이다.」
테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쉬론과 요토스도 그걸 알고 있을 거야.」
「그걸 알아서 신중하게 나올 정도로 진왕이란 놈들은 겸손하지 못해. 그래도 지연전을 펼치고 있긴 하다. 그래서 내가 그 정체불명의 존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거다.」
턱을 신중하게 매만지던 테르벨이 결국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하지, 카렌덴? 슈리간은 이제 싸울 수 없고, 막센시아와 졔안니르는 말할 것도 없지. 여기 모인 우리가 전부야.」
「무리를 할 수밖에.」
「말해봐.」
「내가 뤼카엘, 에누엘만을 데리고 베샨시두그를 상대하겠다.」
「오빠? 무슨 소리야. 베샨시두그가 훨씬 강한 적이라며! 지금 심연 농도가 다른 진왕들보다도 높다며!」
「너희들은 힘을 온존시킬 필요가 있어. 물론 아수라도 같이 간다. 에누엘은 내 최고 걸작이니 이 정도면 이길 수 있어. 알카이오스.」
「예, 주인님.」
「테르시아와 같이 가라. 네 힘이 필요할 거다.」
알카이오스가 어센시쿼리어의 경례를 카렌덴에게 바쳤다.
「무운을 빕니다.」
「지금 이 결정이 승부의 기로다. 영원의 시간 동안 계속된 싸움을 끝낼 때가 온 거야.」
「역장을 돌파하고 나면? 저곳은 완전 극지대라고 들었는데. 함선도 출입하지 못할걸. 애초에 현재 무사한 함선의 숫자가 별로 되지도 않고.」
테르벨의 지극히 현실적인 의문에 카렌덴은 지극히 초현실적인 해답을 내놓았다.
「함선을 전진기지로 쓴다.」
「?」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어. 바로 작전행동에 들어서야 한다. 하르바도니아로 가려면 먼저 그 사이에 놓인 황무지를 통과해야만 해. 이동에도 시간이 필요해.」
「정신이 정말 하나도 없네.」
이마를 벅벅 긁는 메이안의 머리에 테르시아가 손을 얹었다.
「푹 쉬자, 모든 게 다 끝난 후에.」
<온 것들>이 하나둘씩 테르시아를 따라 지휘통제실을 나갔다. 모두가 나간 뒤, 알카이오스가 그 뒤를 따를 때 뤼카엘이 말했다.
「죽지 마십시오, 대장.」
「자네도. 하지만 그 자리가 죽어야 할 자리라면 마땅히 죽어야 한다. 뤼카엘, 우린 장작이다. 불이 아니야. 알겠나? 장작은 불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뤼카엘이 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대장님, 그렇다면 결국 저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건가요?」
알카이오스가 오랫동안 뤼카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오랜 전우와 헤어지게 되는 장소라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걸까.
알카이오스가 뤼카엘의 어깨에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젠가, 아는 날이 올까.
당신이 뤼카엘에게 해준 그 말이, 엘디아 오메크(06)를 만드는 신념의 반석이 되었단 걸.
용기의 선진들과 똑같이 살고, 똑같이 죽는 길.
그 길을 따라 걷고, 또 마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견고하게 지지하는 반석이.
「아니, 이 세계의 불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거다.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게 살고 누구보다도 위대하게 죽기 위해. 뤼카엘, 그걸 잊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