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1)
가짜 용사 이야기-91화(91/310)
제91화
[병참 모니터 : 비상, 대기권 안쪽에서의 공간 균열을 확인했습니다.]검은 태양 카렌덴의 기함, ‘린’호는 도약 추진을 통해 라토시바(Ratoshiba; 영겁의 습지)의 심장부로 단숨에 진입했다.
영겁의 습지.
오늘날에는 트라이덴트 포인트라 불리는 땅으로, 미답의 미궁들이 무수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험가들의 성지다.
[카렌덴 : 진입 5초 전, 꽉 잡아라.]지상에서의 우주선 도약 추진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상당히 위험한 기술이었다.
심연의 안개 속에서 출발지와 도착지의 시공간을 꿰뚫는 균열을 여는 것부터 난해했다.
원하는 지점에 도착한단 건 더더욱 비현실적인 도전이었다. 높은 확률로 우주선이 지층이나 바다에 처박혀 폭발할 수도 있었다.
– 정화된 세계에서는 이론상 가능할지 몰라도 심연 권역에서의 시도는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카렌덴은 그 초전술적 이동을 완성시킬 패기와 두뇌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읍……!」
일순간 전함이 크게 한 번 흔들리면서, 눈알이 눈구멍 밖으로 튀어 나갈 듯한 압력 변화를 느꼈다.
멍하니 숨을 들켰다.
몸을 추슬렀을 때, 현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으니까.
‘라토시바…….’
서리 안개가 거미줄처럼 광대하게 펼쳐져, 현악기처럼 독특한 선율을 띠는 극지방의 심연.
[카렌덴 : 주포 발사.]그 초자연적 대지 위에 도착한 봄바람호의 주포들은 그 즉시 포문을 열고 작동 상태로 전환.
창세시편의 계승자인 카렌덴은 모든 힘에 창조 문자의 힘을 실을 수 있었다.
그 힘이 전함의 주포와 연계되어, 차가운 안개로 뒤덮여 있던 늪지대를 휩쓸었다.
광자포들은 모든 심연을 속박해서 창조 질서 밖으로 추방하는 창명시편(彰明詩篇)의 힘을 담고 있었다.
그래, 그 창명검의 힘이 맞다.
권속을 봉인하는 유일한 도구로 적색산맥 공방전의 핵심이었던 그 힘.
그 힘을 저렇게나 자유자재로, 압도적으로 쓸 수 있다니…….
창명의 포화가 위협적인 늪지대나 서리 거미줄이 순식간에 소멸시킨다.
이 빛들이 거미줄을 따라 퍼져 나가면서 사방에서 찢어지고 비틀리는 비명들이 솟구쳤다.
빛에 노출된 망자들은 광자가 결합되어 이루어낸 사슬에 속박되어 순식간에 미립자로 분해되었다.
그러나 광범위하게 분열된 힘이었으므로 제3등급 이상의 심연들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물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기습의 목적은 지형 개척이었으니까.
이 땅의 주인이 이변을 알아채고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육군 병력의 상륙이 끝나 있을 터였다.
[뤼카엘 : 에누엘, 동쪽 착륙 지점 확보해. 내가 서쪽을 맡지.]에누엘이 샤릴리온을 등에 차면서 개구부 앞에 섰다.
「전원, 작전 준비.」
돌격대 전원이 각자의 중장비를 들고 에누엘 뒤로 도열했다.
[바라니예 : 추워 죽겠군요. 불알이 다 얼어붙겠네.] [그리피소른 : 네놈의 그 천박한 말투는 대체 언제쯤 고쳐지는 거지?] [올렌 : 말한다고 바뀔 것도 아니고, 내버려 둡시다.]마침내…… 개구부가 비스듬히 열리기 시작했다.
돌풍이 몰고 온 극지방의 차갑고 사악한 공기가 아머에 희뿌연 자취를 남긴다.
허연 입김과 함께 이리저리 날리던 머리카락 위로 프라이모아 헬멧을 눌러 썼다.
「엘디아 카타(05), 베샨시두그 토벌 작전을 개시합니다.」
신화시대(神話時代),
타르혜 론델ㆍ엘디아ㆍ거듭남 (12)
[새로운 적 : 탄-툴락.]– 현대에는 네크라크네(Necroarachne; 죽은 거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 흉골 부분이 피부 밖으로 펼쳐져 멀리서 거미의 윤곽을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수평선을 광란의 빛으로 채우며 밀려들던 탄-툴락들의 머리통을 타케논 장창이 뚫고 지나갔다.
[그리피소른 : 내찔러!]창극이 거미 다리처럼 커다랗게 펼쳐진 척추와 흉골을 깨부수고, 침을 질질 흘리던 골통을 피 안개로 만들고 지나갔다.
[올렌 : 당겨!]장창은 열 마리가 넘는 탄-툴락을 꼬챙이로 꿰뚫은 채 다시 방패로 되돌아왔다.
탄-툴락들은 방패의 홈을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자연스레 방패 앞에 사체가 쌓였다.
육벽(肉壁)이 생기며 방어가 탄탄해지는 것이다.
[바라니예 : 크하핫! 별것 아니구만?] [에누엘 : 그리피소른, 이번에도 현장 지휘를 너에게 일임한다.] [그리피소른 : 예! 맡겨 주십시오, 대장.]아쉽게도, 그 장엄한 학살의 광경을 지켜볼 여유는 없었다.
[뤼카엘 : 베샨시두그와 교전 중! 어서 와, 엘디아 카타!]늪지대가 사라지면서, 자연 법칙에 어긋난 원시의 땅이 오롯이 드러나 있었다.
그 땅 위를 단숨에 내달린다.
여기저기에서, 뒤틀린 형태의 석조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들어찬 채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모험가들이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늪 아래 가라앉은 미궁의 진면인가.
석조물들은 태고의 빙하와 고대의 잔해들이 뒤엉켜 새로운 고대 예술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미궁의 도시, 원시의 중심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겠군…….
[카렌덴 : 뤼카엘, 아수라를 도와서 놈의 움직임을 막아. 10초면 된다.]미궁은 땅 밑으로 계속 내려가며 거미집처럼 얽히고설켜 있었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이 땅의 주인이 기거하는 옥좌.
[Chapter – 04 : 공안공(公黫公), 베샨시두그.]– 고대의 북부 대공으로, 거미 군주를 섬기는 다섯 권속, 오본위(五本位)의 수장입니다.
– 요토스의 축복을 받아, 일시적으로 통상적인 진왕들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 베샨시두그는 사람들을 늪 밑에 깊숙이 가라앉힌 뒤, 차가운 망자로 재탄생시키길 즐겼습니다.
심연의 대군주, 요토스는 창세신 겔드하리아로부터 핵을 빼앗을 때 생명을 창조하는 기술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저 버린 것인지.
그 대신 창조된 생명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힘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곳은 주인의 악취미를 즐기는 괴물의 왕국이었다.
[카렌덴 : 놈을 쓰러뜨리려면 창명시편을 정통으로 맞히는 방법 말고는 없겠다.]베샨시두그는 처음부터 그 힘과 능력을 인정받아, 하르바도니아 이남에 진왕에 필적하는 영지를 부여받은 존재였다.
베샨시두그는 실제로 왕이 아닌데도 자신만의 권속을 부렸으며 진왕들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거미 군주가 한 세계를 멸망시키던 시절에, 하수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풍문도 있었다.
[뤼카엘 : 아수라가 도와줘도 저 혼자서는 안 됩니다! 직접 상대해 보십시오!]그날의 싸움은 바로 그런 존재와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바로 그렇기에.
싸움의 시작부터 비극은 예정돼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일까.
「작전지역 도착, 제1목표 토벌을 개시합니다.」
태산처럼 거대한 신(神)의 육신.
그 거미가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울부짖자 자연이 뒤바뀌고 지리가 일그러진다.
「하하하하하하! 고작 이게 전부냐, 카렌덴? 날 더 즐겁게 해봐라!」
베샨시두그의 거미 발에 삼두룡 아수라의 팔이 2개 날아갔다. 동시에 수룡 예리세리카의 얼굴이 거미줄에 뒤덮였다.
예리세리카의 황급한 비명.
화룡 벨’다키둔이 베샨시두그에게 불을 뿜는 동시에 광룡 하라데리만이 빛을 토해내 그 거미줄을 녹였다.
[카렌덴 : 나 지금 여기, 무릎 꿇고 기도하니.]그때, 카렌덴이 양손을 맞잡았다.
옛 시를 읊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문을 외는 것 같기도 한…… 거룩한 속삭임과 함께.
선율의 떨림이 고귀한 파장을 갖추고 발밑을 훑고 퍼져 나가자, 베샨시두그가 오염시키던 땅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카렌덴 : 심상 구축, 유량세존(流量世尊).]카렌덴 주위로 펼쳐진 4개의 원진, 그리고 그 일대 공간을 역장째로 교란시키는 안개가 자욱하게 일기 시작했다.
진리의 탐구자, 마법의 창조주, 검은 태양 카렌덴의 싸움을 직접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타르시요에게 그대로 물려준 고결한 목소리…… 거룩한 언어의 낭송, 언어의 낭송이 궁극의 힘을 낳고 키운다.
[카렌덴 : 태초성광창세천지(太初聖光創世天地), 지내공광혼돈(地乃空曠混沌), 연면회명(淵面晦冥), 성광지영운행어수면(聖光之靈運行於水面).]단어가 창세의 힘을 집속시킨다.
단어가 문장을 이루고 문단으로 확장될 때 창세의 힘 또한 더욱 강대해져 간다.
그 일순간에, 베샨시두그와 우리 모두 이것이 승부의 분기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뤼카엘 : 가자, 에누엘!]땅을 박차는 동시에, 샤릴리온이 토해내는 검광이 마력을 자동적으로 증폭시킨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얇게 흐르는 공기의 막을 뤼카엘과 나란히 달렸다.
베샨시두그가 수백 개의 독니로 쏟아내는 천라(天羅)의 그물, 요니울란이 보랏빛으로 울부짖으며 그 거미줄들을 찢어발긴다.
[카렌덴 : 성(聖), 광(光), 왈(曰), 당(當), 유(有), 광(光), 즉(卽), 유(有), 광(光).]요니울란이 미처 해치우지 못한 거미줄은 샤릴리온의 빛 아래에서 부스러지고…….
서로의 동작이.
서로를 돕는 연계가.
서로의 움직임과 사고를 더욱 빠르게 만든다. 가속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 빛의 질주가 시간의 틈새로 파고든다.
은빛과 보랏빛의 향연.
그 빛줄기가 일직선으로 지나간 자리에서 끊어진 거미줄이 허공에서 덧없이 터덜거렸다.
[카렌덴 : 성광시광위선(聖光視光爲善), 수분광암(遂分光暗).]시편도 완성도 가속되어 간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카렌덴에게 베샨시두그의 견제가 이어지나, 이곳에 집중하고 있는 한 필살 공격은 어렵다.
저 정도 공격은 아수라가 충분히 막아내고도 남는다.
일보(一步).
일섬(一閃).
일보(一步).
일섬(一閃).
빛의 향연이라는 말로는 수식하기 어려운, 수십의 참격 너머에서 마침내 살(殺)의 간격에 닿았다.
전투 동기화 : 룬 베기 – Yanabatsu.
칼의 바람이 그 육신 위로 창세의 문자를 새길 때, 달려드는 거미줄과 거미 발들은 요니울란에 의해 찢어발겨지고…….
「하하하하하하!」
그러나 그 순간.
베샨시두그의 머리통들이 일제히 분열하며 그 안에서 새로운 머리통이 돋아났다.
「네년의 칼 놀림은 제법 흥겨웠다.」
이미 그 독니에서 독액이 흐르고 있었다.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문자가 완전히 새겨지기도 전에, 회피할 새도 없이 터져 나왔다.
불현듯, 그 궤도가 뒤바뀌었다.
순식간에 그 머리통을 휘감은 요니울란의 칼날에서 혼백 파열의 힘이 발현된다.
그러나 찢는 것만으론 안 된다.
그렇기에 뤼카엘은…… 영혼과 육신의 근골을 찢어서 그 궤도를 바꾸는 데에 집중했다.
사복검은 검과 채찍의 조합이다.
그 찰나조차도 되지 않는 한순간에, 가장 큰 힘으로 가장 빠르게 끌어당길 수 있는 방법은…….
화면 위에 영상이 떠올랐다.
뤼카엘이 화면을, 이쪽을 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뤼카엘 : 넌 살아, 에누엘.]요니울란에 의해, 독액을 쏟아내던 베샨시두그의 아가리가 뤼카엘에게로 향했고.
‘아니.’
프라이모아 아머로도 버틸 수 없는 심연이 그 육신을 뒤덮었고, 아머가 녹으면서 팔과 다리가 머리통이 부패되며 수증기를 막대하게 피워 올렸으며.
‘이건 아니야.’
시야 UI에 송출되던 영상이, 날카로운 잡음과 함께 소멸했다.
Yanabatsu.
꿰뚫다.
거스를 수 없는 전투 동기화의 움직임 속에서, 룬 새기기에 공명한 샤릴리온이 울부짖었다.
찬란한 은광.
눈부신 열량이 극점에 달한 다음 순간, 창세의 명령을 받은 빛이 베샨시두그의 가슴팍에 거대한 구멍이 뚫어냈다.
그보다 반 박자 뒤에.
더 강대한 힘을 지닌 창조의 빛이, 문자의 형태로 사슬처럼 엮이며 사방에서 수십 겹씩 솟구쳐 올랐다.
「끄, 끄아아아아아───!」
창명시편의 영창이 끝났다.
시편이라는 매체로 엮여 있던 문자들이 거대하게 솟아올라…… 그대로 베샨시두그와 육신과 영혼을 결박했다.
「───뭐 하는 거냐, 카렌덴? 지금 나를 능멸하는 거냐?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잠재우겠다고?」
결박된 순간부터, 모든 저항은 무의미하다.
창세의 명령 아래, 대상의 모든 힘을 무(無)로 만들어 버리니까. 섭리를 벗어난 우주의 존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영원의 생명도, 영원의 권능도, 불멸의 물질과 현상도…….
「하, 하하하하하하! 재미있군! 좋다, 좋아! 기쁜 마음으로 너와의 재대결을 고대하겠다───!」
사슬을 형성하는 문자들 속으로 모든 빛이 빨려 들어가더니, 다음 순간 눈을 뜰 수조차 없는 빛으로 폭발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돌아와서, 나의 공국을!」
대기를 뒤흔들던 위압감은 그 빛과 함께 사라졌으나, 소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 무어라 외치고 있었으니까.
스스로도 모를 말을, 미친 듯이 외치며, 뤼카엘을 뒤덮은 심연을 헤집고 있었으니까.
건틀릿을 녹인 심연이 손가락을 녹이고 또 그 손가락이 재생되는 게 반복되었으나, 그 아픔조차도 행동을 멈추진 못했다.
스스로도 놀랐다.
이렇게 행동하고 있단 점에.
동기화 실패 경고가 잇달아 뜨면서 심장에 터질 듯한 아픔이 일었는데도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아니잖아…….」
아니, 이 아픔은…….
「……이건 아니잖아!」
동기화 실패에서 오는 아픔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낯익고, 슬플 정도로 낯익은 이 아픔은 바로…….
「이렇게……!」
부탁이다. 내가 널 증오할 수 없게 만들지 마.
이렇게 가버리면.
이런 아픔을 남기고 가버리면.
내가 대체 어떻게 널 증오할 수 있단 말인가. 타르시요의 원수인 너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냐고.
「……이딴 식으로,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라고!」
얼마나 숨을 헐떡였을까.
얼마나 미친 듯이 파헤쳤을까.
마침내 뤼카엘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살아 있어.’
2개의 감각이 교차했다.
‘살아 있다, 아직은.’
안도의 한숨.
그리고 강렬한 기시감.
유년기에 어머니가 죽던 그 순간의, 이별에 대한 막연한 예감.
「정신 차려, 뤼카엘!」
뤼카엘에게 남은 육신은 뼈대만 남은 왼팔과 상반신 조금과 머리 반쪽이 전부였다.
「막센시아 성하에게 가기만 하면 돼! 카렌덴 주인님! 뤼카엘을, 뤼카엘을 빨리 막센시아 성하에게……!」
심연이 이미 핵을 침범했으므로, 되살아날 방책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도끼날이 빠져나간 어깨로 선혈을 뿜어내던 어머니 앞에서 통곡하던 그날처럼.
무의미하게, 무의미하게.
「에누엘…….」
그때 뤼카엘의 입이 열렸다.
안면 근육도 얼마 남지 않았으며 입술도 이빨도 흉측하게 녹아내린 입으로.
「……너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야. 그건 너무 슬프잖아? 크크.」
그 슬픈 미소가, 죽은 카밀라와 똑같은 유언이, 뤼카엘의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넌 죽지 마. 끝까지 살아서, 다 끝낸 다음에, 내 무덤 위에 술 한 잔 따라줄래……? 그러면 정말, 모든 게 다 끝난 건지 나도 알게 될 테니까…….」
마침내 완전한 점액질로 녹아내린 육신은 땅바닥에 질퍽하게 쏟아졌고…….
오직 요니울란만이 지표면에 꽂힌 채로 살아남아, 주인의 죽음에 통곡했다.
눈밭에 내려놓았던 샤릴리온이 덩달아 구슬피 울었다.
그때에서야 분명히 알았다.
검을 맞부딪칠 때 뤼카엘의 칼 너머에서 오직 슬픔만이 전해져왔던 까닭을…….
세상을 사랑하고.
동료를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해서.
그냥, 평화로워진 세계에서 다른 엘디아들과 다시 모여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뿐 아닐까?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뤼카엘이 해왔던 짓을 긍정할 수 없단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 간절하고 또 눈물겨운 목표가 생겨나기까지 거쳐온 삶의 행적을 알게 되어서일까.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2천 년 후의 미래에서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아간 당신을.
또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이렇게나 올바르고 웃음이 많고 정의로웠던 당신을, 그렇게 타락시켜 버린 심연(深淵)의 주인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