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2)
가짜 용사 이야기-92화(92/310)
제92화
하르바도니아는 세상의 끝이다.
신성인류제국의 영토만큼이나 광대한 이 영원한 죽음의 땅에 거미 군주, 아쉬론의 대제국이 들어앉아 있었다.
하르바도니아에는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무인지경의 설원과 빙하뿐인 이 땅에는 산 것의 메아리는 어디에도 없고 오직 섬뜩한 정적뿐이다.
오늘날의 하르바도니아도 혹독한 세계이나, 주인이 군림하는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흩날리는 눈보라부터가 제3등급 심연이었다. 몸에 달라붙어서 서서히 그 육신을 좀먹는 탐학의 결정.
아쉬론의 이명, 불경의 신비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붙은 것일까.
그렇기에 통상적인 공격이란 불가능했다.
전함들은 BTT-04 하이퍼 캐리어, 즉 기함급 전함이 아니면 그 동력원이 얼어붙었다.
기함들조차도 대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카렌덴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에누엘 돌격대에게로 전파했다.
「너희들은 그만 돌아가라. 가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아라. 이 싸움은 내가 끝내겠다.」
전함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저들의 머릿속에는 하르바도니아의 불경한 눈보라가 새하얗게 펼쳐지고 있을 것이었다.
‘분명, 에누엘 돌격대의 역사는 이 시점 어느 지점에서부터 홀연히 사라져.’
그것이 기묘했다.
올렌 듀렌은 북부의 새 대공이 되었는데, 그리피소른 같은 다른 지도자들은 어디로 가고?
그 의문을 간파하기라도 하듯, 그리피소른이 침묵을 깨고 나섰다.
“예, 가정을 꾸리러 가 보겠습니다. 대장을 따라서 이 원정을 끝낸 다음에.”
「……?」
“당연히 저도 갑니다.”
바라니예였다.
그러자 경쟁하듯 모든 이들이 거수하면서 일어섰다.
“저희들도 갑니다.”
“대장, 저희들도.”
충격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충격이 이 정도인데, 당시 에누엘이 느꼈을 충격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그 충격의 정도는, 늘 감정의 변화 없이 차분하기 그지없던 대사 동기화 대본이 한참이나 늦게 떠오른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었다.
「내 말을 못 들은 거냐? 인간은 갈 수 없다고 했다.」
“카렌덴 성하의 바짓가랑이 붙들고 애원하면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요. 아닙니까?”
바라니예가 눈썹을 찡긋했다. 그러자 다른 대원들이 껄껄거리며 동의했다.
입이…….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제는 감정조차 동기화되어 가는 것일까, 이 순간에 에누엘이 느낀 가슴 떨리는 슬픔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뜨겁게 맺혔다.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에누엘의 눈물일지, 아니면 옛 백골 병단과 철십자 기사단이 떠오른 데서 흘러나온 눈물일지.
「너희들은, 정말, 말릴 길이 없는 멍청이들이다.」
“예, 대장을 닮아서 그렇습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수인 전사들의 기원이었다.
본대가 곧 자운녀 레퀸을 토벌하고 길을 열 것이었으므로, 카렌덴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모두에게 빛의 축복을 내릴 시간도.
그렇기에 카렌덴은 신체 개조를 진행하기로 했다.
창조 질서 속에서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선천적인 무기, 털ㆍ발톱ㆍ날개 따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물론 이조차도 시간이 촉박하여, 카렌덴은 다시 도전적인 전술을 고안했다.
[카렌덴 : 린(Rin) 호로 하르바도니아를 최대한 가로지른다.]「하지만 성하, 동력로가 얼어붙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눈보라가 역장을 교란시켜서 도약 추진도 불가능하다고…….」
[카렌덴 : 저공비행을 하면 돼. 동력로가 얼어붙으면 지면에 처박히겠지. 그러면 기함 자체를 전진기지로 삼는다. 포로 돌격을 엄호하면 돼. 신체 개조는 그때까지 완성시키지.]하르바도니아에는 지금도 병선기지(兵船基地; Battleship Base)라는 유적이 존재한다. 이곳이 사실 카렌덴의 기함이자, 수인병들이 만들어진 장소였다니…….
「너희들의 육신은 짐승처럼 될 거다. 다른 인간들의 경멸과 혐오를 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으냐?」
“예.”
「후회하지 말고. 카렌덴께서는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하나 안 될 가능성이 1.46% 존재한다고 한다.」
“절대로 안 합니다.”
물론, 모두가 수인병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1천여 명의 돌격대 대원 중 26명은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듀렌 대공 가문의 시조, 올렌 듀렌이었다. 제국의 다섯 선제후 중 하나.
“대, 대장……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짐이 되면 가차 없이 버리십시오! 그러니 제발!”
올렌을 대표로 한 부적합자들이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으나 그 억지가 통할 여유가 없었다.
[카렌덴 : 역장이 걷힌다. 테르시아도 성공한 모양이군. 발진 준비! 전 대원 탑승하라.]그때, 하르바도니아로 통하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모두 틀어막고 있던 불경의 신기루가 걷히기 시작했으므로.
올렌이 더 다급하게 빌었다.
그러자 에누엘이 올렌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올렌, 너는 이곳을 지켜라.」
“대장……!”
「곧 이 전쟁은 끝날 거다. 주력부대가 모두 북진하니 남쪽에 남겨진 이들의 안위가 걱정스럽다. 네가 그들을 지키고 있어라. 너에게 이 일을 맡긴다. 우리는 장작, 네 몸을 태워서 창조의 빛을 지켜라.」
린 호, 즉 봄바람호가 불꽃을 내뿜으며 발진했다.
영겁의 습지에 남겨진, 올렌을 비롯한 부적합자들이 떠나는 기함에 경례를 올렸다.
올렌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지키겠습니다, 대장. 이 북부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대장께서 돌아오시는 그날까지, 빛을 밝히고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아직 닫히지 않은 개구부에 서 있던 에누엘이 그 마음을 받았다.
주먹으로 자신의 심장을 치고.
그 주먹을 곧게 펴면서 경례 대상의 심장을 가리키는 이것은 어센시쿼리어의 경례. 상대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식.
「나야말로.」
그러자 그들은 쓰러져 땅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에누엘의 뒤를 쫓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력함이 저토록이나 슬펐을까.
그리고 저 슬픔을, 긴 대화가 아니라 그저 짧게 경례로만 주고받고 떠나야만 했던 에누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어쩌면…….
이들은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작별의 인사라는 걸…….
이윽고 개구부가 돌풍과 함께 닫히고, 기함은 최고 속도로 하르바도니아의 심장부로 향했다.
마침내, 신화시대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신화시대(神話時代),
타르혜 론델ㆍ엘디아ㆍ거듭남 (13)
[하르바도니아, 셴 고원.]– 우주세기 4세대, 635년 4월 24일.
셴 고원은 하르바도니아의 중추에 위치한다.
고원의 북쪽 저 너머로, ‘광기의 산맥’과 통하는 산기슭이 펼쳐지며 그 산맥의 최고봉에 아쉬론의 천수성(天守城)이 있었다.
새하얗게 난발하는 눈보라 너머, 섭리 자체가 검푸른 심연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병참 모니터 : 제1.5등급 심연 접근 중, 비상조치가 필요합니다.]섭리를 능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절대(絶對)의 신격을 가진 존재뿐.
그러므로 저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심연의 주인, 요토스의 강림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
[병참 모니터 : 제1.5등급 심연 접근 중, 광기 수치 120% 초과.]봄바람호가 부빙에 처박힌 뒤, 카렌덴은 즉시 천수성으로 향했으며 나는 알카이오스와 합류했다.
제1작전목표는 후신경(候吲卿) 자윤. 오본위 서열 2위로 현재 심연 농도는 진왕에 필적한다.
놈의 거미줄 공격이 끝도 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샤릴리온으로 그 거미줄의 핵에 룬을 새기고 터뜨려서 연달아 폭발시킨다.
[병참 모니터 : 광기 수치 140% 육박, 제11등급 장비들의 작동 센서에도 이상 현상이 감지됩니다.]문제는 오본위뿐만이 아니었다.
이 눈보라…….
바로 앞뒤조차 보이지 않는 맹렬한 눈보라 속에서 <온 것들>이 만든 장비들조차도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알카이오스 : 몇 분째 잡혀 있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를 완전히 잡아두려는 속셈 같다. 에누엘, 넌 정상으로 향해서 성하들을 도와라. 내가 길을 열어볼 테니.]「함께 가셔야죠.」
[알카이오스 : 가능했다면 진즉 그랬을 거다. 여긴 나에게 맡기고 너는 천수성으로 가는 거다.]에누엘이 이때 얼마나 대답을 망설였는지, 정말 한참 뒤에야 동기화 대본이 떠올랐다.
「대장, 행운을 빕니다.」
겨우, 저런 조촐한 말로 에누엘의 진심을 담을 수 있었을까.
[알카이오스 : 돌격대, 너희들도 함께 가라.] [바라니예 : 명령 안 하셔도 그렇게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떠버리 바라니예는 늑대형 수인이 되었다.
돌격대 부장이었던 그리피소른은 독수리로서 어떤 수인보다도 위엄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엘토람의 조상일지도 모를 엘사라는 백곰이었다.
[알카이오스 : 믿음직스럽군. 곧 길을 열어주겠다. 에누엘, 알고 있느냐? 우리가 장작이라는 것과, 장작의 도리는 헌신이란 것을.]「……?」
[알카이오스 : 장작은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지키고 세상을 밝힌다. 불을 지켜야 해. 테르시아 성하께서는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한다. 전쟁을 끝내는 과정에서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다름 아닌 우리다. 명심해라.]알카이오스가 갈라디엘과 리벨덴을 교차시키며 자세를 잡았다.
맞닿은 칼날에서, 각 진성검의 고유 색채인 적광과 청광이 아름답게 흐드러지며 뒤엉켰다.
그걸 지켜보면서, 나는 돌격대와 함께 지면을 박찰 준비를 마쳤다.
[알카이오스 : 만들어줄 수 있는 시간은 한순간뿐이다. 반드시 빠져나가라.]다음 순간, 핏빛 벼락이 섬광으로 내달리면서 사방에서 조여오던 거미줄 감옥이 도륙이 나고 불타올랐다.
동시에 자윤이 고통스레 울부짖었는데, 그 비명의 틈새로 길이 열려 있었다.
눈밭을 박차고 그 틈새로 빠져나갈 때, 자윤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거미줄과 거미 발을 내뻗었다.
[알카이오스 : 가, 어서!]물론, 그 순간에 네 갈래나 요동친 핏빛 벼락에 의해서 그 공격이 모두 무의미하게 돌아갔다.
「대장,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상황은 어떠십니까?」
[알카이오스 : 교신할 여유도 없을 것 같군. 이제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곧장 나아가라, 에누엘.]자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뒤로도 여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극지방의 음산한 쓸쓸함과 광기의 산바람이 달려들면서, 표준 광기 농도는 95%에 달했다.
일반인들은 농도 80% 이상부터 머리가 터지면서 죽는다니, 그 농도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엘사라 : 잔챙이들이 어딜! 나랑 춤출 얼굴도 안 되는 것들이!] [바라니예 : 하핫, 이 몸 끝내주는데! 한주먹거리도 안 되잖아!] [그리피소른 : 대장, 고원의 끝 너머로 산맥이 보입니다! 목표가 눈앞입니다!]산맥에 가까워질수록, 불경의 무질서들이 사방에서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크레부쉬.
언뜻 초대형 거미로 보이는 저놈은 최고위 옛것이었다. 슈’율큘라의 큘륜과 동급이었다.
[그리피소른 : 옛것들입니다! 저희들이 맡을 테니 대장님께서는 앞으로 향하십시오!]에누엘은 크게 망설였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걸로 그 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무응답을 황급히 재촉하듯, 끊어질 듯 말 듯한 <온 것들>의 통신이 들려왔다.
[카렌덴 : ……백도령은 내가 맡지. 테르시아, 요토스가 오기 전에 아쉬론을 처리해야 해…….]백도령 샤르’카스는 오본위 서열 3위로 산 중턱을 지키는 존재라고 했다. 현재 진왕보다 약간 모자란 힘을 받았을 것이다.
[바라니예 : 대장, 어서!] [병참 모니터 : 진로상 위험 파악 중. 제3등급 심연체 584기, 제4등급 심연체 4,223기, 제5등급 미만 심연체 392,334기가 고속으로 접근 중입니다.] [엘사라 : 북동쪽에서 눈사태가 일어났어! 자리를 옮겨야 해!] [칸루스 : 빠르게 죽여버려! 하나 처치!] [그리피소른 : 대장, 어서 가십시오! 여긴 우리가 맡겠습니다!]사방에서 밀려드는 태고의 공포 앞에서, 숨을 헐떡이던 에누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제, 정말 가야만 했을까. 미지의 산맥 너머 불경의 궁전으로.
에누엘은 알고 있었을까.
지금 이 말이 작별 인사가 될 것이라는 걸.
「청현석(淸絃石), 잠시 맡겨놓겠다.」
반드시 찾으러 돌아오겠다는 듯, 에누엘은 샤릴리온의 날밑 장식을 빼내었다.
어둠 속에서 눈부시고 고혹적으로 빛나는 은청색 보석. 그 안쪽에서 더없이 강대한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걸 약속의 징표로 넘겨받던 수인병들도 알고 있었을까.
[그리피소른 : 기다리겠습니다, 대장. 얼마가 걸리시더라도.]바로 이 대답이, 천 년 뒤의 후손들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지는 명예의 언약이 될 것이라고.
[바라니예 : 대충 마실 나갔다가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나중에 낳을 손주 놈들한테 대장님 이야기를 해주며 기다릴 테니.]그 눈물이 없는데도 눈물겨운 이별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오늘날 수인들은 도대체 왜 불경한 존재로 온갖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걸까? 요정들보다도 더 존대를 받아야 할 이들 아닌가.
어떤 특정한 시점부터 수인들의 인식은 나락에 처박혔다.
현제라 칭송받는 라이다 에이진과 용현 레인 루드윅조차도 그 인식을 되돌리는 데 실패했다.
그 전에는 삼신룡들이, 그 이후로는 삼영룡들이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원초적인 혐오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이 일 또한 심연의 농간 아니었을까.
[엘사라 : ……이동 완료! 나머지 놈들은 내가 최대한 처리하겠어……!] [바라니예 : ……옛것이 온다……!] [그리피소른 : ……대장이 돌아오실 때까지 위치를 사수해……!] [하예츠 : ……거미 놈들이 잔뜩 몰려온다……!]눈 덮인 산등성이를 뛰어올라 천수성에 가까워질수록 돌격대의 외침은 점차 멀어져갔다.
그 대신 <온 것들>의 외침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일으키는 방해 역장을 뚫고 통신 회선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리라.
[카렌덴 : ……테르시아, 궁창이 심연으로 뒤덮여가고 있다. 요토스의 강림이 머지않았다. 서둘러 아쉬론을 처리해……!] [테르벨 :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이놈이 계속 내부 구조를 바꾸고 있어. 아쉬론을 찾으러 갈 수가 없다……!] [슈리간 : ……남동자(男童子)는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 둘은 앞으로 나아가……!] [테르시아 : ……슈리간, 혼자서 맞서기에는 지금 네 몸이……!] [슈리간 :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테르시아, 심연에서 해방된 아이들을 봤어? 그 굶주려서 앙상한 모습들을 보면 눈물이 끊이질 않더라. 이 슬픔을 다 끝내주자. 절대 시간을 되돌리지 마. 내 의지를…….] [테르시아 : ……지금까지 고생 정말 많았어…….] [슈리간 : ……뒤를 부탁한다, 테르시아, 테르벨, 카렌덴…….]곧, 저 멀리 산꼭대기에 웅장하게 솟구친 천수성에서 슈리간의 핏빛 기적이 솟구쳤다.
피와 눈물로 대지를 정화시키는 창조의 힘을 전투에 이용하기 위해, 슈리간은 자신의 몸을 폭발시켰다.
남동자, 알큐타를 봉인하기 위해서.
[새로운 적 : 남동자 알큐타.]– 알큐타는 오본위 서열 5위로 천수성의 관리인입니다.
– 알큐타는 천수성의 구조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으로, 불청객들로부터 왕의 안식을 지켜내 왔습니다.
– 알큐타는 계속하여 공간을 뒤바꿔서 <온 것들>의 전진을 막아 내었으나 끝내 핏빛 태양 슈리간에 의해 봉인되었습니다.
정보를 보건대, 알큐타는 가장 강한 적은 아니지만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듯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는.
[병참 모니터 : ……천수성의 미로형 변이가 종료되었습니다. 왕의 좌표를 탐색합니다. 동쪽으로 12블릭입니다…….]슈리간의 희생으로 길이 열렸다.
그것이, 이 세상이 너무나도 가여워서 눈물을 피처럼 흘렸다는 빛의 군주의 마지막이었다.
[새로운 적 : 알큐타의 집거미.]– 천수성의 관리자인 알큐타를 섬기며, 불경한 침입자들을 벌하는 왕궁의 근위대들입니다.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천수성, 아쉬론의 거처는 하늘을 찌르는 성이었다.
기괴할 정도로 동일한 구조와 높이로 대칭을 이루는 성벽들이 산봉우리들을 휘돌며 끝없이 펼쳐져 나갔다.
그 극단적인 규칙성에서는 초자연적인 공포마저도 느껴야 했는데, 눈에 파묻힌 채로도 불경한 위엄을 발하고 있었다.
[테르벨 : ……오른쪽에서 온다, 테르시아……!] [테르시아 : ……내 걱정은 마……!]그 황량한 불경의 성채를 내달리는 내내, 들쥐만 한 거미들이 끝없이 달려들었다.
작고, 빠르고, 성가셨다.
베어도, 베어도, 또 베어도, 끝은 보이지 않고 또 거대한 돌기둥으로 이어지는 회랑도 한없이 이어지기만 했다.
「에누엘입니다! 지금 작전지로 이동 중이나 93블릭에서 거리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카렌덴 : 에누엘, 네 신호를 확인하고 병참 모니터에 천수성 미로 데이터를 업로드했다. 안내를 받아서 이동하라. 나도 곧 합류하겠다.]「즉시 이동하겠습니다.」
[카렌덴 : 서둘러라. 테르시아와 테르벨만으로는 미덥지가 않아.] [병참 모니터 : 새로운 정보 갱신을 확인했습니다. 천수성의 미로 지도입니다. 최우선 임무로 등록되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지도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
시야 UI에서 곧장 방향 안내가 시작되었으므로.
이제는 거미 발과 유사한 12개의 촉수를 꿈틀거리며, 먼 거리는 날개로 비행하는 집거미들을 쓰러뜨리며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
[테르벨 : 한 방 먹였다!] [테르시아 : 움직여야 해! 테르벨, 움직여!] [테르벨 : 피할 시간 없어! 내가 막아낼 테니 앞으로 나아가!] [테르시아 : 정말, 고집 하고는……!] [테르벨 : 어서!] [병참 모니터 : 엘디아 카타(05), 왕의 옥좌는 건너편 회랑을 통과해야 합니다. ‘집거미’로 명명된 제4등급 심연체 2,578기가 회랑 앞으로 집결 중입니다.]순백의 일섬(一閃).
2천 마리가 넘는 집거미가 샤릴리온의 검광 아래서 단숨에 휩쓸린다.
그러나 끈끈한 젤리처럼 성채 곳곳에 매달린 알에서 집거미들은 계속 부화했다.
[테르벨 : 대체 이놈은 몇 번을 재생하는 거지?] [테르시아 : 재생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거미줄! 피해!] [테르벨 : 크읍……!]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에 도착했을 때,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지?
아마 이 너머에는 광대한 어전(御殿)이 있을 듯한데…… 통로는 없고 벽만 있었다.
벽이라기보다는 거미줄이었다.
질퍽하고 끈적거리는 동시에 벽돌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견고했다.
돌멩이를 던져보자, 거미줄에 붙들리기 무섭게 순식간에 내부로 끌려 들어갔다.
병참 모니터가 분석 데이터를 내놓았다.
[병참 모니터 : 제1.5등급 심연입니다. 제1작전목표, 아쉬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거미줄로 추정됩니다. 내부로 진입할 방법이 없습니다.]「다 방법이 있어.」
두 발 뒤로 물러선다.
샤릴리온의 칼자루를 움켜잡으며 일발(一發).
칼날 위에서 신성한 열량으로 타오르는 힘이, 참격의 궤적 위로 창세의 문자를 새긴다.
Benekom, 깨져라.
이 세계의 섭리를 만들었던 광명의 힘이, 문자의 형태로 임한다.
궤적에 따라 흩어진 문자들 위로 빛이 일순간 집약되었다가 폭주한 일순간, 외벽 전체로 균열이 퍼져 나간다.
[테르벨 : 난 괜찮아, 이쪽으로 오지 마……!]그 균열의 틈새로 빛이 더욱 차고 넘쳐난다.
[카렌덴 : 테르벨, 네 생명 신호가…… 백도령을 막 끝장냈다. 곧 가겠다. 죽지 마, 죽지 말란 말이다!]빛이 균열의 크기를 늘리고, 또 벌리고…… 그리고 마침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붕괴하며 무너진다.
쿠구구구구구────!
그리고 불경(不敬).
세속 위에 초월의 육신을 입은 불경의 신비, 아쉬론.
거미 군주가 신의 육체를 휘둘러 테르벨의 몸을 짓이겨 버리려던 바로 그 순간.
────쩌어어어어어엉!
단 한 줄기의, 눈부신 섬광.
섭리의 빛조차 떨게 만들던 외우주의 손길이, 진성검 샤릴리온의 칼날 앞에서 가로막혔다.
자신 앞에 일어난 불경한 사태에, 악신(惡神)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히며 대기가 요동쳤다.
섭리조차 흐느끼는 그 요동침 속에서, 용사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에누엘, 지금 작전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거미 군주 토벌 명령을 수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