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4)
가짜 용사 이야기-94화(94/310)
제94화
「테르시아와 테르벨과 함께 강림한 요토스와 맞섰다. 그 혈투 끝에 나는 분명히 놈을 처치할 수 있었다…….」
왜 저걸 이야기해 주는 걸까.
카렌덴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수호자 에누엘에게 손을 얹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내가 실패했지. 왜 실패했는지 아느냐? 그때 요토스의 심연에 당한 나는 단 한 가지만 해낼 수 있었다.」
“……?”
「심연에 침식되어 죽어가는 아수라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요토스를 끝장낼 것인지.」
검은 안개가 여기저기에서 하나로 묶이며 형체를 이루었다.
카렌덴이 친자식처럼 길렀다는 화룡 벨’다키둔과 수룡 예리세리카와 광룡 하라데리만의 유체 시절 모습이었다.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읊조리던 카렌덴이 마침내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 선택의 결과는 네가 익히 아는 바다. 나 때문이다. 네가, 너희가, 세상이 아직까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이유가. 이 세계에서 달아나는 요토스를 끝장내지 못했지. 그때 끝냈더라면…….」
알아볼 수 있었다.
왕의 심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군주의 심연이 벌레처럼 저 영혼을 좀먹고 있는 걸.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 상상도 가지 않았으나, 청성 미른가디아처럼 육신을 버리고 영체만을 움직이는 상태라 했다.
카렌덴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저 자조적인 고백이 충격적이 아니라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비난할 마음도 원망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마음속에 스며든 한 줄기 빛 때문에. 그 삶의 빛의 이름은 타르시요였다.
“제가 뭐라 할지, 성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성하께서는 타르시요의 아버지시니까.”
「……?」
“저는 솔직히 성하께 뭐라고 말할 머리가 안 됩니다. 자격도 안 되고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이 마음의 고백이, 어떤 망설임이 없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을 끊김 없이 잘할 수 있었던가.
그 민망한 마음 옆에서 쿡쿡 웃는 그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웃지 마.
나도 정말 노력하고 있는 거야.
“성하께서 타르시요를 제게 보내 주셨으니까요.”
「그게 전부냐?」
“전부이지만 전부가 아니죠. 성하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심연이 영혼을 갉아먹는 그 고통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저와 타르시요가 만날 수 있던 거 아닐까요?”
타르시요. 그 녀석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으니까.
나무, 돌, 바람…….
일상 속에서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들에 이름이 붙은 것 같았고 색이 입혀진 것처럼 느껴졌었으니까.
별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로 킥킥대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을 잊고 아이 때처럼 해맑게 웃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절하고 있는 것일까.
“진심을 다해 감사합니다, 카렌덴 성하. 이게 제 대답입니다.”
카렌덴이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물기가 반짝이는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그 눈동자에 타르시요의 향기가 스며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동작조차도 어렴풋이 닮는 부녀의 닮음은 반갑고 슬펐다.
「절망 속에서만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꿈을 꾸는 법조차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예?”
「방금,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게 아니라, 평화의 세계에서 만나게 된 걸. 타르시요가 너를 내게 데려와 소개하는 거야…… 나는 딸아이를 훔쳐간단 느낌이 들어 널 못마땅하게 보았겠지만 막센시아는 널 처음부터 좋아하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을 테고…….」
“아니,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런 세상이라서 만날 수 있던 겁니다. 저랑은 급이 안 맞지요.”
「막센시아가 내게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주마. 창세신들께서 태초부터 정하신 인연의 운명을 모독하지 마라. 세계가 어떠했든, 너희는 만났을 거고, 만나서 서로를 좋아하게 됐을 거고, 만나고 좋아하고 결국에는 서로를 사랑하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그 말은 찌르는 아픔처럼, 아픔과 같은 기쁨으로 가슴을 찔러 말문을 막았다.
「카이센, 우리는 그런 삶을 누리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삶을 누리게 해주자. 그것이 우리가 창세의 질서 속에서 사랑을 받았던 이유고, 그 사랑을 세상에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다.」
“예, 주인님.”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아차, 싶었다.
바로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신화시대에 있다 보니 에누엘 님이랑 똑같은 호칭에 익숙해져서…….”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예?”
「너라면 타르시요를 맡겨도 되겠지. 저 하늘 위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날, 그 아이를 잘 부탁한다. 그러니 날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좋다.」
신화시대 때 카렌덴은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카렌덴이 멋쩍게 웃었다.
곧 덧없는 웃음들이 이 허상의 세계를 맴돌았다. 그 웃음은 아주 슬프게 떨리고 있었다.
에누엘이 말없이 카렌덴의 곁에서 코어의 빛을 명멸시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계승식이 진행되는 사이 카렌덴 주인님께서 창세시편 일곱 편을 모두 조합해 네 영혼과 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그렇군요.”
[이 의미를 알고 있나? 네가 이제 엘디아가 되었단 걸 의미한다. 식별 번호 오메크(06), 엘디아 오메크다. 이제, 장작으로서의 긍지를 마음에 품고 네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라.]“제 사명의 자리로 가지 않겠습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먹으로 심장을 치고 그 친 주먹을 곧게 펴며 대상을 가리키는 경례를 행하면서.
이는 어센시쿼리어의 경례.
이게 당신의 의지를 내가 잇겠다는 뜻의 경례였다는 걸, 이제야 비로소 정확히 알게 되었다.
“‘우리’들의 사명의 자리로 가겠습니다, 선배님.”
기계의 육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에누엘의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에누엘이 이렇게 대화 도중 내비치는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도 내색하지도 않으리라. 다시 카렌덴을 돌아보았다.
“그럼 성하, 저는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아니, 기다려라.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남았다.」
“아버님이란 호칭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거는 조금…….”
무례한 발언이었다.
카렌덴이 장난기가 많은 존재가 절대 아니니 말이다.
「그게 아니다. 네 영혼에 유르벨뭉을 새겨 넣은 존재에 대해서다. 듣고 가라.」
신화시대(神話時代),
타르혜 론델ㆍ엘디아ㆍ거듭남 (15)
뇌향의 세츠넨은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페이쿼리어들의 삶이란 등불과 같았다. 자신의 삶을 기름처럼 태워서 세상을 밝히다가 덧없이 꺼지는 등불…….
하지만 라미네아가 사랑으로 키운 그 기적의 아이라면, 혹시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아니.
절실히 기도해 왔는데.
뇌향심공명진에 연결되어 있던 카이센의 의식이 단절되는 통증이 뇌리를 섬뜩하게 긁었다.
뇌향심공명진은 의식을 잃었을 때 이런 식으로 단절되지 않는다.
이 아픔은, 하나의 꽃이 꺾이는 듯한 이 차가운 통증은, 오직 대상이 죽었을 경우였다.
「아, 아아…….」
뇌향은 비틀거리면서 허공을 망연히 더듬거리다가, 기댈 곳을 찾지 못한 채 털썩 주저앉았다.
“각하!”
“뇌향 각하!”
하르바도니아의 추위는 이계의 서리 폭풍이 멎은 뒤로도 날카로웠다.
뇌향의 눈가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려 서리로 얼어붙었고, 그 서리를 다른 눈물이 녹이다가 다시 얼어붙었다.
뿌옇게 부서져가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건, 거대하게 붕괴된 알마 론델의 잔해들.
알마 론델의 잔해들은 공간 전이로 치울 수 없었고, 강대한 힘으로 분쇄시킬 수도 없었다.
모두의 전력을 담는다면 분쇄시킬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아래 남아 있을 카이센과 타르시요의 생명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연합군 병사들이 합력하여 잔해들을 치우고 있었다. 그러했는데…….
‘이를 어찌하랴, 어찌하랴…….’
어떻게 죽었을까.
뤼카엘이라니, 그 고대의 용사를 어떻게 쓰러뜨렸을까.
그 과정에서 어떤 고통이 있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단했을까.
아, 얼마나 애썼을까…….
고작 한 줌, 눈물겨울 정도로 단 한 줌 남아 있던 수명을 불태우는 동안.
– 넨 고모님! 고모님! 이것 좀 보세요.
눈물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저 먼 날의 기억뿐.
땅끝에 숨어서, 그 어떤 가족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린 라미네아를 다시 만났을 때…….
아이딘은 딸을 안고 나와 인사를 올렸고 라미네아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자신들의 아들을 자랑했었다.
– 제 아들이에요. 예쁘죠?
– 그래, 어여쁘다. 너를 닮아서 참으로 어여쁘구나.
– 카이센이라는 이름으로 지었어요.
– 카이센? 인연이라는 뜻의?
– 네. 미르 백부님께서 제게 꽃향기라는 이름을 주셨잖아요. 비슷한 바람을 담았어요.
그때 라미네아는.
자신이 낳은 아들, 카이센이야말로 이 세계의 그 어떤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이란 듯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품에 꼭 끌어안으며 사랑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 이 아이가 언젠가, 넨 고모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인연을 지켜주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요.
– 필시, 그렇게 될 게야.
– 저는 보지 못하겠지만요.
– 라미네아…….
– 그러니 고모님, 저 대신 지켜봐 주시면 안 될까요? 지켜보고 돌봐주시면…… 이 아이가 멋진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뇌향은 삼영룡으로서의 위엄조차 내려놓은 채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라미네아, 네 아들은…….’
네가 사랑으로 낳고 기르고 보살폈던 그 아들은…….
내가 돌봐주지도 못했는데…….
네가 그날 이름에 담았던 소망에 맞는, 아니, 네 소망을 뛰어넘어 더 위대한 삶을 살아갔단다…….
‘그러한 삶을 마치고, 이제는 너처럼 영원히 떠나 버렸구나…….’
희망의 상징이자 <온 것들>의 후손이었던 타르시요의 죽음보다 카이센의 죽음에 더욱 슬퍼하는 자신의 부족함이 부끄러웠다.
– 각하, 저를, 저를 지하로 보내 주십시오, 카이센 혼자서, 으윽,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4개의 팔다리 중 셋을 잃은 요한 울프 프로스트는 마지막까지도 카이센을 도우러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심려치 말라고, 반드시 같이 오겠다고 안심시킨 뒤에 후방으로 전이시켰건만…….
그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함께해왔던 모든 동료도, 사랑했던 카밀라조차 잃고, 슬픈 고독 속에서 살아가던 그 아이에게…….
바로 그때였다.
섬화충천(閃火衝天).
거룩한 빛이 지반에서부터 거대하게 솟구쳤다. 잔해들을 꿰뚫고 날려버리고 바스러뜨리는 성광.
아니, 저 검광은……?
뇌향은 숨을 삼켰다. 설마,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가. 이럴 리는 없다. 그 둘은 분명…… 하지만, 그러나, 어쩌면.
빛은 눈이 부시도록 새하얬다.
새하얗고, 날카롭고, 우아했다.
다섯 진성검 중에 가장 고고한 검으로 알려진, 샤릴리온의 빛. 그 검이 혼자서 힘을 낼 리는 없었다.
타르시요가 살아 있다.
그리고 정말 어쩌면, 카이센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알고 있다. 그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그래도, 그래도…….
“각하, 타르시요 님께서 돌아오시는 것 같습니다!”
곧 샤릴리온의 주인이 잔해가 뚫리고 열린 길을 통해 지면 위로 올라섰다.
장병들이 요동치는 정적 속에서 계급이고 뭐고 따지는 것 없이 그 주변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뇌향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그 거룩한 위엄에 양옆으로 물러섰다.
「……?」
뇌향은 눈을 의심했다.
지금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으므로.
카렌덴이 빛의 파편으로 창조한 어센시쿼리어, 즉 엘디아 용사들은 모두 잿빛 머리를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장작으로서 불탄 뒤 재가 되어 흩어질 그 운명의 덧없음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페이쿼리어가 용의 힘을 영육에 깃들이고 또 싸워가면서, 그 반동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는 것과 결은 같으나 색은 달랐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옛 어센시쿼리어들의 잿빛 머리를 갖고 있었다.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손에 붙들린 진성검 샤릴리온은 지난번 주인의 손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맹렬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품에는 한 여인을 안고 있었다.
그 육신이 심연에 의해 완전히 침식된 증거로, 피부가 검푸르게 썩어간 누군가가…….
그 시신의 정체를 알아본 장병들 몇몇이 절망의 신음을 흘렸다.
그건 바로 타르시요였다.
그 시신을 수행하듯 옆을 부유하는 카듀엘은, 주황색 빛을 내뿜어 알카이오스와 뤼카엘의 파편을 운반하고 있었다.
무언가 뒤바뀌었다.
그렇기에 뇌향은 눈을 비볐다.
그런데, 그런데, 바뀌는 건 없었다. 샤릴리온을 든 건 그 아이, 바로 카이센이었던 것이다.
「카이센……?」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으나, 떨림 속에서 목소리는 겨우 나와주었다.
그 순간 다른 이상을 감지했다.
뇌향심공명진이 그 마음과 연결되지 않는다. 뇌향심공명진은 세츠넨보다 격이 동일하거나 낮은 존재에게만 닿는 힘이었다.
즉 홍염이나 청성, 오주 어르신들 같은 진룡에게는 닿지 않는다.
‘아버지 말고는…….’
300년 동안, 인간의 몸으로 뇌향의 뇌향심공명진이 닿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이게 가능한 건 용현 말고는 없었는데…….’
지금 이 아이가 그분께 준하는, 어쩌면 그분조차도 넘어서는 격(格)을 갖게 되었다는 소리인가?
카이센의 몸에서는 지금까지 흡수해왔던 모든 힘…… 광룡 하라데리만과 오주 요슈하르와 뇌향 세츠넨의 파편들이 위압적으로 방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만큼이나, 어쩌면 그것들보다도 더 강력한 낯선 파편의 힘들조차도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 육신에 아무런 부담이 없는 듯 보였다.
용령 해방 상태일 때만 갖춰지던 용린갑의 형체는 실체보다도 또렷했다.
그뿐인가.
지금은 알 수도 없고 다룰 수도 없는 재질의 흑금(黑金)들이 용린갑 여기저기를 보강하듯 장착되어 위엄을 더하고 있었다.
영혼과 결속된 장비를 어떻게 보강할 수 있단 말인가, 뇌향은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엘디아 카타(05) 에누엘의 혼과 합일되며 받은 프라이모아 아머의 유산이란 걸 알 리가 없었으므로.
「이게 어떻게 된…… 타르시요 님께서는?」
뇌향은 멍하니 내뱉었던 그날의 말을 평생토록 후회해야만 했다.
한순간 칼날에 가슴이 꿰뚫리기라도 한 듯, 고통스럽게 허공을 방황하던 카이센의 시선…….
카이센은 뇌향에게로 다가와 타르시요의 몸을 넘겨주었다. 죽은 <온 것들>의 몸은 가랑잎보다도 가벼웠다.
“타르시요를 부탁합니다.”
「손에 든 그건……?」
“알카이오스의 코어 칩입니다. 뤼카엘이 품에 간직하고 있었어요. 되살릴 생각이었겠지요. 이건 카듀엘 님이 보관해주실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넨이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데, 카이센은 저편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쫓는 카듀엘이 빛을 뿜었다.
[요니울란을 챙기십시오, 엘디아 오메크(06).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오메크(06)는 다른 엘디아의 무장을 모두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합니다.]카이센이 카듀엘을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뻗으며 ‘명령’했다.
“와라, 요니울란.”
그 순간, 대지 저 깊숙한 어딘가에서 잔혹한 보랏빛이 붕괴의 잔해를 찢어발기며 솟구쳤다.
또 한 자루의 진성검, 요니울란.
요니울란의 검광은 샤릴리온과 비교하면 사납고 들뜬 느낌이다. 목줄에 묶인 사냥개 같다고 할까.
빙그르르, 보랏빛 잔영을 남기며 날아든 요니울란은 카이센의 손에 붙들려 거칠게 짖었다. 샤릴리온이 공명하듯 청아하게 울었다.
[또한 베테(02) 론델에서 제 무장, 히스기비드를 챙기시는 것을 권하겠습니다. 엘디아 알마(01)의 갈라디엘과 리벨덴의 위치 좌표도 추적하겠습니다.]그 위대한…… 전설 속 검광들의 빛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전율로 새겨졌다.
복받치고 흐느껴지는 전율 속에서 장병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어 경배를 올렸다.
그때 무엇이, 어떤 마음의 떨림이 자신들의 무릎을 꿇게 했는지 스스로들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오직 후세의 역사가들만이, 그 감정을 하나의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그날, 이 세계에 용사가 돌아왔다.
용사는 그날 이후로 자신을 카이센이라 부르지 않았고 역사가들도 카이센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카이센 예레 샤릴리온.
또는 카이센 예레 라도니옌(Radoniyen; 진성검).
전자는 샤릴리온의 주인이란 뜻이며, 후자는 모든 진성검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를 알던 이들은 여전히 그를 카이센이라 불렀으나 본인의 유언에 따라, 사서에는 오직 샤릴리온이란 이름으로만 기록되게 된다.
“카이센이란 이름은 오늘 여기에서 죽었습니다.”
카이센이 샤릴리온과 요니울란을 등에 교차시켜 차며 말했다. 프라이모아 등갑의 전자력이 두 칼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타르시요.’
죽어야 할 나를 살리고 네가 대신 죽었으므로, 이제 남은 삶은 너를 위한 삶이어야 옳겠지.
‘그렇기에 샤릴리온이야.’
오직 이 이름을 쓸 때, 너와 함께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한때 세상으로부터 샤릴리온이라 불렸던 네가 잊히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모든 일을 샤릴리온이라는 이름으로 하겠어. 언젠가, 네가 막센시아 님을 만났을 때 자랑할 게 많도록…….
‘미안해.’
너한테는 너무나도 많은 걸 받았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게.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어디로 가느냐. 내 사랑하는 아이야, 아, 카이센……!」
뇌향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저 어머니와도 같이 따스한 그늘 안에서 편안히 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타르시요 예레 샤릴리온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
다만 고개만을 돌렸다.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에만 짤막하고, 단호한 대답을 남기기로 했다.
그 대답을 하는 도중에, 광입자들이 머리 주위에서 결속되며 용의 위용을 본뜬 용린갑의 투구를 이루었다.
“이 전쟁을, 끝내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