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5)
가짜 용사 이야기-95화(95/310)
제95화
– 타르시요라는 이름은 인연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지켜주길 바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지어주셨대.
옛 바다의 지배자, 슈’율큘라의 광기가 수런거리며 섭리(攝理)를 침식하고 있었다.
<잊혀진 왕들>마다 섭리를 범하는 방식이 달랐다. 슈’율큘라의 권능은 광적인 습기였다.
광기가 먹구름의 형태로 구현된 것이다. 먹구름이 대양의 하늘과 땅 위의 하늘을 모두 집어삼키고 장마를 토해내도록.
– 하지만 난 이 이름의 의미가 다르게 적용됐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어. 나는 몸이 약해서 그런 위대한 일은 해낼 수 없거든.
남부가 장마전선에 뒤덮였다.
앞뒤를 볼 수조차 없이 쏟아지는 이 빗줄기는, 인간의 몸과 그 너머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정신을 서서히 광기로 무너뜨린다.
– 그래도 슬프지 않아. 대신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분명 이 이름 덕분일 거야.
그 장마의 격류를 이끌고, 슈’율큘라의 축복을 받은 귀족이 먼바다로부터 그 위엄을 드러낸다.
옛 바다의 꽃, 숄이류.
귀족은 언뜻 꽃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무수한 심해 식물이 비틀리며 뒤얽히면서 만들어낸 절망의 형상.
– 그게 뭐냐고? 알면서 뭐냐고 묻지 말아줘. 바로 너야, 카이센.
숄이류의 꽃봉오리가 소름 끼치는 자태로 만개하며, 검푸른 비눗방울을 수십 개씩 쏘아냈다.
– 네가 위대한 용사로 성장하는 걸 마지막까지 지켜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와 만나는 날에, 너에 대해 이야기해 드릴 수 있게.
비눗방울은 접촉 즉시 폭발하며 모든 걸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야포나 함선 등의 모든 사물이 수백 개의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 거품에 닿은 순간, 순식간에 뼛조각과 선혈의 집합체가 되어 산화했다.
– 어머니는 옛 엘디아들의 활약을 모두 보셨다고 해. 그중에서 에누엘이 특출하게 강하고 용맹했다지. 하지만 너는 그분보다도 더 특별해질 거야. 어떻게 아냐고?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런데 분명 그렇게 될 것 같아.
그냥, 알 수 있어.
“제2선, 무너집니다!”
“숄이류의 쾌속 진격에 아군 피해 막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페이쿼리어, 부대를 후퇴시켜야 합니다! 이대로는 전멸입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무겁고도 거친 호흡들의 보고들이 리아 알터 타스알포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의 현재 직책은 인류 남부 전선 대원수였다.
그녀보다 어린 나이에 총사령관이 된 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었다.
그 직책의 위상이 그녀의 전술적 식견과 재능을 입증하며, 완전한 열세였던 남부 전선이 여태껏 버텨올 수 있는 까닭을 설명한다.
“지금 이곳을 버리고 후퇴하면 모든 게 다 끝나요! 여기를 어떻게든 사수해요!”
“아키레아 각하께서도 ‘절망의 향객, 쟈뎅’을 쓰러뜨리신 이후 현재 전투 불능이십니다! 권속 둘을 동시에 상대할 전력은 현재 인류에 없다시피 합니다!”
“요정병들이 곧 올 거예요. 제3선으로 물려서 전선을 가다듬어요!”
“요정들도 다른 권속을 둘이나 상대하고 있을 것인즉…….”
어떻게 할 길 없는 무력감이, 치악력이 되어 입술을 짓씹었다.
‘나도 페이쿼리어인데…….’
어째서 항상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대체 몇 번을 더 무력하게 주먹을 쥐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 몇 번을 더 반복해야 이 전쟁이 끝날까…….
그때였다.
광역으로 전개되던 비눗방울들이 일제히 부자연스러운 궤도로 방향을 틀었다.
탄도는 정확하게 이곳, 사령부가 위치한 곳을 노리고 있었다. 숄이류가 지휘의 흐름을 감지했다.
“페, 페이쿼리어!”
“피하셔야 합니다! 저건 결계로도 막을 수 없으니!”
겁에 질린 탄식들이 사방에서 우왕좌왕하며 튀던 그 한순간. 바로 그 한순간에.
섬화(閃火).
창공을 눈부시게 가로지르는 빛. 그 섬광은 다섯 줄기로 분류되었다. 나뉘어서, 5개의 비눗방울에 제각기 하나씩 꽂혔다.
─ 일그러뜨려라.
진경시편(眞景詩篇)의 힘이 발현되었다.
─ 히스기비드.
모든 것을 창세의 형태 그대로 되돌리는 그 힘이,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창세의 때에 존재하지 않았던 심연의 권능을 공간째로 소멸시키기 위해.
─ 내달려라.
그 차원의 폭발을 꿰뚫듯 내달리는 한 줄기 벼락.
─ 갈라디엘.
사람의 인체는 구조적 제약 때문에 초고속 이동에 있어서 섭리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인체 자체를 빛으로 변화시킨다면?
그야말로 초광속.
권속조차 반응하지 못하는 촌각의 순간에 단숨에 살(殺)의 간격까지 파고든 핏빛의 벼락.
「──────!」
숄이류의 몸이 일순간 팽창하더니, 체내에 잠들어 있던 심연의 가시들이 전방위로 돌출되었다.
─ 찢어발겨라, 요니울란.
혼백 파열, 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개념째로 찢어발기는 보랏빛 폭풍. 옛 식물의 가시들이 핏물을 쏟으며 수십 갈래로 찢긴다.
─ 삼켜라, 샤릴리온.
최후의 발악이었을까. 그 거대한 꽃봉오리에서 터져 나온 비눗방울이 수평선을 가득 메우나.
은백색 검광을 토해내는 칼날.
그 칼날 속으로 허망하게 빨려 들어가면서, 한순간 허점이 오롯이 열린다.
─ 꿰뚫어라, 샤릴리온.
기(氣)를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빨아들인 후 일곱 배 증폭시켜 발출시키는 힘이 숄이류의 심장에 거대한 구멍을 뚫는다.
그 안에서 어둠의 파편과 함께 드러난 것은 혼의 핵(核).
붕괴한 육신이 순식간에 수복되며 그 치부를 황급히 감추려 하나, 피육을 종잇장처럼 손쉽게 가르며 핵을 꿰뚫는 청광의 칼날.
진성검, 리벨덴.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숄이류의 육신이 여기저기 우그러지고 찌그러지면서 혼의 핵이 내뿜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때, 세계는 다만 고요했다.
4개의 성광을 거느린 용사(勇士)가 지면에 가뿐히 착지하는 발소리만이, 고고하게 울렸다.
“대체 뭐지?”
그 미증유의 사태를 멍하니 지켜보던 병사들이 멍하니 수런거리다가 하나둘씩 앞으로 달려 나왔다. 곧 전율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 인류 최강의 병사다! 돌아오셨어!”
“거짓말하지 마.”
“진짜라니까! 혼자서 권속을 도륙할 수 있는 분이 그분 말고 또 어딨어!”
“아니, 근데 뭔가 좀 다르신데?”
낯익으나 또한 낯설다.
그 감정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상대와 친분이 두터운 리아 알터 타스알포였다.
“카이센?”
“갑옷을 봐서는 카이센 경이 맞는데…… 뭔가 느낌이 다릅니다.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 방금 저렇게나 강력한 힘은 아무리 카이센 경이시라 해도…….”
미친 듯이 환호하는 병사들 너머, 망연히 두 눈을 끔뻑이는 리아에게로 용사의 시선이 향했다.
“오랜만이다, 리아. 이 말을 하는 게 세 번째네.”
그 목소리는,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장맛비 속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신격(神格)의 존재들처럼.
재회의 기쁨에 리아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혼자서 감당해온 숙명의 무게가 슬슬 한계에 달하던 참이었는데…….
돌아왔구나.
마침내 돌아왔어.
늘 그랬듯이 다시 돌아와 줬어.
“카이센. 정말 너야?”
그 의문이라기보다는 강조를 위해 내뱉은 말에, 오랜 친우는 어딘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 이름은 이미 버렸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나저나 늘 항상 멋지게 등장하는 비법이라도 있는 거야? 정말, 이렇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장난이야. 그런데 카이센, 타르시요 님도 오고 계시지? 네가 어떻게 그 진성검들을 다…….”
욱신거리는 현기증으로, 다시 심장에 박힌 가시의 아픔이 전신으로 퍼진다.
–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오는 도중에 바람피우면 안 된다?
함께 돌아올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환호성을 받고 있는 게 너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생각하고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저 현실만을 말했다.
“먼저 갔어.”
그 현실 뒤에 포개어놓은 소망은 잠시 내려놓았다.
가서, 날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머뭇거릴 시간이 없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금방 만나러 갈 테니까.
저 모든 이야기의 종장,
유리 하 겔디나 (1)
엘디아 오메크(06)로 거듭난 뒤 돌아온 세계는 격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주적 긴장감의 팽배…….
그 기묘하고 음험한 실제적 위기감의 정체는 세계를 시커멓게 뒤덮은 궁창(穹蒼)이었다.
[창세의 신들이 세계를 주재하던 시절에는 빛의 궁창이 모든 세계를 뒤덮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저건 늪처럼 검푸르게 질퍽거리는군요.]2천 년 전에 먼저 죽어서 요토스의 궁창을 본 적이 없는 카듀엘이 말했다.
궁창은 모든 하늘을 포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구름의 운행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그 움직임은 보였다.
사람들은 저것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으나,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종말을 예언하고 속삭였다.
‘이제 다 끝났다.’
‘이제 모든 게 끝난다.’
광기가 천지로 뻗어 나가며, 죽기 전에 해보고 싶던 일…… 강간, 강도, 살인 등이 빛이 닿는 외딴곳들에서 행해졌다.
그때, 구원의 소식이 먼 동방에서부터 왔다.
동방(東方).
인류는 이데아 반도를 그렇게 불렀다. 첫 번째 자손 요정이 기거하는 그 환상의 땅을.
옛 바다의 꽃 숄이류를 쓰러뜨린 뒤, 붕괴하던 전선이 하나둘씩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그 소식과 ‘만나게’ 되었다.
「그래, 세계를 돌아보며 해답을 찾은 얼굴이구나.」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반가운 재회가 이루어졌다.
홍염의 아키레아.
이제는 호흡을 쌕쌕거리는 수준까지 왔음에도 아키레아는 더없이 살가운 미소로 맞아주었다.
「이제야 네 어미와 똑같은 눈을 갖게 되었구나. 용사의 눈이야.」
표정이 덧없이 무너졌다.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단지 슬픔의 메아리로 영혼을 덧없이 울리고 있는가.
“여전히 그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녀석은 달빛의 은광이 화사하게 빛나는 갑주를 입고 있었다. 테르시아께서 입으시던 그 무구였다.
허리춤에 매달린 채 태초의 빛의 색채로 명멸하는 검 또한 빛의 칼날 베르켄시아였다.
테르시아와 달리, 녀석의 베르켄시아는 칼과 방패의 형태로 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슷했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 아래의 두 눈에는 처연한 슬픔이, 정중히 다가와 손을 내밀 때의 목소리에조차 아련한 슬픔이 일렁이는 건.
그 말하지 못하는 슬픔 속에서, 이 녀석이 밟아왔을 생애의 흔적이 엿보였다.
“샤릴리온, 처음 뵙겠습니다.”
분명, 처음 뵙겠습니다, 라는 언어를 말하고 있었으나 거기 실린 감정은 ‘드디어 다시 만났군요’에 가까웠다.
기시감이 머리를 흔든다.
정확히 알지 못하는 세계선이 기억 저편에 아스라이 포개지면서.
“저는 리암이라 합니다.”
테르시아가 성숙한 슬픔을 지니고 있던 것과 대조적으로 녀석은 여린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렇군…….’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되었다고 하는데, 세상의 풍파에 깎인 눈빛은 어린아이의 눈이 아니었다.
‘시간을 되돌렸나…… 몇십 번일까, 몇백 번일까.’
아마, 진정한 빛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난다면 이런 외형일 거야. 비취색의 눈동자는 태초의 빛을 품고 있었다.
그 만남의 한순간 뭉클거리며 일어서는 운명을 깨달았다.
엘디아 오메크(06)는 이 소년의 장작이 되기 위해 태어났구나…… 지금껏 존재했던 어느 빛보다도 눈부시게 타오르게 해주기 위해.
“지금까지 몇 번 되돌렸지?”
리암이 그 질문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힘없이 감았다.
“천 번째입니다.”
“고생이 많았겠군…….”
자신의 슬픔을 분명히 보고 분명히 알아보는 그 한마디 말에, 리암은 잠시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많이 바뀌었군요. 분위기나 위엄 자체가…… 신격조차 느껴져요. 그리고 이전의 열두 번 동안은 항상 샤릴리온 한 자루만 갖고 있었는데.”
“그래? 신기하군.”
“신기한 건 제 쪽입니다. 예전에 당신은 샤릴리온 하나의 힘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었어요.”
역시…….
카렌덴께서 말한 그대로야.
– 이번 세계선(世界線)은 세계점(世界點)의 축이 뒤틀렸다.
이 가슴팍에 유르벨뭉을 심은 그 존재에 의해서.
카렌덴이 엘디아 오메크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데 성공한 것조차도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도움을 준 덕택이라 했다.
즉, 내가 엘디아 오메크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이 세계선이 유일하다는 소리였다.
– 무수한 우연이 운명처럼 겹쳐지며 새로운 빛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선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운명의 질량은 전 세계의 무게와 같았으므로, 혼자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테르시아가 선택한 아이와 만나라. 곧 만나게 될 거다.
테르시아께서 선택하신 아이가 바로 이 리암이었다.
테르시아에게 계시를 받은 청성 미른가디아는 리암을 애지중지하되 또한 냉혹하게 성장시켰다.
그렇게 열여섯 살에 이미 소년 영웅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남들은 결코 알지 못할, 천 번의 세계선을 넘나들면서.
리암은 청성의 미른가디아 휘하에서 네크론 군대를 모두 쳐부수고 혈족의 왕을 전부 죽였다.
동방을 겨누던 마족의 송곳니를 모조리 일소시킨 후 엘리트 헌터와 엘리트 어쌔신 또한 무찔렀다.
인류가 네이갈라스를 토벌하고 제국 내전을 평정하는 사이에 벌레 군주 켈렉─샼을 토벌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운명의 여정 속에서, 내가 그랬듯 리암 또한 혼자가 아니었다.
“아, 자네가 그 유명한 우루크 슬레이어로군?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잘생겼는데. 이러면 내 전략이 100% 성공하겠는걸.”
카렌덴이 선택한 2대 공허의 사도, 리드워즈.
본명은 요란 엘 바텐베르크.
바텐베르크라는 성씨로 알 수 있듯 무너진 남요정 왕국의 제1승계권의 왕녀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왕태자라 불렸다. 어떤 왕자보다도 더 왕자답다고 명성이 높을 정도였다.
우아한 이목구비.
몸에 자연스레 서린 궁중 예법.
그리고 여자들에게만 유독 지극히 친절하게 굴어서 모든 여자를 홀리는 행동까지도.
‘성별만 달랐어도 아주 인간쓰레기였겠다만…….’
리드워즈는 늘 공허의 사도 대신 월광의 음유시인이란 별명을 자칭했는데, 공허라는 사특한 별명보다는 이쪽이 타인을 미혹하는 데 더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난봉꾼이었다.
대부분의 행동이 장난 같았다.
누군가를 꼬신다고 하긴 하지만 리드워즈는 아직 그렇게 큰 매력을 느낀 이성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봐. 전설의 우루크 슬레이어가 왔다고 하면 우루크들이 그냥 성문을 열고 들여보내 줄지도 모르잖아. 아, 하도 더러운 것들이니 오줌 묻은 팬티에 사인해 달라고 할지도 모르니 주의하고.”
“?”
“우루크 꼬맹이들 생일 파티 때 와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수도 있어. 왜, 애들이 네 팬일 수 있잖아. 물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승리를 위해.”
리드워즈가 눈을 찡긋했다. 미친 여자였다. 지금껏 만나본 여자 중에 제일 개성이 강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시렌은 인형처럼 무표정하고 말수가 적은 소녀였다.
늘 붉은 망토 두건을 깊게 눌러써서 자신의 여우 귀를 숨겼다. 수인족 중에서 불꽃 술식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삼미호였다.
“무시해. 리드워즈는 원래 저런 쓰레기야.”
시렌은 담담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수인…….
돌격대의 후손들을 다시 만나자 형언하기 힘든 반가움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삼미호로군. 선조의 이름이 칸루스, 맞지?”
그 질문에, 어지간해서는 표정에 미동조차 없다는 시렌의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
아주 훌륭한 전사였다…… 물론 그런 말을 하진 못했다. 그 대신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했다. 당혹스러웠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세계선의 기억이 겹쳐져서일까.
이들을 만났을 때, 가슴속을 따스하고도 아득하게 적시는 감정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초면에 이리도 깊고 진한 친근감이 느껴질 수 있을까.
‘그래…… 이건 분명.’
태어나면서부터 만나지 못했던 운명을 마침내 만나게 되었을 때의, 그런 따스한 떨림이었다.
저 베르켄시아의 인도 아래서 수십, 수백 년을 동고동락하며 수백, 수천 번을 함께 싸워왔겠지.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되, 영혼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리암이 말했다.
“샤릴리온, 절대 일식(絶對-日蝕)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요토스가 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