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6)
가짜 용사 이야기-96화(96/310)
제96화
저 모든 이야기의 종장,
유리 하 겔디나 (2)
“현재 상황을 알려줄게.”
리아 알터 타스알포가 사령관용 지도를 넓고 크게 펼쳤다. 대륙 지리가 상세히 기록된 지도 여기저기에 말들을 올렸다.
“옛 바다의 지배자, 슈’율큘라의 군세가 모든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서부 전선은 7할이 넘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후퇴를 계속했어.”
“슈’율큘라가 깨어난 건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발크루쉬 클랜은 슈’율큘라의 수족이 되었어.”
발크루쉬…….
평생, 평생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운명의 아픔이 왼쪽 볼에서 불타올랐다.
그날, 이 낙인이 찍힌 이후 삶 전체가 지옥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았던가.
왔구나…….
마침내 이때가 왔구나…….
엘디아로 다시 태어난 이후로도 계속 간직해온 어머니의 칼이 품에서 파르르 떨렸다.
“어인화가 진행된 우루크 족속이지. 또 마족 잔당이 그런 발크루쉬 휘하로 집결했고. 어마어마한 군세야.”
가부좌를 튼 채, 명상으로 체내의 심연을 가라앉히던 홍염의 아키레아가 말했다.
「슈’율큘라도 마지막으로 남은 게 자신이란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 권속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 사서에 나오지 않는 권속도 있고, 기록된 권속들은 그 힘의 세기가 기괴하다.」
“절대 일식 때문입니다.”
“절대 일식 때문이죠.”
거의 동시에 나온 대답이었다.
리암과 멋쩍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다음 발언권을 양보한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심연의 군주,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의 강림이 시작되었단 뜻입니다. 별들의 위치를 재정립하기 위해 해저에서 슈율켈리스 궁전을 끌어올리고 있죠. 권속들에게 전투부대를 맡긴 채 직접 출전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슈’율큘라는 어디에 있느냐?」
“<테르베노플>입니다, 누구보다도 아리따우신 홍염 각하. 옛 바다의 군세와 마족들이 죄다 집결했지요. 모든 트롤들을 동원해 그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고요.”
리드워즈가 노련하게 추파를 던졌다. 삼영룡의 장녀인 홍염의 아키레아에게.
성별만 남자였더라면 백 번 사형을 당해도 부족함이 없었겠으나 여자라는 점에서 면죄부가 주어졌다.
뇌향의 세츠넨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궁창을 새까맣게 뒤덮는 어둠이 절대 일식(絶對-日蝕)이란 거구나. 그게 완전히 진행되면 어떻게 되느냐?」
“심연의 대군주, 요토스가 이 세계에 강림합니다. 모든 <잊혀진 왕들>의 주인이죠.”
장내에 당혹감 어린 침묵이 깃들었다.
그때, 아키레아와 세츠넨이 주고받는 정적의 무게가 달랐다.
그들의 아버지, 용현 레인 루드윅에게 말로만 듣던 존재가 마침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아버지께서는 경고하셨다.
세계의 마지막 날,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가 다시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그래서 걱정이 된다고.
걱정이 되어서, 너희들 곁을 도무지 떠날 수가 없다고…….
[그 상황을 위해 지금도 슈’율큘라가 별들의 움직임을 바꾸고 있군요. 주인님께서 이 행성에 둘러 쳐놓은 빛의 역장을 깨트리려고 말입니다.]카듀엘이 빛을 내뿜어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요토스가 강림하면 인류와 요정, 아인은 물론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할 겁니다. 그 전에 슈’율큘라를 봉인해서 요토스의 힘을 약화시켜야 합니다. 빛의 군주들께서 그리하셨듯이. 그래야 승산이 있습니다.]엘디아 카타(05), 에누엘의 기억 속에서는 요토스와의 싸움에서 다만 방관자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요토스를 베고 이 끝없이 이어져온 장난을 끝낸다, 그것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아니, 창조의 때부터 주어진 숙명처럼 느껴졌다.
“리아, 당연히 너에겐 작전이 있겠지?”
“응. 공격이 최선의 방어가 될 때도 있어. 나는 <테르베노플>에 상륙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자 참모진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 공세로 전환한단 말씀입니까?”
“부디 재고를! 불가능합니다! 인류는 방어전으로도 열세에 놓이고 있습니다.”
“이봐, 거기 못생긴 인간 남자. 일식이 완료되면 모든 게 끝나. 그때까지 방어전을 펼쳐봐야 의미도 없다니까?”
리드워즈가 말했다.
“하지만…… <테르베노플>은 난공불락입니다! ‘검은 여름’ 때도 마족의 침공을 몇 년이고 버텨냈고, ‘붉은 여름’ 때도 마찬가지였죠! 지옥보다도 더 지옥 같았다던 남부 전선에서 유년기부터 종군해오신 경께서 누구보다 더 잘 아실 터! 그리고 바다는 슈’율큘라의 영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상륙작전을……?”
그러자 리암이 지도 위의 <테르베노플>에 펜으로 각종 정보를 추가하기 시작한다. 적 병력의 배치도 및 전술 시설들의 위치였다.
“현재 슈’율큘라의 군대가 <테르베노플> 해안을 지키고 있고 발크루쉬 클랜이 육지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입니다.”
남들은 가보지 못한 미래를 가보았고, 그 미래에서 돌아왔기에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정보들은 간결하되 명확했다.
이 정보를 얻기 위하여 치러야 했던 슬픔의 무게에 대해 리암은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테리토스를 작동시킬 수만 있다면 어인들의 공격으로부터 해안 상륙을 완벽하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테리토스, 테르벨 황금함대의 기함이었다.
오늘날에는 <테르베노플>을 상징하는 등대이자 대교(大橋)로 유명했다. 벨리소르 대하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뉜 도시를 하나로 이어주는 대교.
<온 것들>이 아크라드 대륙에 상륙한 걸 상징하는 테리토스는 구공화국 수도 시민들의 오랜 자부심이었다.
“<테르베노플>은 삼중 성벽으로 명성이 높지만, 해안 쪽 성벽은 낮고 한 겹에 불과합니다.”
카이센이 물었다.
“그걸 슈’율큘라가 모를까?”
“테리토스를 작동시키면 됩니다. 놈들은 아직 테리토스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못했어요. 이 작전을 위해서는 우선 검은 태양 카렌덴의 유산이 필요합니다.”
리암의 시선을 받은 건 유리우스 페이지였다.
유리우스는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단 듯, 목에 걸고 있던 흑구슬을 망설임 없이 꺼냈다.
흑양린(黑陽鱗), 검은 태양 카렌덴이 첫 번째 제자 에밋사에게 선물했다는 자신의 핵의 편린.
“바로 이날을 위해 저희 선조들이 이걸 간직해온 것 같군요.”
그 유산과 의지는 페이지 가문의 적장자들에게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흑양린은 <온 것들>의 장비들을 구동시키는 동력원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저 새까맣게 맥동하는 빛에서 어떻게 감당하기 힘든 힘의 흐름이 느껴진다.
“작전의 구상은 알겠어. 그래서, 이 병력을 전부 수송할 배가 있긴 한가?”
카이센이 신중하게 내민 그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심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곳까지 너희 야만인들을 수송하는 게 바로 내 임무지. 현재 남은 전함이 몇 척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상황쯤은 이슬라를 상대하는 것보다 쉽다.”
어느 종족보다도 선진화되고 다채로운 제복을 가진 아인 종족.
그 아인 장병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군장을 갖춘 자가 군모를 살짝 들며 씩 웃었다.
당혹감 어린 시선으로 그걸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다음 순간에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살아 계셨던 겁니까?”
하지만 그건 당혹의 웃음이라기보다는, 일전에 느낀 운명의 재회에서 비롯된 떨림과 결이 같았다.
다시 만났구나.
이제 다시 만나게 됐구나.
영혼이, 언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까 줄곧 기다려왔던 것처럼.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까. ‘검은 여름’에서도 살아남은 몸인데.”
“이렇게 살아 계신 걸 이슬라가 알 수 있었더라면 정말 기뻐했을 텐데…….”
할바론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음속 깊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킨덜란츠 내부의 플레이어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은 것처럼 꾸밀 필요가 있었거든.”
할바론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면서 이목구비며 무장을 훑어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사람이라는 건 신기해서, 부모 자식이건 스승 제자건 오래 있다 보면 비슷한 분위기를 내거든.”
“……?”
“예전에 너에게서는 분명 카밀라 녀석과 같은 냄새가 났었는데. 지금 너에게서는 라미네아와 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격이 높은 분위기가 느껴진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지는 저 산맥에서의 세월, 로베리스가 가슴을 때리며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으니까.
– 카이센, 카밀라 선배님을 뛰어넘어라. 그래서, 그분의 스승 라미네아 님과 같은 영웅(英雄)이 되어라.
그러나 그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샤릴리온.”
그 작전은 기상천외한 수준이 아니라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하나의 톱니바퀴라도 틀어지면 모든 것이 실패하는 결점을 안고 있었다.
뇌향의 세츠넨이 선발대를 <테르베노플> 해역으로 이동시킨 후, 카이센이 연안의 적세를 완전히 제압하고 테리토스를 재가동시켜야만 했다.
‘5분조차 되지 않는 시간 안에 말이지.’
테리토스가 재가동된 순간, 그 빛이 왕의 역장을 무력화시킬 것이므로 뇌향이 함대 전체를 전이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성공한다면 5분 안에 적의 심장부를 겨누는 대승이 될 것이었고, 실패한다면 5분 안에 삼군(三軍) 전체가 전멸하는 대패로 기록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공과 실패의 단초가 단 한 사람, 카이센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선발대에는 리암, 리드워즈, 시렌, 할바론도 포함되었으나 작전의 시작을 여는 게 카이센이니 말이다.
리암과 리드워즈는 교란, 시렌은 내부 제압, 할바론은 테리토스 조종을 맡는 작전이었다.
「Dum…… Has…… Leva…….」
그때 문득 불경한, 섭리조차 복종시키는 광기의 메아리가 들려왔다.
시야가, 의식이 어지러이 흔들린다. 네 자루의 진성검이 광폭의 빛으로 울부짖기 시작한다.
그 흔들리는 균열과 일렁임 속에서, 어떠한, 분명하고도 또렷한, 암녹색의 형체가 도드라진다.
“또 저 문어대가리가 납셨군.”
할바론이 고통스럽게 머리를 붙잡고는 투덜거렸다. 아키레아가 외쳤다.
「넨, 서둘러서 이 환영을 없애버려라. 저 짓거리 때문에 모든 병사들이 광기에 시달리고 있어.」
「언니, 환술의 단계가 너무나도 높아.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렇다면 조금 늦어도 되니 병사들의 마음과 영혼을 지키면서 진행해. 아아, 이런 상황에 미르만 있었어도…….」
그때 의식과 시야를 검푸르게 가득 메우고 있던 광기의 환술사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낮고 천한 필멸의 아이들이여, 어찌 불경하게도 정해진 순리에 맞서려는 계략을 꾸미느냐. 섭리에 얽매인 너희들은 필멸의 존재이므로 순리에 따라야 한다. 너희들의 세계는 다시 심연에 뒤덮여 썩어 사라지리니.」
그 순간, 슈’율큘라의 의식과 시선과 광기가 한곳으로 폭발하듯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리암 쪽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저 힘에 머리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리암은 베르켄시아가 찬란하게 내뿜는 빛의 역장에 휩싸여 보호받고 있었다. 그 표정이 편안했다.
「빛의 종복인 네놈 또한 우주의 운행을 더럽힐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곧 이 우주의 진정한 지배자께서 강림하실지니. 그분의 사자이자 심복인 나, 본좌 슈’율큘라가 말하노라. 이 세계에서 빛의 순환은 이제 끝장나리라.」
그 말이 끝날 때쯤, 요동치던 의식이 잠잠해졌다.
덕분에 의식의 광란 속에서 나타나던 광기의 형상 또한 사라졌다. 세츠넨이 슈’율큘라의 환영 역장을 걷어낸 것이다.
리드워즈가 류트를 튕기면서 노래하듯 말했다.
“이제 숨길 생각도 안 하네. 밀당을 할 줄 모르는 남자는 여자한테 매력 어필을 못 하는데.”
“아시잖습니까, 리드워즈. 왕들은 콧대가 높아서 그렇게 겸손할 형편이 못 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지?”
리드워즈가 리암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선은 카이센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적 권속 출현! 3기입니다!”
“모든 군세가 이쪽으로 집중됩니다! 너무 많습니다! 30분 안으로 이 요새까지 도달!”
“각하, 어서 지시를!”
황잡하게 난무하기 시작하는 목소리들, 서전(緖戰)의 순간에는 언제나 이랬다.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가 집중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공포를 잘 통제하여, 길을 열 수만 있다면…… 권속 3기를 따돌리고 단숨에 적의 심장부를 겨눌 수 있게 되리라.
“뇌향 각하, 병사들을 함대로 전송시키시고 저를 테리토스 위로 보내 주십시오.”
「카이센, 어찌…….」
“왕의 높은 콧대를 박살 내러 가야죠.”
이미 2천 년 전에 한번 해본 일이다.
그러니 별문제도 안 돼.
또 한 번 하는 것쯤은.
그래서였을까, 저 먼 옛날 슈’율큘라 토벌전에서의 엘디아 카타 에누엘과 저도 모르게 똑같이 말하고 있던 까닭은.
“3분 안에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