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8)
가짜 용사 이야기-98화(98/310)
제98화
“발카로, 너를 찾아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다.”
온갖 산 제물이 쌓여 있던 좌대(座臺), 빛에 불타고 뒤틀린 그 잔해들이 발치에서 바스러진다.
잔해뿐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 주위로 웅혼한 균열이 퍼졌다. 진성검 네 자루의 무게를 세상이 견디지 못하는 듯.
그러나 그 가짜 용사는 견뎠다.
견디고 또 견뎌서, 그 세상 전체의 무게를 짊어진 채 이렇게 돌아왔다.
「으흠하하하하하하하!」
발카로가 홍소를 터뜨렸다.
얼굴의 윤곽은 언뜻 예전과 비슷했으나,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이 유년의 시대와 달라져 있었다.
사냥의 징표인 송곳니나 해골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던 수염들은 촉수 다발로 변해 있었다.
「마침내 전사의 얼굴을 가지고 내가 있는 곳까지 왔구나, 홍련의 아들이여. 기대하는 마음으로 너를 기다려왔다. 잡아먹을 짐승의 살이 오르길 기대하듯이.」
눈동자 또한 심해 밑바닥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 같은…… 문어와 유사한 홍채로 변해 있었다.
마치, 슈’율큘라처럼…….
그뿐인가. 등에서 우주의 날개가 돋아나서 끈적한 점액질을 떨어트렸으며, 어머니를 죽였던 그 외날 도끼는 심해의 이끼로 뒤덮여 사특한 기운을 발했다.
그 도끼를 쥐고 있는 왼팔이, 촉수가 수없이 엮이면서 길고도 거대하게 만든 문어발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렇게,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비교하는 자신을 보고 울분이 치받쳤다.
「보아라, 홍련의 아들. 너는 전사가 되어 돌아왔으나 그사이에 나는 왕(王)이 되었다!」
그날, 어머니가 어깨로 피를 쏟으며 죽으신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의 행복이 산산이 부서졌다.
과거의 기쁨도 현재의 행복도 미래의 소망도 모두 잃어버렸다.
「심연의 왕과 하나가 된 위엄이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세상 자체가 완전히 낯설어졌다.
지금까지 알던 모든 기쁨과 행복을 잊어버렸다. 꽃에서 향기를 맡지 못했고, 아침의 햇살도 짜증스럽기만 했다.
세계는 사방의 벽이 되어 나를 포위하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들이닥쳐 압사시킬 듯.
「이제 나에게 이길 자는 없다. 아직 온전하지 못한 왕을 베었다던 네놈 또한 마찬가지지.」
하루도, 평생 단 하루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다.
근데 우스운 일이다.
이제 어머니의 얼굴은 흐릿해서 떠오르지도 않는데…… 저놈의 얼굴만큼은, 그때 어머니를 죽이고 돌아서던 저놈의 얼굴만큼은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또렷하다는 게.
「이제 너를 상대할 필요조차 없는 위대한 존재가 되었으나, 네가 해온 노력이 가상하니 약속을 이행해 칼타케로 상대해주마.」
원래대로라면, 시들어 죽는 가을날의 나무처럼 잎사귀를 모두 흘리며 죽어가야 했다.
그렇게 죽었어야 했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들이 와서 물을 주었다. 꼭 껴안아 온기를 주었고, 지면의 잡초를 뽑아주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렇게 다시, 나무는 서서히 세상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줄기 위로 비가 흘러내리는 시원한 감각도, 햇살이 비쳐드는 따스한 감각도, 낙엽을 떨어뜨리는 아픈 감각도.
그렇게 다시, 나무 안쪽의 깊은 곳에서 덧없이 사그라들던 생명의 불길이 빛과 온기를 발하며 타오르게 되었기에.
“널 만나면 복수심에 미쳐서 평정심을 잃어버릴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분에 넘치도록 많은 이들이 먼저 다가와 보듬어주고 지켜주고 되살려준 영혼의 불꽃.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이제, 그 빛과 온기를 세상의 마지막 때로 운반해야 하리니.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야.”
진성검들이 제각기 검광을 토해내며 자신을 선택하라고 부르짖는다.
이 검들은 곧 장작.
모든 이들에게 건네받은 추억과 인연과 기쁨의 불을 세상 저편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횃대.
낭비하고 있을 시간 없어.
횃대와 장작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끝나면 바스러지고 마니까.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아까워. 일순(一瞬)이다. 일순간에 베어주마, 발카로.”
저 모든 이야기의 종장,
유리 하 겔디나 (4)
바다가 흐느껴 울면서, 그 위로 희끄무레하게 솟구치는 무형(無形)의 촉수들.
빛을 두른 칼날과 어둠을 두른 도끼날이 찰나의 순간 동안 수백 번 격돌하며 불 싸라기를 날린다.
발카로의 육신을 빌어 강림한 옛 바다의 지배자의 권위가 온 바다를 전율시키고 있었다.
[리암 : 샤릴리온, 슈’율큘라의 힘이 더욱 강대해지면서 절대 일식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권속 셋을 상대하고 있습니다.]진성검 갈라디엘의 힘이 어둠을 핏빛으로 찢는다. 도륙 나서 쓰러지는 왕의 문어발들.
[리아 : 사방으로 퍼졌던 심연의 군세가 다시 여기로 집결하고 있어! 어떻게 이리도 빠르지?] [요한 : 권속 출현, 끝도 없이 오는군.] [카듀엘 : 적들은 룰함레이를 이용하고 있을 겁니다. 고대의 바다를 잇던 생체 운송 수단이죠. 바다 깊은 곳에 있을 겁니다.]진성검들의 검신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창세의 힘이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시간의 흐름조차 둔해지게 만들 정도의 집중력. 주위의 소리 또한 느릿느릿하여 선명하지 않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와 동작만이 제대로 된 속도와 떨림을 가진 세계에서 검을 휘두른다.
[리아 : 하지만 찾는다고 해도 바닷속에 있는 걸 어떻게…….] [할바론 : 내가 나서야겠군. 이럴 줄 알고 거신 0식을 준비해왔지. 짓밟으면 그만 아닌가? 뇌향 각하, 0식을 전송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양쪽에서 높이 솟구친 해일(海溢)이 바다 전체의 무게로 들이닥친다. 회피의 허점을 겨누려는지 사방에서 문어발이 솟구친다.
「진정한 지배자께서 그 거룩한 권세로 이 땅에 돌아오시리니, 그 우주의 어둠을 목도하라. 우둔하고 아둔하여 그 경이를 알지 못하는 부정한 존재들을 구축하라.」
검풍(劍風).
양손으로 굳게 붙잡고 휘두른 샤릴리온의 칼날이 은백색의 검광을 궤적에 펼친다.
그 궤적을 따라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칼의 폭풍, 그 초월적 폭풍이 허공에 창세의 룬을 새긴다.
[할바론 : 뇌향 각하, 이제 동굴을 탐지해 주십시오!]각인참(刻印斬), Bakhu.
들이닥치던 파도가, 그 파도가 놓인 시공간 전체가 한순간 격리된다. 반투명한 유리창 안쪽에 박제되는 형태로.
격리는 한순간이지만 초월의 싸움에서 한순간이란 적의 허점을 겨누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다.
[리드워즈 : 권속 하나 토벌 완료. 지치다 보니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함께 시원한 문어회를 한 점 먹고 싶은걸.]샤릴리온의 칼자루를 놓는 것과 동시에, 검대에 매달린 갈라디엘의 칼집과 칼자루를 일시에 쥔다.
육신이 빛의 가속을 얻는다.
육신이 벼락의 형태를 입는다.
그 시간의 틈새를 감추기 위해 들이닥치던 7개의 문어발은 아무도 없는 벌판을 때린다.
[뇌향 : 할바론, 여기는 세츠넨이다. 그대의 위치로 거신 0식을 전송했다. 확인했나?]그것도 잠시, 베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말끔하게 둘로 절단된 문어발들이 지면 위로 나동그라져 춤춘다.
[할바론 : 예, 좌표로 이동 중입니다. 주위의 마력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만, 지금 육포처럼 짓밟아주고 있습니다.] [뇌향 : 카이센, 지금 상황이 어떠하냐?] [리아 : 혼자서 슈’율큘라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카이센이라면 꼭 성공할 겁니다.]초월의 일섬(一閃).
그 참격의 빛은 인지의 영역이 닿지 못하는 저 시공의 너머에서 왕의 화신의 심장을 베고 지나갔다.
옛 심해의 보구로 엮어 짠 흉갑이 잘리고, 그 너머의 살과 근육과 힘줄을 끊고 그 너머 심장을 터뜨린다.
참격은 한 가닥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는 검강의 초월급 응용. 참격의 가닥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면서, 그 육신을 무수히 베고 자르고 절단한다.
[유리우스 : 룰함레이 이십 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굴을 통해서 옵니다!]왕(王)의 초고속 재생.
터진 심장과 베인 근골을 순식간에 수복시키는 동시에, 몸을 빙글 돌려 외날 도끼를 내리 휘두른다.
거의 동시였다.
베고 지나갔던 자와 베였던 자가 서로를 겨누고 돌아서면서 살(殺)을 휘두른 건.
[시렌 : 내가 도울게.]그때, 주인의 명령에 호응한 요니울란이 칼등 중심 회로에서 칼날들을 분열시킨다.
위협적인 열량을 담은 보랏빛 칼바람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사정권 내부의 모든 영육(靈肉)을 찢어발기는 힘으로 해방된다.
이 경우에는, 왕의 영혼과 축복을 모두 양팔에 실은 발카로의 육신을 모조리.
‘발카로.’
육신이 갈기갈기 도륙되던 한순간 노출된 핵(核)을 정확하게 꿰뚫는 쌍날검, 히스기비드.
맑은 파열음 이후 짧은 정적.
다음 순간 그 칼끝을 중심으로 한 공간에 파열이 일면서, 핵을 보호하기 위해 초고속으로 수복되던 육신의 저항을 모두 다른 차원으로 날려버린다.
‘이걸로.’
완전하게 노출된 핵의 허점.
그 핵을 다시 한번 꿰뚫는 진성검의 칼날, 요니울란의 혼백 파열의 힘과 히스기비드의 차원 붕괴의 힘을 삼킨 리벨덴이다.
넘쳐나는 빛이 어둠의 핵을 감싼다. 묶고 뒤덮어서 튀어나오려고 울부짖는 어둠을 단단히 봉한다.
‘끝이다.’
빛의 장막에 완전히 휩싸이기 직전의 어둠이 뭐라고 외친 것이 들린 것 같았다.
아니, 웃음이었을까?
분명 그 음흉한 왕이 터뜨린 웃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그다음 순간에 급작스럽게 일어난 광기(狂氣)가 모두 설명될 테니까.
“여기는 샤릴리온, 슈’율큘라 토벌 임무를 마쳤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이 몰아치던 산성의 폭풍우도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뇌향의 울림을 통해 승리의 기쁨들이 몰아칠 때, 끌로 뼈를 긁는 아픔이 왼쪽 볼에 일었다.
‘낙인이 사라져간다…….’
어머니, 당신과 헤어지던 그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때 손끝에 일던 흐느낌 같은 떨림은 복수의 희열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후회였을까.
모른다. 나 자신의 마음조차…….
[홍염 : 뭐지?]그때였다. 창공을 뒤덮고 있던 심연의 먹구름이 한곳으로 모여 응집된 것은.
이변을 눈치채고 반응하려던 순간, 먹구름들이 거대한 어둠으로 폭발하며 천지를 휩쓸었다.
태고의 어둠, 잠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뇌향 : 아, 아, 아아아아아!]진성검들이 검광을 토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심원의 광원들만이 빛이 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베르켄시아의 빛은 더욱 크고 맑고 깊었다. 병사들이 그 빛에 이끌려 거기로 몰려들 정도로.
[홍염 : 넨, 왜 그러느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지? 절대 일식이 시작된 거냐?] [뇌향 : 아니…… 절대 일식이 아니라…… 갑자기 심연의 더듬이가 영혼 깊숙이…….] [리암 : 이건 절대 일식이 아닌데, 뭐지? 여태껏 이런 일은…….]그 혼란의 소음을 종식시킨 것은 웃음소리였다.
「느흐흐하하하하하하하……!」
뇌향의 세츠넨.
목소리의 결은 같으나 말투도 느낌도 달랐다.
태양처럼 따스하게 모두를 보듬어 품던 느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진정한 왕께서 본좌에게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으니, 그 일을 끝마치기까지 잠들 수 없으리니. 이 육신은 그 사명의 발판으로 사용해주마.」
태고의 어둠이, 그 촉수를 내뻗어 닥치는 대로 세츠넨의 몸에 달라붙고 있었다.
공허의 힘은 무력했다.
영혼이 순식간에 침식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리드워즈의 공허충 수십 마리와 공허의 악마들이 뇌향을 구하고자 발버둥 쳤으나 무의미했다.
「나를, 나를 죽여라……! 검은 태양께서 택한 공허의 아이야, 서둘러, 시간이, 시간이 없어……!」
세츠넨이 고통스레 헐떡였다.
「나를, 내 육신을 멸해서…… 바다의 군주를 끄집어내야만……!」
영혼과 육신 모두를 좀먹으며, 그 통제권을 빼앗아가는 격렬한 힘의 반동에서 벗어나고자 세츠넨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시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인형 같은 얼굴에도 당혹감이 이토록 완연했다.
“리암……!”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리암도 마찬가지였다.
「무의미하노라.」
변수가 발생하지 못하도록, 그 주위에서 무형의 촉수들이 솟구쳐 휘몰아쳤다.
“방법이…… 분명, 방법이…….”
그러나 그게 없었어도 리암은 뇌향의 심장을 결코 겨눌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승 청성이 그토록 사랑하던 누이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센 또한 세츠넨을 어머니처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인연이 단절되는 고통은.
그 인연을 끊어내면서, 샤릴리온을 미래로 데려가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그 미래에 그는 행복할까?
「어서…… 어서 내 고통을 끝내주거라…… 이럴 시간조차……!」
뇌명의 빛을 핏빛으로 길게 끌던 벼락이 그 현장에 착륙한 것과, 지면에서 4개의 촉수가 솟구친 건 반쯤 동시였다.
‘무슨……?’
카이센에게는 아주 잠시, 상황을 인지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잠시의 시간 동안, 4개의 촉수가 뇌향의 세츠넨의 몸을 보호하듯 휘감았다.
그리고 육중한 지진과 함께 지반 저 아래, 심해 속으로 끌고 내려가 버렸다.
“리암,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리암은 멍하니 세츠넨이 끌려간 무저갱의 구멍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팔을 붙잡고 흔들던 그때, 바다가 뒤흔들렸다.
수평선이 무너질 듯 요동치고, 바다가 찢어지면서 비명을 터뜨렸다.
그 찢어지는 해수면 위로, 수평선조차 감히 담아내지 못하는 고대 심해의 궁전이 부상했다. 시야를 양쪽 끝으로 돌려도 궁전은 검푸른 위엄을 토해냈다.
그 정체를 제일 먼저 알아본 카이센이 아연히 중얼거렸다.
“슈율켈리스……?”
어떻게 잊겠는가.
저 소름 끼치는 형태를, 저 무수한 기둥들과 사악한 동상들과 심해의 흐느낌이 뒤섞인 광란의 궁궐을.
궁전 곳곳의 탑에서 어둠이 회오리쳐 올라 하늘로 올랐다. 어둠이 별들의 회전과 천문의 위치를 제멋대로 뒤틀기 시작했다.
저렇게나 짙은 어둠 너머에서도 저렇게나 사특하고 사악하고 끔찍하고 비틀린 별빛을 볼 수 있다니.
리암이 멍하니 말했다.
“절대 일식…….”
숨을 허덕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리암이 불현듯 베르켄시아를 거꾸로 잡고는 자신의 심장을 겨누었다.
빛의 칼날이 그 심장을 터뜨리고 시간을 어느 지점으론가 되돌렸을 것이다.
카이센이 그 손목을 허공에서 낚아채지 않았더라면.
“지금 뭐 하는 거냐?”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물었다.
놀랄 만큼 냉정하게 지금 리암이 하려는 일과 그 의도를 알아볼 수 있었다.
베르켄시아의 힘, 시간 역행.
그 힘을 사용해서 다른 세계선의 과거로 이동해, 지금 일어난 상황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보내 주십시오, 샤릴리온. 일식이, 절대 일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가야 합니다!”
“대체 왜!”
“제가 실패했으니까! 이번 세계선도 실패했어요! 실패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가야 합니다!”
“리암.”
“알아요! 뇌향 각하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압니다! 그래서, 그래서 도저히 벨 수 없었어요!”
“리암!”
“어떻게 뇌향 각하를 구해낸다고 해도, 바로 요토스가 강림할 겁니다! 그러니 보내주세요! 제가, 제가 반드시! 다음번에는 그분을 확실하게 구해낼──!”
그 순간, 용린갑의 건틀릿에 안면을 직격당한 리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정적이 내리깔렸다.
시렌이 발끈하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 했으나 리드워즈가 그 손목을 붙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샤릴리온……?”
“너는 이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사람들의 삶을, 그 삶을 지키기 위한 싸움들을! 그 모든 게 네가 원하는 숫자가 안 나오면 그걸 다시 돌리기만 하면 된다고? 세상은 주사위 게임이 아니란 말이다!”
이건 내가 너에게 주는 위로가 아니다. 먼저 받았던 걸 너에게 돌려주는 것뿐이야.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숫자를 내기 위해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어. 근데 넌 그걸 다짜고짜 포기하고 시간을 되돌리겠다고? 모든 사람들의 숫자가 ‘6’이 나올 때까지 계속 주사위를 돌리기 위해?”
“샤릴리온, 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해해주지 못하는 시간대 속을 도대체 얼마나 더 헤맬 생각인 거냐. 이미 천 번이나 되돌렸다며. 너 정말 더 견딜 수 있겠냐?”
입술을 떠듬거리며, 울음 같은 말들을 쏟아내려던 리암의 얼굴이 그 순간 무너졌다.
어린 내가 평생을 그래왔듯이.
분에 넘치도록 무수히 만난 수많은 인연들의 품 안에서, 백골 병단에서, 철십자 기사단에서, 또 타르시요와의 만남에서.
“난 잘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노력할 건지.”
나 또한 값없이 받았으니.
너에게도 이 온기를 값없이 내어준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센이 쓰러진 리암의 손을 붙잡아 힘껏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용사가, 네가 포기하는 순간에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거란 말이다.”
그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해수면 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던 카듀엘이 마침내 돌아섰다.
[분석이 끝났습니다. 슈’율큘라의 장마전선이 해수면 위로 집중되면서 제3.5등급 심연의 위력을 내고 있습니다. 제5위계 이상의 방어구가 없는 비전투원들의 접근은 불가능합니다.]그러자 리드워즈가 짐짓 멋쩍은 한숨을 내쉬며 멋진 척을 했다.
“한마디로 우리 다섯 명에게 이 세계의 명운이 달리게 됐다 이거군. 마지막으로 아리따운 여성들과 데이트를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카이센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병사가 다 들어갈 수 없는 건 아니지.”
그렇게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기는 카이센의 시선이 시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시렌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정확히는, 엘디아 카타(05) 에누엘을 좇아서 악몽의 끝까지 향했던 위대한 전사들의 후손을.
“에누엘 돌격대는 제3등급 심연의 눈보라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싸웠다. 제3.5등급 심연쯤은 애들 장난일걸.”
“진심이야?”
“다른 방법이 있나?”
아름다운 불길이 커다랗게 폭발하더니, 그 폭발 속에서 위엄 어린 형상을 갖추며 재정립되었다.
「카이센, 내가 수인족의 땅으로 너를 데려가 주마. 내 등에 올라타거라.」
“각하,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어머니 알라키쉬께서는 수인족들을 수호하다 명이 다해 죽었으며, 내 아버지 용현께서는 그들을 장벽 아래로 인도해냈다. 내가 함께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 눈을 보고 알았다. 지금 아키레아 또한 자신의 사명의 끝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걸.
그렇군요, 당신께서도 이제…….
서로가 서로의 눈에서 결연한 의지를 엿볼 때, 리드워즈가 말했다.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죠. 뇌향 각하처럼 정밀한 공간 전이는 못 해 드립니다만, 차원 회랑을 통해 이데아 반도까지는 보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정말 할 수 있겠나?」
“예, 멋진 남자는 떠나는 여자를 붙잡지 않고 멋지게 보내주는 법이니까요.”
리드워즈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니, 근데 너 여자잖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런 반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와라, 내 귀여운 벌레들아.”
공허의 권능, 공허의 벌레들이 공간을 갉아먹으며 차원 저편으로 통하는 회랑을 만들기 시작했다.
카듀엘이 코어의 빛을 명멸시키며 말했다.
[베르켄시아의 계승자께서는 뮤(04) 론델로 향하십시오. 전 지구 조명 체계, ‘CODE : 타르혜 론델’을 가동시켜야 합니다.]“타르혜 론델이라면……?”
[빛의 진짜 이름이지요. 뮤 론델에서 봉화를 울리면 다른 론델에서 신호를 받고 전 지구 조명 체계가 가동됩니다. 세계가 완전한 어둠에 잠기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좌표를 안내하겠습니다.]역시 카렌덴…… 마지막 싸움까지 확실하게 대비해 놓으셨군요.
아련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지축을 거칠게 흔들며 거신 0식이 해안에서 멈추어 섰다. 0식의 손을 타고 할바론이 지면에 내려섰다.
“테리토스 선내에서 옛 천사들이 사용했다는 항중력 방어구 1천 개를 찾았다. 정예병들에게 이걸 보급한다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카듀엘 님?”
[항중력 방어구는 제5위계 장비로 이론상 제3.5등급 심연을 무력화시키는 게 가능합니다.]“그렇게 됐다는군.”
리암이 숨을 헐떡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동료들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눈이, 물기로 젖었다.
무어라고 말하려 하는 듯했으나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샤릴리온이 말했다.
“리암, 너는 뮤 론델로 가서 봉화를 작동시켜라. 그리고 슈율켈리스에서 다시 만나자.”
그것이 내 사명의 끝.
내 칼의 길의 마지막 이정표.
먼저 죽어간 이들로부터 넘겨받은 횃불을 들고, 가을로 이어지는 문을 열 순간이 왔다.
“걱정 마라. 뇌향 각하를 구해낸 이후, 강림하는 요토스는 내가 끝장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