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99)
가짜 용사 이야기-99화(99/310)
제99화
저 모든 이야기의 종장,
유리 하 겔디나 (5)
“조심하십시오, 각하!”
절대 일식의 영향으로, 타락의 물결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일어서고.
크고 두려운 것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던 장막이 찢어지기 시작한다.
세상에는 빛 한 점 없었다.
홍염의 아키레아가 토해내는 불의 숨결, 그로 인해 심연의 벌레들이 불살라지며 내비치는 조명이 이 세상의 전부였다.
「벌레 군주의 봉인에도 균열이 일고 있구나. 서둘러야 한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하늘에서부터 왔다.
일식의 장막이 움직인다…….
절대적 공간으로부터 밀려드는 파멸의 손아귀가 되어, 어둠 속을 내달리는 아키레아를 덮친다.
천공뇌섬(天空雷閃).
그 악신의 손을 날카롭게 찢으며 창공을 내달리는 벼락, 갈라디엘을 사용한 위상 전환.
「……Su ku ras ha…… 미지에 대한 불복종이 곧 광기요 공포로 이어지나니, 내가 베푸는 평화와 구원을 받아들이십시오…….」
벨 때마다.
잘게 흩어지는 어둠의 잔해들.
그것들이 머리에 달라붙자, 형언할 수 없는 목소리가 뇌리에 직접적으로 전해져온다.
「……오직 나만이, 진정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절대적 존재. 섭리조차도 굴복시키는 나의 축복을 받고 영생을 누리시기를…….」
그 절대적 신비가 야기하는 매혹의 황홀경과 극렬한 두통…….
다리 아래의 수면을 비추는 별빛의 병적인 선율과, 멸망한 어느 세계의 썩어가는 첨탑들이 내지르는 비명…….
뇌를, 의식을, 영혼을 잠식하는 절대 심연…… 그대로 잡아먹혔을지도 모른다.
웅, 웅, 웅, 웅, 웅, 웅.
그 순간, 영겁의 어둠을 가르는 빛줄기들이 있지 않았더라면.
빛은 대륙과 반도를 길게 잇는 영원산맥의 모든 산봉우리에서 솟구쳐 일식의 장막을 겨누었다.
장막 곳곳에 구멍이 뚫리며, 세상이 일출 전의 새벽처럼 어렴풋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
절대자의 손아귀도 그 빛의 끈질긴 저항 속에서 힘과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타르혜 론델의 봉화.
산봉우리를 타고 끝없이 용솟음치는 빛의 물결, 온 대륙 모든 봉우리마다 설치된 봉화대에서 빛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리암, 성공했구나.’
주먹이 무심결에 있는 힘껏 쥐어지는 걸 느꼈다. 물론 내막을 알았더라면 감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알 수 없었으니까.
리드워즈와 카듀엘이 뮤 론델을 가동시키는 과정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유르벨뭉을 카이센의 영혼에 새겼던 존재가 미래에서 온 베르켄시아를 리암에게 전달했단 사실도.
「그래, 넨과 미르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예?”
「아버지께서 300년 전에 저 모든 봉화대를 발견하셨다. 넨과 미르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저것들을 지켜왔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먼 날들을 회상하는 아키레아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뇌향 각하…….’
수견(狩犬) 자치령은 대륙의 동북단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영원산맥이 끝나고 이데아 반도가 시작되는 어귀의 벌판에 수인들의 마을이 점점이 들어앉아 있었다.
삼백여 년 전에 수룡 예리세리카가 그 땅을 황무지에서 생명의 땅으로 바꿔서 수인들에게 선물하였다고 한다.
– 샤릴리온, 마을 어르신들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가장 위대한 전사들의 후손이었음에도, 그들은 그런 땅으로 내몰려서 온갖 배척을 받으며 살았다.
– 에이진 가문과 루드윅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땅 깊숙이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을걸.
천 년 전까지는 인류와 요정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하르바도니아를 수호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 흑마법사 제르닉스 때문이다.
역사의 산증인인 홍염의 아키레아가 감추어진 내막을 그렇게 설명하였다.
– 제르닉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법으로 가지고 놀 줄 아는 달인이었다.
본래 거미 군주, 아쉬론의 다섯 수족 오본위 중 서열 2위 자윤이 봉인될 때 수인들에게 내린 저주가 있었다고 한다.
– 자윤이 수인들에게 내린 저주를 증폭시켜서 키웠지. 카렌덴께서 정화시켜 두신 저주를 다시 되살려놓은 거다.
아키레아의 모룡(母龍) 알라키쉬는 문명 세계와 단절된 수인들을 수호하다 죽었다고 한다.
아키레아의 양부(養父) 레인 루드윅은 그 싸움에서 오본위 백도령 샤르’카스를 다시 봉인하고 수인들을 남쪽 땅으로 이끌었다.
그 징표로 아키레아가 내민 것을 보았을 때, 심장이 뜨겁게 전율하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이건…… 청현(淸絃) 아닙니까?”
그날, 신화시대의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그 마지막 전투의 마지막 순간에.
– 반드시 돌아오겠다.
에누엘이 그 휘하 돌격대에게 남긴 약속의 증표.
에누엘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수인들은 그 약속을 소중히 지켜오고 있었다. 천 년이 두 번이 지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눈물겨운 충정의 이야기는, 수인 모두를 대표하는 대족장이 이 청현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어져오고 있었다.
은청색의 보석은 여전히 우아하고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의 충정을 증명하듯, 그 빛은 고결하고 아름다웠다.
「당시 대족장 그리피온이 내 아버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돕겠다는 서약의 징표로 내준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걸 맡기셨다. 분명 이런 날이 오실 거란 걸 알고 있었겠지.」
불꽃의 날개로, 천지를 검푸르게 삼켜가는 일식의 장막을 찢으면서 한나절 내내 비행한 아키레아의 낯빛은 창백했다.
역사의 수호자였던 홍염에게도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간의 군주 안리달을 다시 봉인하는 것으로 은의 시대와 청동의 시대를 눈부시게 밝혀온 존재.
「이제 네가 해야 한다. 수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건 너다. 오직 너뿐이다. 엘디아 카타(05) 에누엘의 의지를 계승한 자이고, 용현 레인 루드윅의 피를 직계로 타고난 너만이 할 수 있다.」
아키레아는 그렇게 말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맹약의 언덕은 자치령 중심부에 드높이 솟아오른 백산(白山)의 중턱에 위치했다.
이 맹약의 언덕에서 매년 모든 부족의 대표자들이 모여 부족 회의를 가졌으며 중요 의제들을 의결해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키레아의 호출이 있기 전에, 절대 일식에 의해 망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출몰하면서 수인 부족들이 이곳에 모여들고 있었으므로.
수인들이 맹약의 언덕을 지키고 싸울 때, 아키레아가 불꽃의 숨결로 망자들을 불태우면서 카이센을 땅에 내려주었다.
「라미네아의 아들아, 네가 저들과 이야기하라. 나는 절대 심연의 힘을 막고 있겠다. 서둘러라.」
부족장들이 쭈뼛거리며 언덕 아래에 모였고, 산자락 벌판에는 수인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다.
‘가슴이…… 가슴이 요동친다.’
수인 족장들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는 내내 심장이 멈출 줄을 몰랐다.
왜 이곳까지 바로 왔을까?
이들의 선조에게 충성을 받았던 건 에누엘이었고, 또 이들의 선조를 이 땅으로 데려온 건 레인 루드윅이었다.
거기에서 내가 무엇을 했다고?
어떤 자격으로 이들에게 사지(死地)로 향하는 걸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는데.
대체 무엇으로 말을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당신 같은 고귀한 자가 오기에는 너무 누추한 곳이오.”
늑대의 얼굴을 가진 부족장이 말했다. 경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힐난에 가까웠다.
“이곳에는 왜 오셨소? 이미 세계의 멸망은 시작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생물체인 우리는─”
입이 열리지 않았는데. 도저히 말문이 떨어지질 않았는데.
스스로에게도 놀라웠다.
그 힐난에 순간적으로 혀끝이 움직였다는 사실이.
“─추악하지 않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런 장광설을 내뱉을 수 있었는지, 스스로에게도 의문이었다. 한 번 열린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여러분이 왜 추악합니까? 대체 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들의 후손인 여러분들이. 그 후손답게 위대한 삶을 살아온 여러분들이 왜 추악하단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재현 영역에서나마, 저들의 선조와 같은 전장에서 싸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용현의 핏줄에 각인된 유전적 슬픔 때문일까.
울음 같은 말들이.
울음이 터져 나오듯이 입 밖으로 끝없이 흘러나왔다.
“저는 이 전쟁을 끝내러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전장으로 향할 병사들이 필요합니다. 2천 년 전의 그날처럼.”
진성검 샤릴리온을 높이 쳐들자 그 은빛의 검광이 찬란하게 언덕과 그 아래의 벌판을 비추었다.
“샤릴리온……?”
“샤릴리온이다…….”
“샤릴리온이야……!”
거기에 아키레아에게 받은 청현을 날밑에 장착하자, 그 빛은 더욱 강대해졌다.
“여러분이 오늘날까지도 열성으로 섬기는 엘디아 카타(05) 에누엘의 후계자, 엘디아 오메크(06)로서 명하고.”
잃어버린 열쇠를 찾아서일까, 아니면 옛 인연들을 만나서일까, 샤릴리온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또 여러분을 저 하르바도니아에서 이곳으로 인도해낸 용현 레인 루드윅의 직계 후손으로서 간청드리니.”
샤릴리온을 언덕 깊숙이 박는 동시에, 무릎을 꿇고 절했다.
“부디 저를 도우시고, 이제 그만 2천 년 동안 여러분을 속박해온 맹약에서 해방되십시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보상도 줄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꿇어앉아, 눈물로 흐느끼는 것 말고는 없지만.
“무릎 꿇지 마시오.”
그렇게 말한 건 독수리의 위엄을 인간의 육신에 그대로 새긴 듯한 노장이었다.
순간 가슴에 떨림이 일었다.
영혼에 합일된 에누엘의 파편이 뭉클거리며 ‘그리피소른……’이라고 말하려는 걸 감지했다.
“강인하되 눈물이 많은 성격은 그대의 어머니와 판박이구려. 홍염 각하께서 보증하지 않아도 그대의 말이 사실임을 알겠소.”
나중에야 알았다.
그의 이름이 그리프베런으로 그리피소른, 즉 그리피소른의 후손으로 대대로 대족장을 맡아온 일가의 가주라는 사실을.
그리고 ‘검은 여름’ 당시에 어머니의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조들의 업적을 들으면서 자란다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그분은 또 그분의 아버지에게. 왜인지 아시오?”
“……?”
“위대한 부름을 받았을 때, 그 부름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요. 에누엘께서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분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신다면 그건 분명 우리의 힘이 필요하신 것일 테니까.”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또 순간적으로 솟아오른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 기다리겠습니다, 대장.
부름에 응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지로 향하지 않아도 되는데.
– 돌아오시는 그날까지. 설령 그게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 해도.
그런다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데. 누가, 대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가 이들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명령하시는 모든 걸 우리는 모두 행하며, 당신이 보내시는 곳이 어디든 기꺼이 가겠사오니.”
목소리가 그 위로 포개어진다.
다른 수인 전사들의 목소리가, 그리프베런이 읊는 맹약의 외침 위로 하나, 하나, 또 하나.
“선조들이 범사에 에누엘에게 순종한 것같이 우리는 당신에게 순종할 것을 맹세하며.”
그런 목소리들이, 이윽고 큰 아우성이 되어서 이 변방의 땅에서 거대하게 울려 퍼진다.
“또한 빛이 에누엘과 함께하셨듯이 당신과도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그 맹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리프베런이 모두를 대표해 손을 치켜들었다.
“위대한 에누엘 돌격대의 후예들이여, 출정의 포효를 질러라!”
수인 전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산골을 거세게 뒤흔들며 더욱 커져 나간다.
비단 나 혼자만의 인연이 아닌.
저 먼 기원의 시대부터 시작된 모든 인연의 가닥들이 하나로 뭉치며 길을 만든다.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에누엘 돌격대의 마지막 행군을 시작할 시간이다!”
그러더니 문득 샤릴리온의 청현이 강렬한 빛줄기를 쏘았다.
빛은 어느 한 지점에서 파문으로 번지며 차원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빛의 문은 검은색의 고풍스러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그 낯익은 안개가 손끝에 전율을 일으켰다.
‘카렌덴 님……!’
문은 호수처럼, 어쩌면 거울처럼 일렁이며, 그 너머의 광경을 비추었다.
자취 없는 빗발이 흩날린다.
소름 끼치는 신음이 메아리친다.
지천을 뿌옇게 감추는 꿈결의 장막과 이끼에 뒤덮인 석상들과 기하학 구조가 무너진 기둥들, 해저 신전 슈율켈리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명보다도 더 찬란하게 불타는 빛, 베르켄시아의 광휘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몸을 불태워 가면서까지 지켜온 당신의 등불이, 마지막 싸움으로 가는 길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프베런이 그 차원 역장 너머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인요(人妖)들이여! 우리는 에누엘 돌격대다. 옛것과 망자들은 우리가 처리한다! 우리에게 맡기고 계속해서 전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