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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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
어느덧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아까 어슴프레 달이 떠올랐지만 어둠이 본격적으로 찾아드는 것은 지금부터였다. 무신마와 싸운 게 오후 늦게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세밀하게 월승혼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배웠던 능력은 어떤 산악이나 험지에서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고, 갑옷을 입고 자더라도 다음날 몸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는 훈련이었다. 당연히 상대의 흔적을 추적하는 정도는 기본이었다. 모르긴 해도 현실의 특수부대가 지닌 능력에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 놈은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
무신마도 애초부터 월승혼을 없앨 생각이었으니 어느 정도 내공으로 월승혼의 몸에 암경을 쏘아놓은 것이다. 그 때문인지 월승혼은 도망치면서도 토혈(吐血)을 반복했고, 내장에 이르는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다.
나도 요 몇 달동안 연전(聯戰)을 거듭했기 때문에 몸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 오늘은 일부러 몸을 추스리다가 오후에나 움직일 정도로 휴식에 전념했는데도 그렇다. 아마 완전히 회복하려면 한 달은 싸우지 않고 쉬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월승혼 정도라면 처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저벅
점차 월승혼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한창 경공으로 도주하던 놈의 움직임이 현저히 둔해지고, 술시가 된 지금은 반경 100장 이내에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 아니… 멈췄군. 더 움직이지 않아.’
나는 토혈의 흔적이 끊어진 걸 발견하자 신중하게 감각을 돋우었다. 백 장 이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놈이 어디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근처에서 은신하면서 나를 습격할 틈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놈도 무공수련은 제대로 한 게 틀림없다.
명문정파에서는 은신술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전문적으로 습득하거나 가르치는 일이 드물었다. 허나 실상은 어설픈 검술보다는 강호에서 살아남는데 더욱 도움이 되는 것으로 – 고수의 경지에 오르는 단초이기도 했다. 월승혼도 팔왕에게서 최대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원검(元劍)의 결계(結界)!
정신을 집중하자 예전에 익혔던 검의 영역이 쭈욱하고 확장되었다. 달인에게 존재하는 절대영역을 늘이는 것으로써, 은신한 적을 찾아내는 데는 그만이었다. 더욱이 한 번 찾아낸 상대에게는 거의 반사적으로 일격을 가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거기에 심안이 더해지니 천하의 어떤 고수도 내 이목을 피하기는 힘들다. 무살(無殺)의 경지에 오른 살수라면 몰라도, 그런 인물은 이백 년 전 이후로 출현하지 않았다.
월승혼도 예외가 아니었다. 본인이 그리 몸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찾아낸 월승혼은 내게서 삼십 장 밖의 절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수풀과 바위로 가려져서 몰랐지만, 놈은 생각보다 내게서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 ……”
나는 굳이 살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뒤를 따라잡았다. 순간적으로 검끝에 구체처럼 뭉친 살의가 모아지며 살상력을 갖췄다.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으로 ‘화풀이’라는 세 글자가 떠올랐다.
부웅
내가 십 장 이내까지 접근하자 월승혼이 입을 열었다.
” 예상대로군. 이 다음의 ‘3초’는 어떻겠냐.”
그 말은 원래라면 내게 큰 혼란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3초를 운운하고, 이미 내 행동을 예상했다는 말 만으로도 심기를 제압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 말이 허세가 아니란 걸 아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월승혼은 몇 가지를 간과했다.
나는 이미 용안의 능력이 무엇인지, 놈이 지닌 무기무래라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놈은 도발해서는 안되는 상황이라는 점. 거기에다가 이미 내 살의는 그런 말에 현혹될 정도로 얕지 않다는 점이다.
즉.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은 그저 개인적인 화풀이다.
스겅 –
형태없고 단조로운 검강이 한 차례 월승혼이 서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놈은 무기무래를 쓸 필요도 없다는 듯 피해냈지만, 갑자기 자신의 어깨가 붙잡히는 것을 깨닫고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 이건…!!”
네놈은 이런 공격쯤은 용안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나예린의 용안이 독심(讀心)과 어렴풋한 예지능력에 머무는 반면, 놈의 직계용안은 몇 초 이내의 미래를 읽어들이는 사기적인 능력이니까. 신체능력만 따라주면 어떤 공격이라도 피할 수 있으니까.
허나 놈은 내 공격이 설마 자기 능력으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놈이 알고 있는 내 실력은 전에 만났을 때, 처참하게 당했던 수준.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이미 형태없는 의령수가 놈의 좌측을 압박하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놈은 그 때문에 원래 피하려 했던 방향이 막히면서 순식간에 유운검법의 예기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월승혼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 흐, 흐아악!!”
놈의 안구가 조금 돌출되면서 급히 무기무래를 시전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 흥.’
하지만 이미 두 번씩이나 당한 수법이다. 나는 그 시간차를 읽고, 찰나의 순간에 빠르게 손가락 끝의 혈맥(血脈)을 터뜨려서 핏방울을 흘렸다. 그리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시간차를 느끼며 고요히 무기무래의 세계로 진입했다.
스으으
월승혼은 그 침묵의 공간속에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놈의 입이 열리면서 제멋대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더없이 행복하고 타성에 젖어서, 지켜보기조차 싫을 정도였다.
” 흐흐… 하하하하하!! 멍청한 놈! 그렇게 당하고도 내게 덤벼들다니!!”
시간이 삭제되는 이 공간 –
나는 남아있는 의식을 이용해서 내 손가락 끝에서 흐르는 핏방울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무기무래 속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이전과 같이 검술을 전개하는 내 몸의 형태가 마치 잔상처럼 공간에 흘러나왔다.
“지금 네가 본 것은 미래의 너 자신이다. 몇초 과거의 네가, 미래의 너 자신을 본 거다.”
놈의 이죽거림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 동안에도 핏방울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 … 결과뿐이다!! 이 세상에는 “결과”만이 남는다!”
뚜욱 뚜욱
시간이 삭제되는 순간에, 놈은 자아도취되어 지껄였다.
” 시간이 날아가버린 세계에서는 ‘움직임’은 모두 무의미해지는 거다! 그리고 나만이 이 움직임에 대응할수 있다! 네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두 다 보인다! 이것이 이 몸의 능력!”
자비를 베풀듯이 놈이 내 목젖으로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적멸존자의 오행혈마공이 깃들어 있어서, 지금의 내 방어력으로 막아내기에는 불가능하다. 놈의 무공수준은 낮지만 – 무공수준과 공격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잘 가라.”
그 순간 무기무래(無機無來)의 세계가 끝났다.
보통이라면 이 순간의 기억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다가 놈의 공격을 맞고 즉사하고 말 것이다. 놈은 무기무래의 세계에서 남을 공격할 수 없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무기무래의 시간 동안에는 나도 놈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파바바바밧
나는 놈의 손이 내 목을 공격해 오는 그 짧은 순간에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손끝이 터져서 흘러나오던 핏방울이, 무기무래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기세로 떨어지는 것을!
‘ 생각대로군.’
잠깐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콰자작
” ……?!?!”
놈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면에서 약간 튀어올랐다. 놈이 내 목젖을 공격하기도 전에 튀어나간 내 주먹이 놈의 복부를 명치부터 올려쳤기 때문이다. 나는 무표정하게 놈의 멱살을 의령수로 쥐어잡으며 말했다.
” 장괘장권구식(長掛長拳九式) 목어장령(沐御藏靈).”
놈의 표정이 고통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놈은 설마 자신이 반격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이런 간단한 초식에 당해버린 것이다.
쉬리릭
” 수의포(收意捕) 괴지족(壞地鏃) 혼중보뢰(混重普磊) 찰궁궁(札窮弓).”
수의포로 잘게 모아진 손가락이 놈의 어깨뼈를 한 합에 부쉈다. 그리고 채찍처럼 날아간 발차기가 월승혼의 대퇴부를 강하게 찔러서 균형을 무너뜨렸고, 혼중보뢰의 일장(一掌)이 신장과 맹장에 큰 충격을 가했다. 마무리로 철산고와 비슷한 수법으로 등벽치기를 한 번 가해주자, 월승혼은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촤좌작 –
” 카아아악!!”
먼짓바람과 함께 데굴데굴 구르던 월승혼은 헝겊인형처럼 추욱 늘어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사용한 것은 모두 종남파의 기본권공, 장괘장권구식에 포함된 기초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단련해 온 덕분에 하나하나가 필살(必殺)의 위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바로 쾌검으로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권을 써서 놈을 침묵시킨 것은, 아직은 놈에게 빚을 갚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풀이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야 하는 법이다.
월승혼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힘겹게 들며 말했다.
” 흐… 흐억… 대… 대체 어떻게?”
” 그 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네 능력을 연구하다가 가설이 떠올랐다.”
내가 한 걸음 옮기자 월승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놈의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내가 그 동안 겪었던 일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 네 능력은 시간을 삭제하는 것. 하지만 그게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네가 나를 얕보고 진짜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시간을 정지하는 능력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신마와의 대결에서만은 너도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시간삭제보다는 시간정지를 쓰는 게 당연할테고, 그 일전에서 나는 네 능력이 시간삭제 하나뿐이란 걸 확신했다.”
” ……”
월승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 그래도 만에 하나를 위해서 일부러 실험을 했다. 핏방울을 이용해서.”
” 피… 핏방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시간이 삭제된 동안 사람의 기억은 없어진다. 결과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뭐겠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핏방울이 우수수 떨어져 있는 것이다. 시간정지가 아니란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실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검만큼 혼신을 쏟아붓지는 않았지만, 아직 약했던 시절에 필사적으로 강해지기 위해 단련했던 주먹이다. 이름은 없지만 강고하게 단련된 권법도 있었다. 나는 이걸로 놈을 때려눕힐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월승혼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쿨럭!”
잠시 피를 토하던 월승혼이 아연해했다.
” 너처럼 재능없는 인간이… 겨우 며칠 전에 당했던 내 능력에 거기까지 접근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라. 천재라도 나의 이, 무기무래는, 그렇게는 간파할 수 없단 말이다…!!”
” ……”
” 흐흐흐…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놈은 살의와 증오가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받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나를 빈사상태로 몰아갔던 대적이 이렇게도 작았는가 –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재차 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예의상 한 마디를 해 주었다.
” 너는 모르겠지만, 재능없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타고난 재능을 지닌 자라면, 나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하지 않고도 금새 무기무래의 파해법에 도달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처음 월승혼을 맞닥뜨린 날에 어떻게든 이겼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재능의 차이는 불합리하니까.
나처럼 온갖 시행착오와 가설, 경험과 배짱을 쏟아붓지 않아도 될 테니까.
도리어 나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재능없는 사람이 열 배의 노력을 다해서 간신히 도달한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놈의 능력인 무기무래처럼 ‘결과’가 전부인 셈이다.
그리고 악전고투속에서 얻어낸 내 경험과 생각은 소중한 자산이 되어서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된다. 그 결과가 보잘것 없다고 할지라도 – 지금은 그저 그걸로 족한 것이다. 이 씁쓸함을 모르는 자는 결코 대성할 수가 없다.
” 오… 오지 마!!”
월승혼은 그러더니 갑자기 눈가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내게서 뭘 더 뺏아가려는 거냐!!
스승이고, 동료고 모조리 뺏아가려는 거냐! 이젠 나까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 그게 무슨 상관이냐.”
” 뭐… 뭐라고.”
”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넌 나에게 빚을 졌고, 난 그걸 갚는다. 네 사정 따위 내가 알 필요가 없지 않은가?”
” ……”
지금 상황만 본다면 – 오늘 스승과 스승의 동료를 잃은 불쌍한 도주자를 내가 없애려는 것이 된다. 실제로도 그렇고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다.
스승을 잃은 날에 본인마저 죽는다면 강호에서 그 이상 억울한 일은 없겠지. 일맥의 대가 끊어지는 셈이니 원혼(怨魂)이 되어도 할 말 없다.
허나 오늘의 상황은 월승혼 본인이 자초한 게 아닌가.
그 때문에 하은천은 도주조차 선택하지 못하고 제자때문에 죽음의 길로 가야 했다. 싸우다 죽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팔왕은 크게 개의치 않았겠지만 개죽음은 틀림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은천은 죽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황당해하는 월승혼에게 못을 박았다.
”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도 마라.”
월승혼이 욱해서 노려보자 나는 고요히 확신을 말했다.
” 네 말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스승이 죽은 것치고는 너무 가볍지. 비련의 주인공치고는 너무 어설프지.”
” ……”
” 나는, 네놈이 지금 슬프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