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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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
월승혼은 내 말에 침묵했다.
나는 그 순간, 녀석의 표정을 엿보고 흠칫하고 말았다.
‘ 저 녀석?’
지금까지는 그저 어렸을 뿐이다. 말 그대로다. 터무니없는 능력을 지니고서 제멋대로 휘두르기만 하는 상황을 반영하듯, 조금만 자기 뜻에 어긋나면 화를 내거나 평정을 잃었다. 그러한 인상(人狀)이 얼마간 얼굴에 투영된 게 사실이다. 누구라도 월승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그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놈은 나에 대한 분노와 증오, 곤혹만 가득한 표정을 지워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무미건조한 살의밖에 없다. 나는 사람의 인상이 확 달라지는 것을 깨달으며 월승혼을 경계했다.
인형처럼 새하얗게 분한 듯한 얼굴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으며 싸늘한 느낌을 한층 더하게 했다. 이윽고 월승혼은 밋밋하고 조용하게 대화의 서막을 열기 시작했다.
” 너, 방해군. 정말로다.”
그 말에는 인위적으로 숨겨왔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월승혼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히 상체와 팔을 일으켰다. 피투성이가 된 몸이 신경쓰이는듯 한 번 팔을 휘저은 월승혼의 말이 이어졌다.
” 이름은 – 아 그래. 유천영이라고 했던가? 지금부터는 기억하도록 하지.”
” ……”
놈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그 말은 장탄식 같기도 하고, 웃음같기도 하고, 흐느낌같기도 했다. 인간의 성격이 이 정도로 달라지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라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 [당분간]은 이런 성격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말야, 이미 눈치채버린 인간이 생긴 이상 더 해도 허사 아니겠나. 그러니까 내 1차계획은 실패해버렸다는 거지. 그게 표면적인 실패가 아니라 계획을 전면수정해야 한다는 건 예상 외지만. 그만큼 내가 너를 신경쓰지 않은 게 패인이었던 것 같아.”
그 말은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나긋하기도 했고, 뜻밖에 조용했다. 보통이라면 이런 어조의 말을 처음 듣는다면 – 친절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단순한 연기로 되는 일이 아니라서 꺼림칙하기까지 했다.
” 뭐, 실수야. 적어도 지금의 이 몸이라면 그 사실 정도는 인정할 수가 있어. 정점에 올라서기 위해서 한두번 넘어지는 것쯤 개의치 않기로 했으니까. 그래서 내 능력을 제약하면서까지 그 인격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지. 일단 좋든 싫든간에 위장이란 건 필요하기 때문이었지.”
횡설수설 두서없이 보이지만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놈은 그 치기어린 성격을 ‘연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스승이고 친구고 동료고 모두 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나는 어이없음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 그런 말로 대충 때우고 싶어하는 건가? 허세는 그만 부려라.”
” 진입자.”
잠시 내 말문이 막혀 버렸다.
” ……”
” 알겠어 – 너도 진입자라는 거였다. 당산과 연화가 화산에 나타났을 때부터 신경쓰였는데, 이제 알겠다.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던 거군. ‘그 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너와 손을 잡으려 했던 거구나.”
한순간에 보지도 않고 내막을 모두 추리해 버렸다! 저런 통찰력과 예지는 놈에게서 볼 수가 없던 모습이다.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한 월승혼이 느릿하게 내게 손을 뻗었다.
” 괜찮아. 정~말이야. 이 정도 시련이라면 도리어 이 몸이 바라던 바다.”
” 넌…”
” 왜 그래?”
월승혼이 내 반응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악의나 살의도 섞여있지 않은 순수한 이질감을 느끼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친구가 이상한 짓을 할 때 정신이 이상하지 않은가 살펴보는 사람같았다.
이어진 월승혼의 말에 나는 잠시 충격에 빠졌다.
” 설마 진심인 건 아니겠지, 종남파의 유천영 씨.”
내 삶과 노력, 존재가치를 통째로 부정해버리는 말.
” 무슨… 말이냐.”
” 무슨 말이냐니? 아, 설마.”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월승혼은 침묵했다.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 기묘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서 멀뚱히 놈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은 손을 쓸 기분이 나지 않는다.
잠시 후 월승혼이 폭소했다.
” 아하하하하하하!!! 그런 거야? 너 설마 능력이 열 배의 시간이라느니 그런 거였냐? 아 그러면 다 이해되잖아!! 아 미치겠군!! 아하하하!”
몰랐던 걸 깨달은 듯한 말이었다. 놈도 진입자라서 당산이나 연화처럼 어렴풋하게 열흘의 하루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아닐 때 싸웠던 일도 희미하게나마 기억의 잔상으로 남아있는 것이리라.
” … 각오해라.”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놈이 지금 이렇게 나온다 한들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열흘의 하루동안 놈의 밑바닥까지 알아내서, 마지막날에 확실하게 복수해서 마무리짓는 것. 그것이 가장 나다운 일일 것이다. 지금 놈이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도리어 내가 좋은 일인 것이다.
월승혼이 눈을 작게 뜨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들었던 것 중에서 처음으로 진실된 감정이 들어있는 말이었다.
”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무신마를 죽이든 못 죽이든, 하은천이 죽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고. 어차피 내가 폭왕의 허언과 용안을 지닌 이상 언제고 패자(覇者)의 위치에 오를 텐데 무슨 상관일까? 이번 일은 그냥 여흥이었을 뿐이야.”
” 여흥?”
” … 있잖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게임에서 치트키를 쓰거나 에디터를 써서 스스로를 강화하게 되면 – 같은 수준의 다른 녀석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지지. 그러면 이 능력치를 가지고 최강에게 도전해볼까, 하는 정도는 한 번쯤 생각하지 않겠냐.”
이 놈도 권강한처럼 나와 같은 시대, 같은 나라 출신이다.
그 사실에 까닭없는 구토감이 치밀어올랐다.
” 개소리.”
나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말을 하고보니 말이 내 감정을 거세게 옥죄었다. 놈이 한 말은 왠지 내 인생에 대한 중대한 모욕으로까지 느껴졌다. 나는 불살검을 놈의 목에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 개소리 하지 마라.”
난 누군가에게 보상받기 위해서 내 평생을 무예의 길에 바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다. 모든 노력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노력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승혼의 지금 말은 용서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나만 노력하는 게 아니다. 이 순간에도 뼈와 살을 깎으며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게임이니 뭐니, 뜬구름 잡는 말로 모욕받아도 좋을 정도로 가벼운 인생이 아니다.
이 놈을 죽인다.
망설이지 않고 목을 날려버리기로 했다. 오늘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더 살려둬서 좋을 것도 없겠다. 내 검에 살의가 흐르자 월승혼은 잠시 움찔하더니 큭큭하고 웃어대었다.
” 크큭. 유언 한 마디 남겨도 되…”
” 아니.”
스걱!!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베어버렸다. 염도나 빙검조차 반응못하고 죽을 게 확실한 쾌검(快劍)이었다. 말 그대로 알고 있어도 피할 수가 없는 일격이라, 놈이 무기무래를 쓰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다.
부웅
역시 약속했던 것처럼 무기무래가 공격과 동시에 펼쳐졌다. 용안으로 공격순간을 예지했기 때문이다. 한끝차이로 내 공격을 피한 월승혼은, 무기무래의 공간 속에서 내 옆을 걸어서 지나쳤다. 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야속하군.”
월승혼이 내 등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검법의 궤도를 살짝 피해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너도 무기무래의 시간동안 의식이 남아있군. 아까 실험하느니 뭐라느니 해서 속을 뻔 했지만, 그래서야 이 시간동안 내가 했던 말까지도 기억할 순 없는 노릇이지. 보기보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네.”
벌써 눈치챘다.
그 말대로 그냥 파해할 수도 있는데 일부러 손끝에서 피를 터뜨린 실험을 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놈에게 조금이라도 비밀을 숨겨서 이길 여지를 남겨두려는 것이다. 놈이 속아주었다면 좋았겠지만 바로 알아채 버렸다.
지금의 월승혼은 뛰어난 전투논리의 소유자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까까지 상대하던 그 인간과 동일인물인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 당산과 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 … 이런 의미였군.’
나는 상대가 괴물이란 사실을 실감했다. 강대한 적이라기 보다는 괴이(怪異)에 가깝다. 단지 역할놀이를 하고싶다는 이유만으로 인격을 바꾸고, 때로는 무모한 짓도 하고, 반격당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인간. 그리고 그 기저에는 결코 자신이 질 리가 없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 그러면 무기무래와 용안만으로 싸우는 건 그만두지.”
슈우욱!
말이 끝나자 월승혼은 오 장 밖으로 가 있었다. 놈은 내게 근접공격을 가해도 맞찌르기를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안전하게 싸우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놈을 내버려 둘 수록 불리해진다.
검강이 빠르게 사출되면서 놈의 목과 심장을 노렸다. 소리소문도 없는 공격이라 피하기 힘들 줄 알았는데, 놈은 용안을 이용해서 공격을 예지하며 피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 폭왕(暴王)의 허언(虛言).”
늦다.
그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나는 전신사방으로 검강의 막을 두르듯이 공격하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지해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도록 공격을 짜면 그만이다. 월승혼이 서 있는 공간으로 수십 개의 검강이 그물처럼 퍼져나가자 먼지도 빠져나가기 힘든 살육공간이 되었다.
월승혼의 입꼬리가 한 쪽만 크게 올라갔다.
” 사륜(寫輪) 윤회(輪回) 백(白) 동시개안(同時開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