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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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신(雷神)
율령자들은 율령전에서 삼십여 장 이상 떨어진 채로 동향을 감시했다. 사실 감시라고 보기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보통 감시라면 십여 장 정도가 보통이었다. 이래서는 고수의 안력으로도 상황을 세세하게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태월하는 그런 불만을 일축했다. 실력으로 천무삼성보다 반 수 정도 낮은 그로서도 월승혼이 사용한 수법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감시거리를 좁히다가는 [쓸데없는] 희생이 늘어난다. 천겁대전 당시에 위천무를 먼 발치에서 보고 살아남은 태월하만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천무삼성이 찾아왔다. 그들에게 연락을 빠르게 보냈기 때문이다. 천무삼성은 임시로 마련된 지휘소 건물에 들어오자 태월하에게 인사를 했다.
” 서로 바쁘군.”
” 별 말씀을.”
그들은 천겁대전 당시에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전우였다. 사실상 검존이 빠진 자리는 태월하가 어둠 속에서 메웠다. 다만 태월하가 천무삼성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 자신이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태월하, 상황이 어떻소?”
검성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의 눈은 약간 초췌해져 있었다. 비류연 일행과 함께 대공자의 음모를 막기 위해 따라다니느라 바빴고, 동시에 팔왕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생각할 게 너무 많아졌다. 한 가지 뿐이었다면 그의 기력이 쇠하진 않았을 것이다.
” … 일단은 [그]의 후예가 아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라는 말에 천무삼성들이 약간 눈에 이채를 띄었다. 하지만 태월하같은 사람이 말꼬리를 흐린다면, 그리 큰 확률을 생각치 않는다는 뜻. 태월하의 안목을 생각하면 괴한의 출신지가 범상치 않다는 걸 의미했다.검후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 몇 수인가요?”
그 말은 뜬금없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4인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과연 그 괴한은 당대의 천무삼성에 비해 몇 수의 차이를 두고 있는가.
검후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모두가 이 사안을 중대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평소 성격이라면 율령전으로 쳐들어가서 합공해서라도 때려잡을 것이다. 하지만 팔왕의 출현이 천무삼성에게 신중함을 가져다 주었다.
태월하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머리를 휘젓고, 다시 턱을 괴었다.
입을 세게 앙다물던 태월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실력 자체는 나백천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자는 위험하오.”
” 위험하다고?”
” 이곳의 율령자는 천겁대전 때 살아남은 고수들이고, 대기중인 무인들은 진천(震天) 출신의 절정무인임을 아실 테지요. 허나 피해는 총 삼십이인이 사망하고 십오인이 부상당했습니다. 무위(武爲)가 받쳐주지 않는데도 이런 참상이 일어났습니다.”
” 흐음. 술법(術法)을 부렸나.”
도성 하후식이 끙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사실 도성의 본가는 고대부터 이어져 오는 무림의 명문가였다. 선조 중에는 뛰어난 술법사가 배출되기도 했고, 한때 강호를 피로 물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후식은 무예만큼이나 술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태월하가 지휘봉을 손바닥에 탁 내리며 말했다.
” 일단 척후를 한 명 보내보았습니다.
척후라기보단 직접 찾아왔고, 본인의 의지가 강해서.”
” 무모하군.”
검성이 살짝 눈꼬리를 찌푸렸다. 들은대로의 실력이라면 한 명으로 상대가 될 턱이 없다. 태월하가 자기 판단으로 아까운 무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난의 눈초리는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태월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 때 검후가 물었다.
” 그 무인의 이름은 무엇이죠?”
태월하는 저 멀리에 있는 율령전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태월하는 까닭없는 감상을 느끼며 말했다.
” 유천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무삼성과 태월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전투에 안력을 집중했다.
전투시작.
나는 월승혼의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들어갔다.
뛰어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법을 발휘하면 한 호흡도 안되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지만, 섣불리 접근하면 놈의 능력에 말려들어서 치명상을 입게 된다. 얼음칼날로 만들어진 방벽 같은 결계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하다.
쩌적…
서릿발같은 검계가 율령전 중앙에 금을 만들어 내었다.
월승혼이 태사의에서 일어나며 오행혈마공을 끌어올렸다.
오행혈마공
화염천(火炎泉)
십성공력(十成功力)
화르르륵
월승혼의 전신에서 시퍼런 불길이 이글거렸다. 저것이 오행혈마공에서도 극악하기로 유명한 화염천이다. 동방의 전설적인 마혈(魔血), 붉은것보다 더욱 붉은 것(紅赤朱)에 비견될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의 오행지기를 인간의 몸으로 다루는 것이니 위력이 막강한 것은 당연하다.
솟아오른 불길은 일전에 마주친 통천적룡처럼 가공할 속도로 내게 쇄도했다. 전에 보았던 화염천의 힘에 비해 현저히 강하고 빨라져 있었다. 나는 반경 4장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는 장관을 눈 앞에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 실력이 늘었군.’
놈은 적당히 단련시킨 육체에 터무니없는 고급기술을 이것저것 우겨넣은 잡스러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워낙 기술의 기본능력이 좋아서 강해 보였지만, 일기(一技)로 경지를 이룬 달인 앞에서는 광대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나름대로 기술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숙련된 고수였다.
이런 현상은 단기간에 격렬한 실전을 거친 고수에게 나타난다. 얼추 느껴지는 경험치는 스무 번 정도의 결전이다. 월승혼이 언제 그런 싸움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콰둑
의령수(意靈手)가 정면에서 불꽃을 잡아서 내리눌렀다. 형태없는 것, 실체없는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의령수는 당연히 화염천을 붙잡을 수 있다. 의령수의 파동에 눌린 화염천 공력이 산산히 흩어지자 월승혼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놈은 갑자기 뭐라고 중얼거렸다.
” 폭왕의 허언. 나 전능을 얻는 허언을 읊노라.
와라 강금암기(綱金暗器).”
챠킹!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가위인지 낫인지 모를 쌍수사슬이 생겨났다. 금빛으로 찰랑거리는 쇠사슬에 기(氣)가 실리자 빛이 번뜩였다. 당문에서나 볼 법한 본격적인 암기라서 나는 약간 황당했다.
‘ 뭐지?’
강금암기
제 5형
암(暗)
휘리릭하며 갑작스럽게 암기가 형태를 바꾸었다. 그러더니 활의 형태를 띄더니, 월승혼은 그야말로 0.1초만에 활시위를 당겼다. 빈틈은 많았지만 월승혼의 의도를 알지 못해서 일단은 활에서 튕겨나온 기운을 쳐 내기로 했다.
피이잉
활에서 튕겨나온 무형의 기운이 내 검강에 닿이자 짧은 파공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나는 터져나간 것의 정체가 은방울같은 고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아마 허공의 수분을 그대로 화살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필살기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어설프다.
그 순간이었다.
월승혼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 큭큭큭! 넌 이걸로 끝장난다.”
” …..?!”
멈췄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전신의 감각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감각을 통제하는 [시간] 그 자체가 현저히 느려져서, 도저히 처리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 무기무래를 상대할 때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동시에 세계가 흑백으로 물들며 내 몸이 거미줄에 묶인 것처럼 딱 멈춰 버렸다. 내공을 폭발시키며 용을 쓰려 해도, 통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내 몸은 이 시간에 갇힌 사진처럼 정지해 버렸다.
‘ 설마… 그럴 수가…!!’
나는 마음속으로 약간 절망을 느껴 버렸다.
이건 내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다. 그토록 오지 않았다면 하는 상황.
지계(止界).
놈은 시간을 다루는 궁극의 법칙을, 결국 깨닫고 만 것이다. 예전에 돌아다녔던 세계에서도 이 능력을 지닌 자는 가히 무적에 가까웠다. 무기무래와는 달리 시간을 멈춘 동안에는 월승혼은 자유자재로 상대방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다.
본신의 실력만 해도 정천무림맹주와 대등한 월승혼에게 2초만 주어져도, 영겁만큼 긴 시간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멈춰버린 시간에서 그저 감각을 높여서 정면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시간이 멈춰버린 세계에서도 의식은 있다.
월승혼이 심적권청의 찰나지간에 말했다. 이건 현상계의 시간과 달리 극도로 빨라진 의식세계에서만 들리는 말이다.
” 네게 절초를 먹이기에 3초는 차고 넘치지.
하지만 그 시간동안 네가 움직일 수 있을까?
그걸 간과할 수 없어서 말이다…”
월승혼의 강금암기, 암(暗)이 1초만에 내 미간을 노렸다.
” 예외없이 이걸로 끝장내 주마. 율령자를 죽이면서 시험해 봤거든. 이 강금암기 5형은 호신강기도 두 발이면 박살내고 꽂히는, 혈마전만큼이나 강력한 화살이다…!!”
퓨웅
말이 끝나자 3초에서 반의 시간이 지나며 얼음화살이 내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그 급한 순간에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장난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서, 정신줄을 놓아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그 기묘한 감각이 미간의 한 점을 중심으로 타원처럼 퍼져 나갔다. 마치 뇌에 심장이 있어서 펄떡거리는 것 같았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듯이 섬광이 눈 앞에 비치는 듯 했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을 때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기(氣)가 처음으로 명동했다.
아니 – 실상은 의기(意氣) 그 자체로 뭉쳐진 의령수가 반응했다. 내 살고 싶다는 의지가 찰나의 시간에 공간을 움직이며 의령수를 구현시켰다. 거리가 부족해서 월승혼을 공격할 순 없었지만, 날아드는 암시(暗矢)를 막아내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파악!
” ……!!”
의령수가 움직여서 순식간에 암시를 막아내자 월승혼의 표정이 흔들렸다. 놈은 식은땀 한 줄기를 뺨으로 흘렸다. 마치 최악의 선택을 피해낸 듯한 행복한 표정이 홍조와 함께 떠올랐다.
놈이 가까이 와서 절초를 쓰려 했다면, 내 의령수에 머리가 박살내서 죽었으리라.
그리고 시간이 정지된 세계가 풀렸다. 놈의 말대로 3초가 한계인 듯 했다.
월승혼은 강금암기를 들고서 큭큭 웃었다.
” 크크… 역시 생각대로야. 네놈은 시간능력에 저항력이 있어.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가지고 있어.”
” ……”
”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건 의념(意念)으로 만들어진 그 손뿐인 것 같군…? 그렇지 않다면 남은 1초 동안, 나를 공격해서 목을 베려 했을테니 말이다.”
” 어떨까.”
나는 몸을 추스리며 긴장했다. 긴장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점차 암울한 심정이 커져갔다. 이렇게 되면 월승혼에게 선공을 가하는 건 자살행위가 된다. 시간정지가 풀리는 틈을 탄다고 해도 [무기무래] 때문에 막혀 버린다.
사실 의령수를 발동하는데 적지 않은 정신력이 소모되었다. 원래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만, 시간정지 동안에 발동하면 열 배 이상으로 소모도가 컸다. 자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월승혼에게 들키면 그대로 끝장이다.
‘ 이 거리를 [한 걸음]만 좁힐 수 있으면…’
내가 월승혼을 반응하지도 못하게 일격에 끝장낼 수 있는 거리는, 지금부터 딱 한 걸음을 앞서야 한다. 하지만 내가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월승혼은 이미 예지능력으로 감지하고 피하고 있을 것이다. 이 한 걸음을 좁히기 위해서는 사선(死線)을 넘어야만 한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간단한 전략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무턱대고 돌격하라는 뜻이 아니다. 실패할 경우에는 살만 주고 연이어 자신의 뼈가 깎일 위험이 크다. 그에 적절한 상황을 골라서 배짱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나쁜 전략이다.
후우웁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전신에 힘이 압축되고, 내공이 부드럽게 전신에 퍼졌다. 전에 없이 강고한 태을강기의 호심진기가 밝은 빛을 띄었다. 놈의 말대로 강금암기의 화살이라고 해도 일격은 견딜 수 있다.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월승혼이 입을 뒤틀며 웃었다.
” 한 대 정도는 맞아주겠다 이거지? 그렇게 마음대로 될까.”
좋고 싫고는 상관없다. 방법이 없을 뿐이다.
스으
내 눈빛을 정면으로 노려보던 월승혼의 손이 호조(虎爪)의 형태를 했다. 놈의 자세가 바뀌는 걸 보면, 다른 대응을 생각한 듯 하다. 용안의 예지력으로 만들어낸 자세라면, 월승혼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최적의 움직임이 분명하다. 이래저래 내게 유리한 점은 거의 없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복잡한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상식(無常式)
구결(口決)
이십구자(二十九字)
饒究經得八萬劫
難免一朝落空亡
一粒粟中藏世界
半升金當內煮山川
이 구결을 바탕으로 나는 무의식에서 선(禪)을 얻었고, 천둔의 경지까지 올랐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의기의념을 다루는 천둔이야말로 도가절학 중에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상식 천둔까지 깨달은 다음에는 내 몸이 반쯤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직후에 얻은 패배와, 조롱.
[ 백식관음 ] [ 그 무공은 철환교만큼이나 쓸모없구나 ]그리고 의문.
[ 당신이 추구하는 극한의 무란 무엇입니까?]……
나는 월승혼의 시간능력에게서 혼원(混元)이 보호해 준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방금 전에 의령수가 발동한 것은, 분명히 무상식의 묘용이었다. 정신세계 그 자체를 통찰하는 경지가 내 몸을 휩쓸고 갔을 때의 전율이란!
방금 전의 감각으로 나는 확신했다.
‘ 있어! 심검을 초월하는 뭔가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무상식은 미완성의 절학이다.
무상식 천둔은 완성된 게 아니다. 반드시 [위]가 있다…!!
그 감각은 말랑말랑하게 머릿속에서 가지를 피웠다. 그리고 한도 끝도 없는 돈오(頓悟)의 세계로 정신을 이끌고 들어왔다. 감각이 점차 사라지고 생각도 사라지고, 전신이 끝없는 오탁의 바다로 침수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다.
이건… 무섭다.
” 헉!”
나는 가공할 공포에 휩싸여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마에는 구슬땀이 흐르고, 눈 앞에는 월승혼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찰나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엄청난 상념이 지나갔다.
잠깐 무섭다니?
이건 깨달음을 얻는 과정, 내가 더욱 강해지는, 그래서 천년검로에 이르는, 그런 것이다. 꼭 필요한 거다. 그런데 이게 왜 무서운 건가? 내 생각은 어째서 사라지고, 왜 공포가 느껴지는 걸까?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포조차 느껴질 이유가 없지 않는 건가?
잠깐…
잠깐만.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잖아.
그러면 깨달음을 얻은 다음엔 어떻게 되지?
자신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 깨달음이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심지어 살아왔던 모든 세월이 깨달음이란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깨닫기 전의 나는 순전히 어리석은 멍청이에 불과해서, ‘나’를 분리시켜서 생각해야 되는 건가? 깨달음은 시간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말이 안 되잖아.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서…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난 그저 싸우기만 해 왔다.
아.
깨달음은 목적이 아니야.
내가 순간순간 뭔가를 깨닫고,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순간에 – 목적이 깃든 순간 그것은 그저 싸우기 위한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깨달았을 때는 선승이라도 된 것처럼 초탈했다가도, 결국 나는 지금도 싸우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 ?
지금껏 많은 적과 싸워 왔지만, 그건 모두 내 자신이 만들어낸 적이었다.
내가 이루는 살기와 목적이 만나는 이 모두를 적으로 만든다.
난 강한 게 아니라 어설픈 것이다.
” 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미친듯이 소리를 토해 낸다.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사자후조차 아닌 광성(狂聲)이었다. 내력도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침 자체가 자연에 흐르고, 인생을 녹이는 유맥처럼 내면에 감돌았다. 몸도 마음도 결국 허물에 지나지 않은 걸 느끼며 그저 이성을 녹이는 데 집중했다.
몇 방울의 精血(정혈)이 모태 안에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 마치 우유가 결집된 상태와 같았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작용이 무너지고 육감(六感), 심지어는 의념을 집중하는데 필요한 칠감(七感)조차 죽어서 묻혀버린다.
자의식조차 버린 상태에서 끝도 없이 묻혀 들어갔다.
이것은… 영겁의 우리(籃)인가.
어.
” 멍청한 놈!”
퍽하고.
몸이 터지듯이 날려간다.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