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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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음(血觀音)
검군은 칼날로 벼려진 이슬을 먹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내쳐지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조차 위안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하고 고된 삶이었다. 문외장로(門外長老)급의 위치는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제각기 문파에서 어렸을 때부터 기재로 불렸던 자들이다.
일호(一號)의 본명은 양을기(陽乙棄).
무당파 본산에 다섯 살에 입문해서 일곱 살에 태극류(太極流) 검술전수를 허락받았던 천재였다.
양을기의 위업은 이후 삼절검 청흔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도 이뤄내지 못했다.
그는 천재였던 탓에 검군에 뽑혀서 열 살 무렵, 종남산에 오게 되었다.
이호(二號)의 본명은 예준화(刈濬嬅).
객관적으로 보면 가장 뛰어나게 곱상한 외모를 지닌 자였다. 예준화는 형산파 장문인의 숨겨진 자식이었는데, 뒷소문을 두려워한 형산파 장로들의 [뒤처리]를 피해서 종남산에 도망왔다.
그 때문인지 한(恨)이 깊게 느껴지는 자였다.
역천지공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아마 형산파 비전심결(秘傳心訣)인 신룡리염탄(神龍裏念歎)을 익혔기 때문이리라. 정파의 역천지공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기공(奇功)으로 천하에 이름높은 비결이다.
삼호(三號)의 본명은 교청(嬌淸).
남해신녀문(南海神女門)에서 중원진출의 대가로 검군설립에 협력하기 위해 보내 온 검재(劍材)였다. 교청은 검군에 등록된 그 날, 이름과 소속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호(四號)의 본명은 남궁우현(南宮優弦).
남궁세가 출신으로, 천무학관의 주작단장인 남궁상(南宮翔)보다 나이가 두 살 많다.
그러나 남궁우현의 아버지가 임무중에 흑도고수의 손에 당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 버렸고, 구출된 남궁우현도 큰 부상을 입어서 성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남궁우현은 말을 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검군이 되기를 선택해서 지원한 인물이었다. 장애인으로서 남궁세가에서 받을 멸시와 고독을 견디느니 검귀(劍鬼)가 되어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 ……”
처음부터 검귀가 되고자 태어난 자는 없었던 셈이다.
나를 제외하곤… 아니 나조차도.
나는 태월하에게 들었던 검군의 신상명세를 생각하며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 정좌하고 앉았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서 다소 덥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부웅 부웅
내 앞에는 관견음이 공터에서 이리저리 품세와 역동(逆動)을 연습하고 있었다.
가르친지 두 달, 내 시간으로는 스무 달, 일 년하고도 팔개월이 된 상태이다보니 관견음의 성취가 눈에 뻔하게 보였다. 뛰어난 재능은 있지만 아직 절대적으로 기본기가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 저 나이치고 빠르게 발전하곤 있지만 일류(一流) 수준에 접어드려면 최소한 일 년은 용맹정진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기본부터 확실히 가르쳐 둬야겠군.’
스승이 되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지옥수련만큼이나 육체와 정신을 피곤하게 하는 행위였다. 내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상대에게 알기 쉽게 가르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처음 두세 달 정도는 인생 어느 때보다도 힘들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열과 성을 다해서 가르치는데도 이해를 하지 못해서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면 약간의 좌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남는 것도 없으니 허탈감이 배가 되었다.
교육경험의 부족을 메운 것은 역시 노력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관견음이 잘 배울지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말하기를 연습하고, 진도를 살폈다. 교수법을 바꾸기도 하고 진심어린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고뇌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하면서 내게는 일 년 팔개월이 훌쩍 흘러버린 셈이다. 간간이 내 수련을 하긴 했지만, 그 시간을 몽땅 관견음에게 쏟아부었다는 실감마저 느껴졌다.
나는 오늘이 되어서야 [스승]이란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게 되었다.
‘ 이런 걸 수십 년이나 해야 하다니. 괴로운 일인 건 틀림없구나.’
관견음에게 열정을 쏟아붓는 바람에 내 수련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내공의 성취는 확실히 진보해 나가고 있었다. 일전에 몸을 회복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15년치의 천단공력은 착실하게 회복되어서 벌써 삼분지 일까지 복구해 냈다.
엄청난 속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잃어버린 내공을 쌓으려면 적어도 절반의 세월이 필요한 법. 하지만 내 회복력은 세간의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나는 이 현상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 오대공력이 뒷받침되어서 바퀴의 역할을 하고, 혼원이라는 준마(俊馬)가 박차를 가하면서 몸을 회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종남파의 육합귀진신공이 중원 최고의 심법 중 하나라는 것.
육합귀진신공보다 더욱 패도(覇道)적인 공력이 있겠지만, 더욱 속도가 빠른 공력이 있겠지만, 더욱 정심한 공력이 있겠지만, 더욱 다양한 성질을 지닌 공력도 있겠지만, 원소력을 다루는 공력도 있겠지만 –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육합귀진신공을 궁극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공력은 천하에서 세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그것도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지 못한 것들 뿐이다.
이 속도라면 당초의 예상보다 더욱 빨리 몸을 회복하고 팔마저 복원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진정한 팔왕급의 반열에 접어들게 되고, 하은천마저 간격 안에서 노릴 수 있으리라.
그 때였다.
” 스승님. 저 쪽에 뭔가 보이지 않으세요?”
관견음이 연습하다말고 멍하니 산정 너머의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 쪽으로 기척을 주시하니, 관견음의 말대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삼백여 장도 넘게 떨어져 있는 [그것]은 사실 인간의 시력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관견음이 그것을 알아챈 것은 특유의 공감각이 저릿저릿하게 뻗쳐오는 [그것]의 존재감을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 삼백여 장도 넘는 곳에서까지 기세를 떨쳐올 수 있는 무인(武人)이 있다고는 아직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나는 오늘이 첫 날이라는 걸 주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존재]가 별안간 속도를 높이며 날듯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손님을 맞이해야겠다.”
저런 걸 경공이라고 불러야 할까?
비행기를 연상시키는, 체감상 그것보다 빠를지도 모르는 [괴물]이다.
” 네?”
” 너는 밑으로 가서 검군을 불러 오너라.”
” 넵!”
얼떨떨해던 관견음은 상황이 급박한 걸 깨달았는지 재빨리 대답하고는 경공으로 뛰어서 내려갔다. 제법 실력이 붙어서 일 각이면 검군들의 처소까지 도착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고요히 전방을 주시했다.
속으로는 시간을 재면서 급격히 커지는 검은 물체에서 한 눈도 떼지 않았다.
‘ 7. 6. 5. 4. 3. 2. 1…’
까앙!
파열음 때문에 얼굴이 따끔거리며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정확히 7초만에 내 코 앞에 날아들어서 일초(一招)를 교환한 존재는 표현을 궁색하게 만들 정도의 절세미녀였다. 흐드러지게 날리는 새까만 흑발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각되어 있는 이목구비. 거기에다가 시뻘겋게 젖어있는 천옷은 노출이 많아서 묘한 색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순간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흡족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크고 새까만 눈동자 안에 자리잡은 허무(虛無)의 양이란 필설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
상대는 전대미문의 살인귀(殺人鬼)다.
쿠구궁
외모에 대한 감상과는 상관없이 내 발 밑이 크게 내려앉았다. 상단세로 내려친 초쾌속의 베기를 정면으로 막는 데 성공했지만, 도법의 힘이 너무 강해서 내 호신강기 아래의 지반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쩌적하고 절벽이 잘게 쪼개어져서 중력에 따라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찰나에 우리 둘의 눈빛이 번득이면서 지니고 있는 병기가 잔광만 남기며 십수 차례 이상 연신 부딪쳤다.
촤카카캉
소리의 마찰음이 풍인(風刃)을 만들어내며 기하학적인 선율의 파장을 떨쳤다. 피하는 행로(行路)가 하나밖에 정해져 있지 않은 듯한 무시무시한 인막(刃幕)의 향연 속에서, 우리는 마치 근접 박투를 하듯이 끊임없이 칼날을 부딪혔다.
머리 끝이 흩날리고 머리카락은 감자처럼 차츰 깎여 나간다. 몸 아래의 혈관이 두근거리며 종말을 고한다. 싸우는 것 하나밖에 모르는 인형이 되어 이 살육공간을 환희로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까가강 치대는 칼소리의 자장가가 내 이성을 잠재우고 온몸에 덧씌워진 질척한 살기가 혈관을 전율로 메웠다. 이다지도 흉험한 근접검투를 겪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눈 앞의 상대는 지금까지와는 뭔가 [틀렸다].
고약하게도 그걸 알아내기에는 대결상황이 팽팽한 잉아줄 같아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별 수 없이 검귀(劍鬼)의 태세로써, 절벽에서 떨어지는 도중에 끊임없이 잔광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쿠궁
첫 번째 절벽의 낙암(落巖)이 떨어지는 소리가 육중했다. 내가 떨어지기 까지는 눈을 세 번 깜박거릴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고수들에게 그 순간은 영원과도 같았다.
상대의 도(刀)는 이윽고 유성처럼 변했다. 실제로도 천공에서 수백수천의 백마가 활개치듯 진공을 가볍게 초월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쾌도를 휘두르면서도 그 안에 일일이 현기가 실려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랍게 만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의 도와 마주 본 것인가.
도대체 얼마나 심묘(深妙)의 쾌(快)를 연마한 것인가.
나는 쾌(快)에 관한 한, 비류연을 제외하고 이다지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자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파앙!
삽시간에 오백 개째의 유성도가 호신강기를 수천 번이나 찢어발기며 맹수의 호조(虎爪)보다 맹렬하게 육합귀진신공의 방어를 흩트리려 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집중해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상대방의 초쾌도를 막아 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순간, 중력이 제대로 가속도를 붙여서 흐름이 흐트러질 무렵 – 최초의 반격을 가했다. 의령수(意靈手)가 상대방의 사지를 일순간 묶고, 무자비한 무승(無勝)의 검로가 검의 구름을 만들어내며 밀물처럼 쏟아졌다.
그 공격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패도적이라 과연 시체라도 남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상대가 막아내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찜찜해질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일순간 놀란 표정을 짓고는 처음으로 수세로 돌아섰다.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것의 일 푼의 시간동안 자세를 변화시키고는 다음 동작으로 중력을 거슬러올랐다.
그녀를 따라서 나 또한 허공을 박차고 천상제의 경공으로 뒤따라 올라가며 다시금 무기를 내려꽂았다. 이 모습이 마치 거꾸로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것 같아서 묘한 감흥이 들게끔 했다.
내게 이런 묘기까지 보이게 하며 접전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몇 없다.
팔왕!
그 중의 한 명이 내게 찾아와서 지금 극순의 시간에서 흉험한 공방을 주고받는 것이다.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 속에서 쉴 새 없이 수천 번의 불꽃을 튀기고 있으니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 듣던 대로의 실력이군. 하은천이 인정했다는 종남의 신검(神劍).”
부웅
우리 둘의 몸이 허공에서 한 번 교차하고는 서로 다른 절벽에 등지며 내려앉았다. 눈은 상대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종이 한 장 차이로 몸을 맞댄 것과 같은 실감이 있었다. 이따위 거리쯤은 순식간에 압축되어버리는 게 사실이다.
그녀는 그 격전에도 불구하고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처음 그대로 살기 가득한 허무를 눈동자 깊은 곳에 숨겨둔 채, 그녀는 나예린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미소를 살포시 지었다.
” 팔왕(八王) 혈관음(血觀音)이다.
네 실력은 나와 동등하다는 말을 인정하겠다.
하은천의 식견은 역시 파천무(破天武)의 주인에 뒤지지 않아.”
이어진 말은 잠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 그러니 훌륭한 경의의 의미로, 지금부터 삼 초 이내에 네 목을 날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