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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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음(血觀音)
천의무봉(天衣無縫).
중원무림의 역사가 넓고 깊은만큼, 여러가지 무(武)의 경지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천의무봉이다.
본디 천의무봉은 하늘나라 사람의 옷은 바느질 자국이 없다는 뜻으로, 시문 등이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무결하여 흠잡을 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지만 – 무학의 경지로 취급될 경우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강호에서 가장 기본적인 초식으로 취급받는 육합개산(六合開山)은 좌로 몸을 반쯤 비튼 후, 역반동으로 우상으로 그어올리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대각선베기에 불과하다. 삼척동자도 두세 번만 따라하면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있다.
육합개산이 포함된 하나의 절(節), 육합검(六合劍)의 식(式)은 어떻게 될까?
총합 32개의 동작, 8초식으로 이루어진 육합검을 익히는데는 통상 일반인에게 1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시장의 하급 호위무사들이나 익히는 육합검식에도 한 달이나 되는 수련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육합검식을 익혀서 실전에서 쓰는 도중에 그 동작을 온전히 군더더기 없이 사용하는데는 실전경험만 5년 이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섬세한 달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공또한 받쳐줘야 하기에, 일류의 경지에 접어드는데는 40여년 이상이 걸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강호의 절정고수들이 보는 ‘깨끗함’의 기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만 개나 되는 검광(劍光)이 스쳐지나가는 격전 속에서도 자신의 호흡과 정기를 가다듬고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절기를 펼쳐내는 태도가 필요했다.
천무학관에 존재하는 8할 이상의 문도들은 이 무태(無態)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일반, 일류, 달인, 무태의 경지를 넘어서면 한층 요구조건이 까다로워졌다.
자신의 몸의 모든 제어권을 정신의 움직임에 맡겨두고, 마음이 움직이기도 전에 손은 이미 움직이고, 그걸 넘어서서 최적화된 전투상태로 몰입한다. 그 때는 싸우는 도중에 눈 앞에 새하얀 잔광(殘光)이 어른거리는데, 이마에서 마치 빛이 나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초극강의 고수들은 이 경지를 천무(天武)라고 불렀다.
쾌검이든 만검이든 기병이든 적수공권이든, 하나의 경지를 극한까지 수련하면서 자신의 무예를 수백만 번이나 단련해서 영혼에 새겨질 정도로 박아넣은 것이다. 천무의 경지에 달한 고수들은 다들 일가(一家)의 종사(宗師)로 군림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당금강호에서 천무에 도달한 건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염도나 빙검조차도 그 언저리에서 번번히 좌절을 맛보기 일쑤였다.
무예의 깔끔함이 천무의 경지에 도달한 자들은 겉품세가 요란하거나 쓸데없이 깨끗하지 않았다. 행동의 범상함 속에서 이미 움직임은 최적의 자연체를 유지하고 있으며,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도 그들의 빈틈을 무법칙 속에서 찾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많은 자들이 착각을 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무술의 강력함은 정확함에서 비롯되었다. 천지를 가를 정도로 강대한 절초라거나 초필살기는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빠르고 무엇보다도 정확하다면 그 자체로 최강의 무예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무를 얻은 자들 사이에서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경지를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말 그대로, 천려일실(千慮一失), 아니 억려일실(億慮一失)조차 존재하지 않는 ‘정확함’과 ‘깨끗함’의 완전체! 모든 몸의 움직임을 통제해서 자신의 의지하에 두는 천무를 넘어서서, 움직일 때마다 생겨나는 혼돈과 무법칙마저도 행동의 영향권에 넣을 수 있게 되는 준신(俊神)의 기예(技藝).
적멸존자는 우묵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팔왕 서열 3위, 하은천이 그 전설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다.
‘ 크크크. 지금의 놈과 맞붙으면 3초 이내에 살해당하겠군.’
적멸존자의 무공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팔왕 중에서 최하위에 속했다. 기껏해야 술법사인 천무대제와 아웅다웅하는 수준으로 – 염도와 빙검이 힘을 합치면 절반의 승산을 지닐 수 있을 정도였다.
염도와 빙검이 당대 천하오십대고수인데다 무신의 제자라고 해도 배분이 100년은 차이나는 후배들의 합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자체로, 이미 팔왕급 무공이라고 불릴 자격은 없었다.
” 태왕(太王)을 찾는다고 했는가, 하은천.”
” 그렇다.”
” 크흐흐… 찾는 이유는? 여하에 따라서 알려주지.”
적멸존자는 지금 하은천을 곯려먹거나 조롱할 처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설령 검에 베여죽어도 얼마 후 암흑의 주술로 되살아나지만, 하은천의 은하구절편(銀河九折鞭)은 신병(神兵)이다. 당했다가는 말 그대로 처참하게 소멸당할 것이다.
하은천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 팔왕은 모두 태왕의 의지에 의해 모였다. 원래 마교의 마맥(魔脈)이라 불리던 무리들을 대신해서 위천무와 동맹관계를 맺은 것도 우리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지. 다 좋지만, 나는 얼마 전에 태왕에게 의혹을 느꼈다.”
” 의혹?”
” 내 제자의 영혼은 내가 마련해 둔 연화대(蓮花臺)에서 전생(傳生)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감숙 땅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더군. 거기에는 너도 알다시피 태왕이 마련해 둔 ‘그것’이 있다.”
” … 호오, 흥미롭군.”
적멸존자는 까글거리며 웃었다. 그 자신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팔왕의 우두머리인 태왕의 행사는 은밀하고 조용해서 적멸존자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적멸존자를 포함한 팔왕의 지혜와 탐색능력이 인간을 뛰어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태왕이 얼마나 괴물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 상황에 하은천이 뜻밖에 귀중한 정보를 전해준 것이다.
” 하지만 내가 직접 찾아가서 ‘그것’을 부수는 건 너무 위험해. 그래서 그 전에 태왕을 만나서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가 지금 꾸미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맞는지를.”
” 크크, 어리석은 놈!!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적멸존자는 미친듯이 웃었다.
” 천의무봉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인중무적(人中無敵)에 불과하다. 태왕과 유검은 이미 인간조차 아니다. 네놈이 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겠다고? 크하하하하!!”
적멸존자의 비웃음을 듣고도 하은천은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대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고있기 때문이다. 하은천이 직접 본 바로 팔왕 서열 1,2위는 도저히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나머지 6명이 유검에게 몽땅 덤벼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아니, 내 생각대로라면 태왕과 생사결을 벌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태왕의 거취를 아는 자는 유검과 너, 적멸존자 뿐… 네가 말해준다면 일이 쉽게 될 것이다.”
” 말해주지 않는다면? 유검이라는 괴물에게 물어보겠다는 소리냐?”
” ……”
하은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 크크… 정말 미친 놈이군…”
” 대답이나 해라.”
” 내 일을 방해하지 않겠느냐?”
” 방해할 이유따위 없다. 종남파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적멸존자는 머리를 굴렸다. 그의 목적은 이 무림이라는 세계의 파괴와 혼돈, 학살이다. 하지만 태왕은 어쩐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고, 이대로 적멸존자 자신이 눌려지내는 상태로는 변화를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하은천을 이용해서 태왕을 견제하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 … 태왕은 아미산에 있다.”
하은천의 물음이 한층 고요해졌다.
” 그는 평소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 아니. 적어도 답답해보이는 흑갑주를 착용하고 있진 않다. 나머지는 네 놈이 직접 찾도록…”
휘잉
적멸존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술수를 사용해서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은천은 몇 번이고 그의 본체를 타격해서 큰 상처를 줄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팔왕 서열 3위와 6위간에 오간 암묵적인 계약이 있기 때문이다.
하은천은 힐끔 종남산을 바라보았다.
인간을 초월한 천이통(天耳通)을 얻은 하은천의 귀에는 미세한 파열음과 금속음,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72명이나 되는 강시 절정고수군단이 공격한다면 아무리 종남파라도 오래 버틸수는 없을 것이다.
” 유천영. 혈관음을 상대로 이기고… 천무대제를 이기고… 또 명부칠십이진해까지 이겨낼 수 있겠느냐? 내가 봤던 네 수준이라면 무리겠지. 무신마(武神魔)가 오지 않는 이상 오늘 종남파가 멸망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저벅
하은천은 조용히 걸어갔다.
유천영이 혹시 살아남으면, 그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