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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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음(血觀音)
나는 먼 곳에서 걸어오는 죽음의 냄새를 읽고 전율했다.
혈관음이다.
그녀는 피비린내를 몸에 휘감고 있었다. 마치 승리를 즐기듯이, 서서히 이쪽을 향해서 차분하게 걸어오고 있다.
” 다시… 싸우는 건가.”
순간적으로 ‘길’을 찾아내서 엄청난 시간을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 지금의 내 역량은 고작해야 반 식경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리(一里) 밖에서 서서히 걸어오는 괴물(怪物) 앞에서는 긴장하게 되었다.
아마도 전신전령을 다한 전투에서 실제로 패해서 죽음 직전까지 갔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살기(殺氣)를 마주해서 마음이 꺾이진 않았지만 일말의 망설임이 생겨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상대방은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히는 절세무공의 소유자니까.
” 스승님…”
관견음이 옆에 서서 불안해 했다. 아마도 내 눈에 긴장이 깃들어 있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무감정한 눈으로 관견음을 쳐다보곤 말했다.
” 너는 만일에 지금 다가오는 자가, 네 복수의 목표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흠칫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했지만 관견음만은 마치 찬물 끼얹은듯 표정이 달라졌다. 영락(靈洛)까지 얻은 지금은 그녀의 감정변화를 읽을 수 있다. 내 제자가 아닌, 무인(武人) 관견음으로써의 대답이 들려 왔다.
” 스승님의 손에 의해 그 자가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 그렇겠지. 복수는 너의 것이니까.”
나는 조용히 웃었다. 실낱같은 미소였지만 관견음은 내 미소에서 더욱 더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생각할수록 영특하고 셈이 빠른 제자다. 설마 처음부터 모든 게 이렇게 진행될 줄 알았을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결국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 하지만 나는 아직 종남파에 적을 두고 있다. 상대가 정말로 종남파를 멸망시키는 원흉이라면 베지 않을 수 없다.”
” ……”
게다가 여기까지 온 거라면 아마 도성또한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생각해도 내가 혈관음을 죽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를 여기는 건 오만한 태도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혈관음의 생사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 종남파 혈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니까.
” 어떻게 할테냐?”
관견음은 잠시 갈등했다.
그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스승님이 그녀를 베신다면, 전 스승님을 베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강남신의와 무검의 안색이 아연해졌다. 세상에 종남파가 멸망을 앞다투는 판에 제자가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스승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건, 삼류 사파조차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마 분위기 때문에 끼어들지는 못했지만 다들 관견음을 정신나간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 고맙다. 각오가 굳혀졌어.”
” …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 그저 옛날 생각을 조금 했을 뿐이다.”
관견음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나는 나만 알아먹을 수 있는 독백을 해서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면서 무심하게 검을 흘겨 잡았다. 손에 잡힌 검의 이름이 불살검(不殺劍)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리면서.
옛날 이야기다.
정말로, 내가 첫 모험을 시작하기도 전… 유년의 경계.
살아있어 봤자, 추잡스런 죄에 비열한 죄가 더해져 고뇌가 더욱 커지고 강렬해질 뿐이었다. 죽고 싶고, 죽어야 하고, 살아있는 것부터가 죄의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서 아무리 울어보려고 해도 눈곱만큼도 슬프다는 감정을 지니지 못한 게 내 잘못이라고 여겼다.
– 그 무렵. 유년시절의 첫 관문을 열 때, 나는 세상에 죄를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대로 쓰러지려고 했다. 환멸도 절망도 없이, 내가 나로써 당당해질 수 있는 어딘가를 찾아서 죽고 싶었다.
그 때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집념도 오기도 아니었다. 그저 한겨울의 바람 속에서 죽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허무해졌기 때문이다. 공허하게 계속되는 삶을 계속 이으면서, 차원여행자로서의 삶을 또다시 살아갔다.
그런 내게 처음으로 다가온 목표.
무의 궁극.
추구해야할 목적.
… 다시 말하자면, 내 삶은 그 순간, 목적 하나로 [완성] 되어버린 걸까.
유별난 근성이나 오기 때문에 열흘의 하루를 견디면서 극한의 수련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세상에 나보다 근성질긴 사람도, 오기가 대단한 사람도 많다. 나보다 무의미하게 한가지에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도 많다.
단지 나는 어느새 무(武)를 연마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이 모든 시간에 감사하고 있었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 모든 것을 존중할 수 있었다. 천년검로를 맹세하는 순간 유년의 시간이 끝이 난 것이다.
왔다.
스으
나는 정중앙을 향해 검을 겨누어 잡으며, 어느덧 육안으로 보일 거리까지 다가온 혈관음에게 겨누었다. 혈관음은 상처 하나 없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천마삼태도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혈관음이 입을 열었다.
” 놀랍군. 그 짧은 시간에 내상을 완치(完治)했단 말인가? 대단한 생명력이다.”
” 나아갈 길을 빠르게 걸을 수 있었소.”
” 사도(邪道)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걱정해주듯 조롱하는 혈관음의 말에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 상관없지.”
” ……”
나는 혈관음의 살기를 전신으로 누그러뜨리며 허공에 흘러다니는 힘의 고리를 제어했다. 혈관음의 천마삼태도에는 의기(意氣)가 포함되어 있어서 자유자재로 시공간을 조종하는데, 그 맥을 순간적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 나답지 않게 너무 주변환경을 의식해서 쓸데없는 걸 가지고 고민했던 듯 싶소.”
” 무슨…”
나는 새롭게 탄생한 육합귀진신공(六合歸盡神功)의 완전한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처음부터 무결(無缺)한 육합의 변화가 내 전신에 맺혔고, 정수리가 밝아지면서 천지를 통하는 빛의 기류가 느껴졌다.
광대한 힘의 파장은 없었지만 이미 내 전신은 기(氣)를 뛰어넘어 의(意)로 충만해져 있었다. 이 변화를 목격한 혈관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 네놈…!! 설마 원류(元流)에 도달한 거냐!”
나는 종남파니, 삿갓의 괴인이니, 도성이니, 팔왕이니, 제자의 사정이니 하는 일체의 외부요인을 생각에서 끊어버렸다. 그딴 건 사실 처음부터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눈 앞에 있는 호적수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겨룹시다.”
이게 정답이다.
피로 피를 씻는 살육의 고리, 나선의 환상은 내가 평생을 고민하며 안고 살아가야 할 숙제지만 – 그게 길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싸우다 죽으면 어떤가.
죽기 전에도, 설령 한 순간이라 해도 – 섬광같은 찰나 속에서 도(道)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방금 나는 깨달았다.
내 역사는 검에서 시작하고 검에서 끝난다. 처음 내 길이 시작된 이곳, 종남파. 나의 역사란 삶이 자아내는 길의 한 갈래다. 내가 어떤 길을 자아내든 상관없다.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을 향해서 달릴 뿐이다.
돌이켜 보면 모든 전투와 수련에는, 모든 길의 흔적이 새겨져 있을 테니까.
휘리리릭
천마삼태도의 초식이 한 순간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은 채 1초식 음유마전부터 펼쳐내기 시작했다. 잔챙이를 처리하려는 의도인 듯 광범위하게, 사방 30여장을 빽빽히 채운 수십여 개의 도강이 화려하게 공간을 수놓았다.
혈관음의 선공에 나는 한 번 칼을 휘둘렀다.
음유마전의 혈영(血影)은 단번에 보랏빛을 내뿜으며 두 쪽이 나서 허공에 스러졌고, 내 검에서 발출된 무형의 기류는 다시금 엉키면서 시공간을 뚫고 날아갔다. 음유마전이 무효화되면서 바로 반격이 날아오자 혈관음은 낭패한 기색으로 재빨리 수세(守勢)로 전환했다.
첫 싸움때와는 명백히 다른 양상이다. 쾌도에 쩔쩔맸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상대방이 펼쳐내는 도의 궤적이 어느정도 눈에 잡힌다. 혈관음이 이빨을 으득 깨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 아광(亞光)을 쓰시오.”
재전(再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