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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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음(血觀音)
혈관음은 내게 공격이 막히자 툭하고 내뱉었다.
” 내가 일백년 내에 겨룬 상대 중에…”
그녀는 잠시 기억을 되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우리같은 고수들 사이에서 그 찰나는 치명적인 빈틈이었지만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상 적의를 품고 마주했지만 지금의 대결은 서로에게 소중한 경험이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대결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싶지 않는 게, 소위 명인(名人)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 너보다 기본기가 확실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태왕과 유검조차, 너보다 정공법으로 수련해서 절대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칭찬아닌 칭찬.
좋게 듣자면 내 수련시간에 대한 보상이었고, 나쁘게 듣자면 기본기 외에는 필살기가 없기 때문에 혈관음에 비해 뒤진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도 될 수 있으므로 나는 도리어 감정을 죽일 수가 있었다. 나는 무덤덤한 눈으로 그녀의 인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당신은 어째서 팔왕에 들어가 있소?”
” 훗. 팔왕에 들어가 있다…?”
혈관음은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픽하고 비웃었다. 그녀는 잠시 피빛으로 물든 자신의 옷을 여미더니 서풍(西風)에 자신의 도극을 흘기며 자세를 잡았다. 전투태세가 갖춰지자 그녀는 나를 정면으로 쏘아 보았다.
” 유천영. 그건 다르지. 내가 팔왕을 만드는 축이었다.”
” ……!!”
뜻밖의 이야기였다. 나는 속으로는 적지않게 놀랐지만 혈관음은 내 감정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그만큼 내 부동심(不動心)의 공력이 심묘한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혈관음이 말을 이었다.
” 마교는… 비뢰도(飛雷刀)에 의해 전멸 직전까지 몰린 후 모든 세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비뢰도를 이기기 위해, 천마신공에 수록된 천마삼태도를 최후경지까지 익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내 아버지 대에서 천마삼태도는 진(眞) 아광(亞光)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래도 천겁혈신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하지 못했다.”
” 이상한 말이군. 비뢰도를 꺾어야 한다면서 천겁혈신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뭐요?”
” 너는 몰랐는가? 천겁혈신은 비뢰의 후예다. 적어도 풍신(風神)의 단계를 넘어섰으니, 우리는 그를 비뢰문주이거나 그의 제자로 생각했다.”
” ……”
풍매곡. 화산규약지회의 각벽에서 보았던 위천무의 흔적 – 그리고 비류연의 비뢰도. 그 모든 것을 보아왔던 나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때도 위화감은 느꼈지만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수 있다. 천겁혈신이 비뢰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림은 그 정도로 박살났던 것이다.
” 천겁혈신은 멀쩡히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를 꺾을 실력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무림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유검과, 수수께끼의 존재 태왕의 조력을 받아서 팔왕을 갖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내 서열이 낮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
” … 살아 있다니.”
나는 무림인들 중에서 천겁혈신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전체로 치면 5리 정도는 그럴 것이다. 단순히 무림의 일을 흥밋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천무삼성이나 무신마를 비롯한 정사파 최고위 수뇌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현 마교교주인 혈관음이 확언하는 것과는 무게가 달랐다. 그녀는 확실한 증거를 지니고 믿고 있었다. 직접 상대해서 쓰러뜨린 무신마조차도 모르겠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을 때였다.
파캉
그 순간, 혈관음의 도가 위압적으로 떨리면서 대기를 진동시켰다. 내 몸은 한 순간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지만 부동심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상대방이 기세를 타는 걸 막지 못했다. 혈관음은 내 기색을 확인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아차.’
나는 그제야 혈관음이 초고급 정보를 흘려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솔하고 충격적인 정보를 말해줄수록 나는 경청할 수밖에 없다. 나는 빠르게 태세를 정비했지만 아까에 비해서 기세가 누그러뜨려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작부터 혈관음의 심리전에 말려버린 것이다.
” 꽤나 이기고 싶은 모양이구려.”
내가 핀잔을 주자 혈관음이 마주 웃었다.
” 피차 마찬가지. 생사를 건 싸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뛰어난 상대방에 대한 예의다.”
” 그 말이 옳소.”
나는 더 이상 상대방의 말에 현혹되지 않기로 마음먹은 채 마주 검을 들었다. 혈관음은 심리전이 더 안 먹히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 유천영. 하은천과 금포염왕은 너를 동료로 삼고 싶어했지만 나와 천무대제의 의견은 다르다. 너는 무색(無色).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애정과 가치를 두지 않는 은둔자는 동료로 둘 수 없다.”
혈관음의 말은 신랄하게 내 인간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줏대없이 흔들리는 박쥐라고도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내 자신에 대해 백수십년 간 생각해 왔기에 혈관음의 말은 정곡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말이 옳소.”
나는 누구의 동료도, 누구의 적도 아니다. 도리어 멋대로 동료라고 단정짓고 나를 이용하려 드는 쪽이 성가시다. 솔직하게 나를 적으로 인정하고 전신전령을 다해 싸워주는 쪽이, 도리어 마음에 들 때가 있는 것이다.
내 대답에 도리어 혈관음이 멈칫거렸다.
” … 이상한 녀석.”
” 혈관음.”
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 당신의 눈 앞에 보이는 걸 인간으로 생각지 마시오.”
” …..?”
혈관음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내 삶은 영겁의 향기에 지나지 않으니.”
스으으으
[ 이 세상이 일정한 크기의 힘과 일정한 수의 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존재의 거대한 주사위놀이 속에서 계산 가능한 수의 조합들을 계속 되풀이 하는 수밖에 없다.]육합귀진신공은 지금도 끊임없이 내 몸 속에서 회전(回轉)하고 있다. 이제 육각의 형태를 상실한 공력은 완전히 원(圓)이 되어서 4행정기관처럼 왕복하고 있다. 이걸 이제 공력이라고 불러야 할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전(丹田)의 개념은 이미 넘어 섰다.
상단전(上丹田)이라고 하는 편리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건 애초에 의념을 끌어모으는 원동력이 뇌에 존재한다는 걸 설명하기 위한 개념에 불과하다. 진짜로 대뇌가 공력이나 기를 모아서 축적하는 공간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현학적인 말놀이가 수많은 초절정고수들을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 무한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조합이 빠짐없이 한 번 씩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무한히 여러 차례 나타날 것이다.]기혈(氣穴)은 통합되고, 경락(經絡)은 이어진다. 떠오르는 수면 위의 공처럼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이 저절로 그려지고, 다시금 인체 외부의 기(氣)를 정제해서 몸에 끌어모은다.
영락(靈洛)을 통해서 축적하고 있는 모든 경험에 따라 수억가지 흐름(流)이 육맥(六脈)을 끌어모은다. 단순한 인체의 해부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광(電光)같은 물길이 육체의 내외로 흘러넘쳤다.
[ 그리고 각각의 ‘조합’과 다음 번에 그것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회귀)’ 사이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합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고,]” 진(眞) 아광(亞光).”
더는 기다려줄 수 없는지, 혈관음은 한 수로 승부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내 인지속도로도 전혀 감지할 수 없는 – 크샤나(瞬間)의 단위를 다시 100분해서 시간단위를 통합해버린, 극쾌도(極快刀). 기본적으로 음속을 훨씬 뛰어넘는 초절정고수들의 세계에서 다시 수백 배 이상 빨라져버리는 미친 필살기.
아마 허공(虛空)과 육덕(六德)의 세계를 넘어서 청정(淸淨)에까지 이르러 있다. 실제로 광속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이미 속도만으로 인간의 무공체계를 뛰어넘어버린다.
혈관음의 통상적인 역량은 예전의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그녀가 아광을 펼치게 놔둬 버리면 하은천조차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지속도를 뛰어넘어버리면 어떤 대단한 공력이나 필살기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무공의 본질이 쾌(快)에 있다는 데 집중한다면 아광은 사상최강의 필살기다.
… 그리고 진 아광은 통상의 아광보다 10배 더 빨라지는 혈관음 최후의 비기.
정상적이라면 막아내는 것도, 피해내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학살의 빛이다.
끼이이잉
어느 새 나는 시뻘겋고 새하얀 빛이 섞이면서 내 전신에 밀어닥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사실 그 모든 빛은 수십만 개나 되는 검기가 파장을 엮으면서 일파(一派)로 모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이란 걸 알아챘다. 일반 무림인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천년마교 무공의 결정체다.
금강불괴는 커녕 연혼금신(燃魂禁身)이라고 해도 진 아광을 정면으로 맞고 살아날 순 없을 것이다.
[ … 또 그 각각의 조합마다 전체 조합들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 똑같은 조건인 만큼, 절대적으로 동일한 순서의 순환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그래. 모든 건 윤회(輪回).
빛도 고리를 벗어날 순 없다.
그리고 나는 시간(時間)이 곧 거리(距離)라는 걸 알고 있다. 내 몸에서 미친 불꽃처럼 뛰어다니는 수억 개의 조합이 하나의 변화로 귀일(歸一)함을 느끼면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시큼한 흑색 빛이 안구를 통해 흘러들어온다.
언제였을까, 비류연이 내게 말했다.
[ 이게 흐름이라고 하면 아래위로 축이 있고, 또다시 연속되는 원이 있는 셈이지! 원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간단하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흐름을 거슬러서 움직이면 그만인 거야. ]월승혼의 시간정지와 시간소멸을 싸그리 무시해버린 원리를 설명해 준 그 말 –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혼(武魂)의 첫 단계를 걸으면서 변화를 겪는 지금의 나는 간신히 가닥을 잡을 수가 있다.
아무리 빨라봤자 그 모든 것은 시간에 속해 있고, 과정이며, 결과에 귀속된다.
그렇다면 나는 시간을 다스리는 축을 – 의념의 힘을 이용해서 뒤틀면 된다!
이것이 바로 삼천세계를 멸하는 뇌신(雷神)의 원리 중 하나이다.
……………
” 무혼(武魂) 일단계(一段階).”
잡았다.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이라고도 한다.
… 그리고, 내 손에 자신의 도(刀)가 잡혀 버린 혈관음은 말 그대로 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강호의 모든 무공 중에서 최속(最速)을 자랑하는 그녀의 진 아광이 내 손에 맥없이 붙잡혀 버렸기 때문이다.
” 영겁회귀(永劫回歸).”
앞으로 모든 천재적 달인과 명인, 괴물들을 상대할 나의 무기.
쾌(快)와 파괴력으로 이루어진 모든 무공의 결과를, 축을 비틀어서 무효화하는 – 반무공(反武功). 나보다 속도와 움직임이 더욱 높은 괴물을 상대로도 싸울 수 있게 해주는 절대적 흐름(ながれ).
말하자면 결과에만 한없이 접근하는 금기(禁技).
” 말도… 안돼…”
혈관음이 넋을 잃고 있자 나는 가볍게 칼날을 놓아주고 뒤돌아섰다.
그녀가 발악적으로 기습해 올 걱정따윈 하지도 않았다. 이미 ‘마음’을 꺾어버린 이상 혈관음은 두 번 다시 재기할 수가 없다. 기습을 해 봤자 천년마교 교주로서의 자존심, 팔왕으로서의 자존감 모든 것을 잃어버릴 뿐이다.
풀썩
” 쿨럭!”
혈관음은 울화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했을지도 모른다. 백여년 이상 수양해 온 절대고수에게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짓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힐끔 뒤돌아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 남은 열흘 동안, 나는 당신의 천마삼태도와 아광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무너뜨리겠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 ……”
이미 그녀는 기절해서 듣지 못한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가까스로 이겨내며 말을 이었다.
” … 그 모든 과정이… 내가 추구하는 궁극을 위해서라면.”
천년검로를 위해 내가 선택한 길은 수라(修羅).
도성의 목숨이나 종남파의 멸망은 관계 없다. 명인의 자존심과 상호존중도 필요 없다. 오로지, 단 하나의 빛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