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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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음(血觀音)
” 어떻게 하실 거죠?”
혈관음을 제압하자 옆에 있던 관견음이 질문해 왔다. 두려움과 아쉬움, 그리고 괴로움이 스며있는 눈동자였다. 나는 관견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목을 벨 거라면 벌써 베었다.”
” 무인의 인정(人情) 때문에 혈관음을 살려주시는 거라면…”
관견음은 이빨을 으득 깨물더니 외쳤다.
” 안 돼요! 용서할 수 없어요. 반드시 제 손으로 베어야 해요.”
검을 꽉 잡은 기백이 뜨겁게 전해져 왔다.
팔왕 혈관음은 너무 큰 정신적 충격때문에 아직 이성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내상도 적지 않을테니, 삼류무사가 칼을 휘두르기만 해도 죽을 상태다. 누군가가 제지하지 않는다면 관견음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혈관음의 목을 벨 수 있다.
나는 나직이 말했다.
” 관견음. 네가 베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라.”
” 종남파를 공격한 흉수를 놔둘 순 없어요.”
” 정말로 그것 뿐이냐?”
” 스승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관견음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속일 수 없다. 영락(靈洛)은 보통의 독심술과 차원이 다른 경지의 관법(觀法). 상대방의 경험과 미세한 무의식까지 훑어내는 눈 앞에서 거짓말따윈 통용되지 않는다.
나는 도리어 오검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지 주의하면서 말을 이었다.
” …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위화감을 느꼈다. 이름이 너무 비슷했다.”
” ……”
관견음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 혈관음에 관(觀) 견(見) 음(音)이라. 파자(破字)가 너무 단순하다.”
관견음, 나의 제자인 소녀는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생각없이 지었다는 후회감이 들 순 있다. 나는 조롱이나 폄하의 기색 없이 잔잔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팔왕은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최근에야 이름이 알려졌다. 하물며 혈관음은 더욱 신중하게 자기 정체를 숨겼을 테니 이름값으로는 삼류 무명배만 못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종남파의 누구도 너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스승님…”
” 나는 네가 혈관음의 제자였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번뜩
순간 내 눈에서 기광이 흐르며 사방을 압박했다. 하후신과 오검, 관견음은 동시에 주춤거렸다. 관견음은 내 의념의 결계에 갇히게 되자 눈에 띌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는 게 느껴졌다.
” 단지, 네 본명을 말하는 데서 시작하고 싶구나.”
” 그… 그건.”
관견음은 망연한 표정으로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에서 쉴새없이 상념이 맴도는 듯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언제까지 침묵했을까.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관견음이 겨우 입을 열었다.
” 제 이름은… 혈관음이에요.”
” 뭐라고?”
뜻밖의 상황에 듣고 있던 하후신이 놀라서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파앗
그 순간, 관견음의 기세가 일변했다. 하후신의 걸음과 함께 인식속도가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생겼고 – 관견음의 오른팔의 근육은 더할 나위없이 긴밀하게 움직였다. 몸에 힘을 싣는 파보(破步)와 함께 촌각을 딛고 관견음의 검(劍)이 전방으로 한 번 길게 그였다.
하후신은 아까 시전했던 천룡지법을 운용해서 빠르게 방어를 해 나갔다. 그의 무공수위도 결코 낮은 게 아니라서, 염도나 빙검도 그를 쉽게 쓰러뜨릴 수 없다. 기기묘묘한 방위를 점하며 허공에 빛이 맴돌자 관견음의 검은 잠시 멈추었다.
위잉, 하는 소리가 벌떼처럼 울렸다.
그리고 하후신의 목젖에는 관견음의 검극(劍戟)이 마치 시간을 삭제한 것처럼 도달해 있었다. 그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무검(無劍)은 검귀답게 감탄했고, 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허억…”
한 순간에 새파랗게 어린 여자아이에게 제압당해버린 하후신은 안색이 새하얘졌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방금은 충분히 하후신이 감당할 수 있는 국면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쉽게 고수의 결계를 침범당한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괴물’을 제외한 천무학관의 누구를 데려다놓아도 하후신의 목에 3초 이내에 검을 들이댈 검수(劍手)는 존재치 않는다.
나는 짧게 설명했다.
” 천마삼태도 일단계, 음유마전(陰幽魔電). 방금은 네 나이또래에서 천하제일이라 해도 좋을 속도구나.”
” … 칭찬 감사합니다.”
역시 나나 종남파 사람들이 느꼈던 위화감은 정확했다. 관견음, 아니 자칭 본명 혈관음은 천마삼태도라는 천년마교의 절기를 상당한 수준까지 습득한 상태였다. 음유마전으로 하후신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면 아마 2단계인 참선(斬仙)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 제대로 설명을 해 줄 수 있겠느냐.”
” 네… 알겠어요.”
콰직
그 때였다. 나는 막으라는 듯이 거센 기세로 날아든 풍인(風刃)을 의령수로 쳐 냈다. 힐끔 뒤를 쳐다보니 팔왕 혈관음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서 선혈을 흘리며 척 보기에도 생사가 위험한 얼굴색이었다.
팔왕 혈관음은 선혈을 끌어삼킨 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관견음을 노려보았다. 관견음은 저절로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 넌 말할 필요 없다. 이건 우리의 문제다.”
” 혈관음. 이 자리에서 오기 부리지 마라.”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혈관음을 응시했다.
” 관견음은 이미 내게 구배를 하고 정식으로 사제지연을 맺었다. 종남파를 침범하고 학살을 자행한 네가 ‘우리’라고 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 구배…? 구배라고?”
혈관음은 멍한 눈으로 관견음을 쳐다보니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강하고 패기만만하고, 살기만을 흘려대던 학살마의 모습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 너는… 나에게는 하지 않은 구배를 정파인에게 했단 말이냐…”
” 배신이 아니에요.”
” 그만! 변명으로 구차하게 만들지 말거라!”
단호한 호통에 관견음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얼굴은 마치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미어질 듯한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겨우 짐작했지만 차마 함부로 내뱉기 힘든 추측이었다.
그래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다가 혈관음에게 말했다.
” 마교의 교주. 그대는 혈관음으로써 무엇을 남기고 싶소.”
혈관음은 이미 도주도 불가능하다.
내가 도망치는 걸 막을 순 없지만, 지금의 부상은 치명적이라서 의원을 찾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것이다.
” … 알아차렸군. 정말이지… 귀찮은 녀석.”
비틀하고 혈관음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급히 도첨을 땅에 박아넣은 채 버텼지만, 장내의 누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팔왕쯤 되는 절대고수가 몸의 중심을 가누지 못할 정도면, 이미 싸우기는 커녕 목숨이 위험하다고 볼 수 있었다.
혈관음은 나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 유천영. 잘 들어라.”
” 경청하겠다.”
” 팔왕은, 강하다. 네가 생각하는 한계 이상으로…”
” ……”
나는 자신있게 받아치지 못했다.
오늘의 일로,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팔왕의 무위(武威)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리 혈관음이 마교교주라지만 내 실력으로도 쉽게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동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정면으로 혈관음의 시선을 대했다.
” 태왕과 유검은, 인간의 수준이 아니야! 그 괴물들 앞에선 무신마(武神魔)도 오십초 지적에 불과하다. 네가 그들과 마주치면 죽거나 복종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은천과 금포염왕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공포.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천무삼성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러 있는 혈관음조차 인간이 아니라며 경외시할 수준이란 건, 지금의 내 상상력으로는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 네가… 네가.”
혈관음은 자신의 옷에 튄 검은 피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아쉬움이 강하게 배여 있었다.
” 그 아이를 지켜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정(情).
나는 씻을 수 없을 정도로 질척하고 처연하게 전신을 감싸는 느낌에 흠칫하고 말았다. 영락을 통해서 감정이 저절로 읽혀 들어오지만, 여태 이렇게 강렬한 감각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혈관음이 관견음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채고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 그랬던 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돌봐주고 싶고, 같이 나이를 먹으며, 때로는 자신과 닮게 하고 싶은 욕심을 품는다. 애정은 언제나 형태가 변하지만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혈관음은 처음부터 사제전승이나 배신으로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리라.
” 제자를 지키겠소.”
나는 반하대를 버리고 정중하게 말했다.
” 시간은 흐르며 달라지지만, 나는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겠소. 지금과 또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되더라도 결코 지금의 맹세는 잊지 않을 것이오.”
열흘의 하루로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이 약속은 나의 신념에 걸고 하기 때문이다.
혈관음이 희미하게 웃었다.
” 이상한 놈… 내가 종남파의 뿌리를 없애버렸는데도 인정을 베풀어 주겠다는 건가?”
” … 다른 문제요. 서로가 지닌 마음의 빚의 크기일 뿐.”
나는 자신있게 얘기할 수 없다.
열흘의 하루가 없었더라도 이렇게 깔끔하게 혈관음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을까.
아직까지 내가 인간세상의 인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리라.
혈관음은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전에 없이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 유천영. 어째서 저 아이가, 그리도 내 목을 베고 싶어 했는지는 묻지 말아주게.”
” 그렇게 하겠소.”
그 때 관견음과 혈관음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살기를 뻗쳐내고 있으면서도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슬퍼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두 사람의 비통함이 천지사해를 적셨을 것이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영락으로 읽혀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한층 더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관견음을 향해 입술을 잠깐 달싹이던 혈관음이 입을 열었다.
” 한 번만이다.”
그리고 혈관음 최후의 도무(刀舞)가 시작되었다.
오직 관견음 한 사람만을 위한 공연이었다.
처음 보는 초식과 초식의 화합, 그리고 변주. 나는 혈관음과의 사투로 상대의 초수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변화속에 또다른 변화가 숨어 있었다. 역시 수천 년을 이어내려온 마교의 절대비공 다웠다.
선렬하는 불꽃이 흩날린다. 도극에 묻어있는 화린(火燐)이라도 되는 마냥, 한 사람이 한 자루의 도를 들고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변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삼재(三才)에서 사상(四像)으로, 사상에서 오행으로 휘몰아치며 태극을 머금는 조화는 이미 현문의 무공에 못지 않은 법칙성을 지니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는 어디선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장단이 바뀌자 찌르레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명천(明天)에 새겨지는 도의 궤적은 차라리 예술이 아니라 노래처럼 느껴졌다.
생과 사를 달리하고, 선과 악을 공유하며, 쉴 새 없이 삶을 거쳐가는 게 무림인이지만… 그 중에서도 달인(達人)이라 불리는 자들은 오로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선악을 막론하고, 결코 자신의 무(武)에 대한 신념을 꺾지 않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는 혈관음이 펼쳐내는 도무의 궤적이 조금씩 비틀어지면서 화려해진다는 사실을 느꼈다. 실용객관적인 궤적에서 벗어나서, 좀 더 보여주기 위한 모습으로 바뀌어지고 있었다.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마삼태도의 모든 비의(秘意)를 전하는 전승의 자리. 숨이 끊어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전해주고 싶을텐데. 어째서 혈관음은 굳이 기력이 더 소모하면서까지 화려한 변화를 추구하는 걸까?
‘ 어째서?’
그 때 나는 우연히 관견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인간으로써 보일 수 있는 모든 변화와 기예를 한 순간에 보여주고 있는 혈관음의 도무는 그 자체로 환상적이었다. 관견음은 멍하니 빠져들어서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신기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그제야 혈관음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런 거구나.’
정이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늠하는가.
마지막은 천공을 열여섯 획으로 나누는 거대한 도강이 치솟아 오르며 용(龍)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 정도 힘이 남아 있었다면 나와 싸워서도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을텐데, 혈관음은 죽음을 택했다. 아마도 영겁회귀를 뚫을 수 없는 한 결과는 같다고 느낀 것이겠지.
숨가쁘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바람이 멎었다.
혈관음의 목숨의 불꽃이 스러졌을 때, 그녀의 몸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멈춰섰다. 칼자루에 깔끔하게 도(刀)를 수납한 채 당초의 기수식을 잡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자세였다.
그 순간, 나는 혈관음이 종남파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라는 은원관계를 잊었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무인에게 예를 표했다.
‘ 잘 가시오.’
관견음은 혈관음의 시신에 다가갔다. 그리고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내 제자가 흐느끼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무검과 하후신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들도 방금 전에 보았던 경세적인 도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보통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분명히 관견음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