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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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음(血觀音)
내게 기억은 장면이다.
영락(靈洛)은 무의식의 심연에서 기울여 떨어지는 물방울을 담아내듯, 이야기하는 상대방의 감정과 경험을 내 대뇌로 가져온다. 그 동안에 과거의 기억은 한없이 얇은 장면으로 잘려서 깃든다.
” 엄마는… 자신의 대에서 마교를 멸망시키고 싶어했어요.”
관견음은 입을 열었다. 너무 울어서 화장이 검게 지워졌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아까와 달리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면서, 망설이는 모습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 마지막 교주가 되고 싶어했죠.”
그리고 흘러들어오는 장면은, 불타는 어둠 속에서 시체가 쌓여있는 협곡이다.
관견음의 기억 속에서 혈관음은 어린 관견음을 끌어안고서 조용히 시체를 일별하고 있었다. 약 15 년 전의 기억인 듯 했다. 쌓여있는 시체는 다들 이름있는 무인들인 듯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었지만, 역시 혈관음의 손속을 당해내지 못했다.
인산인해(人山人海)는 인산인해(人山人骸)가 되어 있다.
‘ 뭐지, 이 참극은…’
강호행을 하면서 살육극은 볼만큼 보아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만들어낸 적도 있었다. 그래서 살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이건 좀 달랐다.
인간임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참혹하고 냉정하게 [찢어버렸다].
” 선하평(宣霞坪)에서 엄마는 대륙에 흩어져 있던 모든 마인(魔人)들을 집결시키고… 500여 명에 이르렀던 사람들을 전멸시켰어요. 300여 명을 일도양단하고, 남은 고수들을 차례차례 없애 버렸어요.”
전투장면이 그려졌다.
숨어 살던 마인들은 정통마공을 익힌 자들로써 마교주의 명령에 따라 집결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마교천하를 이룰 거라는 기대감이 가득했을 것이다. 천겁혈신조차 무너진 당금의 강호에서 마공의 위력을 다시 떨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관음은 대뜸 아광을 최대전력으로 펼쳐서 300여 명의 목숨을 날려버리고, 경악하는 나머지 인간들을 벌레 잡아죽이듯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왜 죽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 혈관음은…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지?”
이해가 안 된다.
” ……”
” 500여 명의 마인들이라면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청난 세력… 팔왕을 만들어서 중원제패를 노리던 혈관음이 일부러 자기 세력을 없앨 이유가 있다는 건가.”
물론 모두가 고수급은 아니리라. 일류급을 겨우 넘어선 자들도 많았으리라.
그래도 일반병사만 500여명이라도 상당한 병력인 판에, 마공을 익힌 자들이 500명이 모여있다면 그야말로 대세력. 마교의 숨겨진 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정천맹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 났으리라.
망설이던 관견음의 대답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 … 무림(武林)을 멸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 무림을?!”
뜬금없이 거대한 답변이 들려왔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머리가 멍해졌다. 동시에 팔왕이란 자들이 희대의 거물이란 사실을 실감했다. 설마 생각하는 범위가 이 정도로 광대할 줄은 몰랐다.
관견음이 말했다.
” 엄마는 어렸을 때 무공을 익히고 싶지도 않으셨다고 해요… 하지만.”
관견음의 기억이 또다시 연이어 들어온다.
아까보다 더욱 포악하고 빠른 속도였다.
선하평의 대살육을 끝낸 혈관음은 어린 관견음을 앉혀 놓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조그마한 여자아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혈관음은 마냥 관견음이 귀여웠다. 세상에 살아있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참동안 예전 이야기를 해 주다가, 증오와 살의를 가까스로 감추었다.
관견음은 어렸을 때부터 혈관음이 마교의 적통이란 이유로 겪었던 수많은 수모와 인간이하의 대우, 그리고 처절한 죽음과 배신을 들었다. 그녀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름모를 마교의 장로에게 노리개로 바쳐졌고 원치않는 임신을 했다.
마교주의 딸이라는 직위는 남존여비의 풍조에서 별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사랑조차 모르고 학대받으며 살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비전마공을 연마했다. 그리고 곧 태어날 자신의 혈육에게만 모든 정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낳은 아이의 운명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 천마천상(天魔天上). 마교의 교주인 천마는 천지아래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
뇌까리는 관견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라도의 운명을 걸어야 했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한과 증오를 전해받은 입장에서 마음이 동요된 것이다.
” 할아버지는… 마교의 종손으로써 천겁혈신을 꺾고 천하제일이 되고 싶어했어요. 심지어 자신의 혈육조차 질투하면서 그 역할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혈통으로 보장된 재질을 탐내서.”
” 어떻게 했던 거지?”
” 인두겁(人頭劫)의 술법(術法).”
관견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진 공포와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인간의 무공재질로 불리는 오성(悟性)은 후천적으로 개발되기 매우 어려워요. 재능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고, 그릇의 한계에 좌절하게 되요. 극히 일부의 선법(仙法)이나 기연(奇緣)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지만 보통 하늘의 별따기죠.
하지만… 할아버지가 인간임을 포기하고 만들어낸 그 술법은 인위적으로 인간의 재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어요. 바로 타인의 재능과 생명을 박탈시킴으로써 자신에게 흡수시키는 식이었어요.
… 엄마와 그나마 친했던 천무대제는 흡령탈혼(吸靈奪魂)이라고 제게 설명해 줬어요.”
흡령탈혼.
한자로 늘어놓으면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상 두렵기 짝이 없는 원리다. 멀쩡히 혼백을 지닌 인간에게서 영기를 흡수하고 혼을 빼앗아서 자신이 먹어치워 버린다. 영혼의 그릇이 박살난 자는 윤회도 하지 못하고 영원히 고통 속에서 망령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관견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고 아연해 했다.
” 설마… 혈관음의 아버지는, 그녀가 낳은… 자신의 손자를 잡아먹은 거냐?”
식인(食人)의 수준이 아니다.
육체를 요리해 먹는 정도가 아니라, 의식을 치뤄서 혼령을 박살내고 으갠 후에 몸체를 갈았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고통이 가해졌을지는 생각도 하고싶지 않다. 영혼의 고통은 보통 육체의 5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도 믿지 못할 말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다들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들 무인으로써 참혹한 일을 많이 겪어 왔지만 지금 관견음이 말하는 모든 과거사는 인간으로써 하지 못할 짓이었다.
그 모든 게 단순히 천하제일이 되기 위해…
특히 의원인 강남신의 하후신은 관자놀이가 시뻘개질 정도로 분노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함을 내질렀다.
” 미친!! 네가 정녕 어미의 죽음 때문에 정신이 나갔구나! 충격을 받았다고 아무런 말이나 지껄이는 게 허용될 거 같으냐!!”
그에게 있어서 인두겁의 술법은 단순한 미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거죽을 쓰고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는 걸 믿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하후신의 어깨를 잡으며 진정시켰다.
” 아니오. 내 제자의 말은 사실일 것이오.”
” 으음.”
영락은 감정과 기억, 경험을 통째로 읽어들인다. 거짓이 있었다면 내가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게다가 관견음이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것도 하나 없었다. 하후신은 격앙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 엄마는 약 기운 때문에 오빠들이 유산되었다고만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 날 실체를 알게 되고… 몇 년 동안 분노와 절망으로 미쳐버리고 말았어요. 폐인이 되어서 살아가고만 있었다고 해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위해 태어났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잠깐동안 읽었던 혈관음의 마음 속에서, 그런 색깔을 띈 의문이 잠시 떠오른 걸 봤었다.
스스스
계속해서 핏빛 과거는 꿀렁거리며 내 대뇌를 헤집었다.
증오와 광기로 가득찬 과거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런 기억을 담고 살아야 했던 관견음이란 아이의 정신력도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견음을 무릎에 앉혀 놓은 혈관음은 말한다 –
[ 나는 골방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단다. 왜 나에게만 절망과 불행이 닥쳐오는지… 내가 태어난 건 왜인지… 태어난 이유와, 내가 해야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관견음은 그 때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대화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어린아이답게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고만 있었다. 붉고 검은 염옥으로 불타는 하늘 아래에서, 혈관음은 피빛으로 의복을 비추고 있었다.
[ 그리고… 증오하기 시작했다.강해지려고 하는 모든 무인(武人)들의 세계, 무림을… 무림이란 세계가 존재하는 한 모두가 무한히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어졌단다.]
관견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슬픔과 고독이 느껴져서, 그저 울음을 터뜨렸다.
주륵
다시 눈물이 관견음의 뺨을 타고 흐른다.
” … 전 모르, 겠어요…”
관견음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무지 생각지도 못하는 인생사에 대한 혼란과, 세상의 유일한 혈육이 사라져버린 슬픔이 계속해서 관견음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 사람들을 그토록 무참하게 살해한 엄마가 싫었어요… 그래서 11살 때 천마삼태도의 기본기만 전수받고, 강호로 뛰쳐나와서 무작정 헤맸어요…”
무참하게 살해할 만 하다. 아마 혈관음은 자신을 제외한 마교의 모든 존재를 백여년 동안 말살해 왔을 것이다. 혈관음의 아버지, 남편은 처참하게 살해되었으리라.
만일에 마교의 후예가 보이면 언제든 처리하려고 준비하면서 지난 백 년을 살아 온 게 혈관음일지도 모른다.
” ……”
그녀가 팔왕을 만든 건, 언젠가 태왕과 유검이 무림을 없애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인가…
” 그저 엄마가 나쁘다고 생각해서, 그걸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관견음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설프게 격려를 해 주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어설프게 호통을 쳐도 의미없을 것이다. 혈육의 인연이 이토록 무참하게 단절된 상황에선, 타인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설령 내가 관견음의 하나뿐인 스승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용히 말했다.
” 아까 네 어머니께서 천마삼태도의 오의(奧義)와 비기(秘技)를 모두 펼쳐보였다. 너는 그걸 모두 충분히 보아 익혔느냐?”
뜬구름 잡는 얘기였을 것이다. 관견음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저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옆에 있던 무검과 하후신이 불신의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강호에서 절정고수로 불릴 정도인 그들도 방금 혈관음의 도무(刀舞)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관견음의 말이 사실인 걸 알고 있다.
관견음의 공감각은 이미 쾌도란 분야에 있어서 사상최강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서 검군을 통해 안력훈련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목이 대단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래, 쾌도라는 하나의 분야에 있어서 관견음을 뛰어넘을 천재는 강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단정지을 수 있다. 무신마의 손자인 효룡이라도 관견음의 발끝에도 못 따라간다.
‘ 나는 좋은 제자를 얻었구나.’
우웅
갑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불살검이 울렸지만, 유래를 알 수 없는 검이기에 이상현상으로만 느꼈다. 불살검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걸 이 때 깨달았다면, 미래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혈관음이 펼친 건 29수 109획 44향이다. 수(手)는 무공의 큰 흐름이고 획(劃)은 파생되는 변화이다. 그리고 향(向)은 획에서 다시 뻗어져 나가는 잔가지다. 어떤 의미로 보아도 천마삼태도는 절세무공이다.”
” 그래서요?”
관견음이 볼멘, 분노마저 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부모의 원수이기도 하므로 이 상황에서 감정없이 대할 수는 없으리라.
” 잘난 스승님께선 제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데요?”
나는 화내지 않았다. 화낼 국면도 아니고 그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해야 할 말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말재주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 … 천마삼태도는 25수 102획 10향으로 끝나도 좋은 무공시연이었지. 원래 오의전수는 잔가지를 치면 안되는 거다. 그러나 직접 검을 마주댄 나는 그녀가 필요이상으로 잔가지를 많이 쳤다는 데, 내 무인의 이름을 걸 수 있다.”
” 네…? 어째서?”
관견음은 이상함을 깨닫고 반문했다.
나는 혈관음의 시신이 너무 오랫동안 찬바람을 맞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녀의 몸 주위에 기를 둘러서 보호했다. 일체의 바람이 들지 않는 진공상태로 만든 후에야 입을 열었다.
” 네가 여자아이니까.”
” ……?”
” 네 어머니는 분노만으로 살아왔겠지만… 마지막에는 조금이라도 장식을 꾸며서 자신의 딸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복수의 도구로 삼아왔던 무공이라고 할지라도.
… 하염없는 인생사.
하지만 혈관음은 분노와 절망으로 얼룩져 있던 자신의 인생에서, 기백년이 지나서 가지게 된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남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걸 알게 되어도, 앞으로 살아나갈 아이에게는 조금이라도 기쁨을 남겨주고 싶었으리라.
그게 부모의 마음이다.
” 아아아아아아아….!!!!”
나는 관견음의 오열을 들을 수록 마음이 후벼파졌다. 무수한 고독과 고통은 두렵지 않았지만 타인의 아픔을 전해듣는 건 괴롭다. 내가 타인에게 마음을 전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 ……”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수련할 마음을 잊은 채 공허하게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