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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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鬪神)
혈관음은 종남파의 산문을 올려다보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유천영과 하은천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꺼림칙했다. 원래 유천영을 상대하기로 한 게 혈관음이었기에 적수를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 흐음. 십이율주(十二律主)가 나설 정도로 강한 녀석인가?”
혈관음의 질문에 천무대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화산규약지회 당시에 유천영을 직접 만나서 무위를 겪은 바가 있었다. 천무대제와 하은천이 확실하다고 보증했기 때문에 혈관음을 유천영의 상대로 배치한 것이다.
” 그건 아닐세. 분명 이백년 이래 종남파 최강인 건 확실하지만… 놈은 아직 어려. 도리어 저 나이에 우리와 대등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 …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아.”
혈관음은 유천영을 높게 평가하는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유천영에 대해서 딱히 악감정이 없었기에 객관적인 평가였다. 유천영의 진경(進境)은 놀랍긴 하나 대단하지 않다. 이미 무림역사에는 유천영 이상으로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낸 천재들이 수두룩하게 있었다.
더욱이 하은천을 앞에 두고 견주어보니 더욱 그렇다.
하은천을 팔왕에 끌어들인 건 10여년 전의 혈관음이었다. 당시의 하은천은 이십대 청년의 나이로 동방 십이율을 제패하고 만하령문의 주인인 하백(河伯)이 되었다. 중원인들은 변방무림의 일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이건 정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십이율(十二律).
넓게는 하북에서부터 동영의 끝자락에 이르는 반도와 요동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12개의 문파를 일컫는 말이었다. 동방무림은 중원과 달리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세력보다는 대지모 신앙에서 발달한 독특한 뿌리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읍루족이나 습신족의 무예가들은 한때 북방의 공포로 자리잡으며 섣불리 오랑캐를 계도한다고 찾아온 중원인들을 박살냈다.
현재의 거란이나 여진족의 수뇌부들도 십이율의 문주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거나 혈연관계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고려 내부에도 호국동맹(護國同盟)이라고 하는 기묘한 문파가 존재해서, 국가와 무림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비록 중원보다 무인의 수가 적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중원무림에 뒤지지 않는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십이율은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그만큼 자존심이 강해서 손쉽게 협력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에 잘 협력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국적의 차이때문에 십이율끼리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많았다. 고조선 이래 동방무림은 십이율과 기타중소문파의 대립만으로 항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때로는 십이율의 입장차이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는 일도 상당히 많았다.
그 십이율의 문주를 찾아다니면서 순수한 무예와 자질로 통합맹주의 자리를 차지해서 십이율주가 된 게 이십대의 하은천이었다. 십이율주 개개인의 무위(武威)는 결코 중원 구대문파의 장문인에 뒤지지 않았다. 개중에 명검산장(冥劍山莊)이나 북해빙궁(北海氷宮), 조의선인(帛衣仙人)이 속해있으니 어떤 의미로는 통일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하은천은 고대시절에 봉인되어 있던 신병 은하구절편과 월하정야갑의 주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난이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태극기공(太極氣功)을 완벽하게 익혔다. 그는 반선(半仙)지경에 들어서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절대자들을 제외하고 최강을 자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혈관음은 하은천이 십이율을 통일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찾아가서 팔왕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하은천의 승락을 받아낸 후 대련형식으로 몇합을 겨루었는데 진아광을 쓰지 않으면 100여초를 버티기 힘들다고 느꼈다. 혈관음은 처음 하은천과 싸웠을 때를 떠올리곤 살짝 몸을 떨었다.
‘ 천포무장류(天砲武將類), 경천십육기, 낭아비류현, 사신무(四神武)라고 해도 내 천마삼태도로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대성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태극기공으로 저렇게 강해질 수 있을 줄은.’
태극기공은 동방무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널리 알려졌고, 가장 고수가 되기 힘든 무공이었다. 십팔자 구결로 이루어진 단순한 심공(心功)의 일종인데 유(柔)나 발(發), 나(拿)의 수법은 응용력이 좋아서 많이들 익혔다. 그러나 10결수법을 모두 익히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오성이 필요했으며 다 익힌다고 그리 강해지지도 않았다. 뿐만아니라 몇십년을 연구해도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 연결방식과 초식이 존재해서 불가해로 남았던 무공이었다.
혈관음은 회상을 마치고는 눈을 크게 떴다.
” 그런데… 적멸존자. 하은천이 왜 여기 있지?”
하은천의 행사는 비밀스러웠다. 특히 요즘은 화산에서 제자를 잃은 충격으로 상심해 있을게 뻔했다. 팔왕들은 굳이 하은천의 행보를 캐지 않았다. 섣불리 신경을 건드렸다가 어떤 화를 입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용한 암자에서 제자의 넋이나 위로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하은천이 종남산까지 와있는 건 의외였다.
적멸존자는 허공의 지팡이에 엉덩이를 앉혀놓고 웃었다.
[ 크크크… 그답지 않은 변덕이 끓어오르는 거겠지. 종남파를 피의 제물로 바치고 싶지 않겠는가.]적멸존자는 굳이 하은천과의 거래내용을 다른 팔왕에게 알려주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은천의 행동을 분노 때문인 것으로 몰아가기로 결정했다.
” 유천영이란 놈 떄문에 자기 제자가 죽은 거라고 생각해서?”
[ 내가 그의 마음을 알 순 없지… 흐흐.]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놓자 혈관음과 천무대제는 수상쩍어하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하은천과 유천영의 1대1 대결이 성립되어 버렸다는 사실이고, 하은천이 질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팔왕들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종남파를 멸망시키기만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천무대제는 한껏 투기를 불사르는 유천영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차갑게 읊조렸다.
” 당랑거철(螳螂拒轍)이 따로 없군.”
천무대제는 무이궁(武夷宮)의 궁주라서 십이율의 위명을 잘 알고 있었다. 무이궁의 호적수뻘 되는 문파가 십이율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하은천을 대할때 제일 조심스러운 팔왕이 천무대제인 게 당연했다. 천무대제도 상당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설마 20대에 십이율의 문주를 모두 꺾는 자가 나올거라곤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 적멸존자. 일단 진해는 물리는 게 어떤가? 괜히 잃으면 아깝잖나.”
[ 크크… 그 말대로군.. 일단은 반만 남겨두지.]스스스스
두 절대고수의 대결에 휘말리면 진해가 몇마리든 송두리째 망가질게 뻔했다. 적멸존자가 진해를 다 물리고 나자 팔왕들의 시선은 장내에 집중되었다. 마치 철없는 애송이의 처형식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은천이 입을 열었다.
” – 뭐 그렇군. 우선은 병기의 우열이 문제인가.”
무슨 소리일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하은천의 시선이 내 불살검에 향한 것을 눈치챘다. 그가 지닌 무기는 은하구절편, 이 세계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힐만한 신병(神兵)이다. 어지간한 무기는 스치기만 해도 부숴버릴 수 있으리라.
나는 불살검을 중단세로 겨누어 잡으며 대답했다.
” 무신마(武神魔)와 겨루어도 그런 말을 하시겠소?”
” 흠. 무신마와 겨룬다면 무기를 따지진 않을걸세. 그의 흑도(黑刀)도 신병은 아니네만… 무신마는 현 중원의 제일고수. 그라면 약간의 열세쯤은 자기 무공으로 극복하겠지.”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였다. 그리고 그 평가는 내가 ’10일’중에 보았던 그대로라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싸우지도 않고 천리 밖을 내다보는 듯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하은천은 은하구절편을 허리 아래로 내렸다.
” 자네의 검은 쉽게 부러지진 않겠지만 애초에 사람을 ‘벨 수 없는’게 목적이야. 자네가 그 검을 가지고 나와 겨루는 건 나를 모욕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네.”
내가 하수인 입장이다.
진검승부에선 충분히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 ……”
” 개인적으론 누가 그 검을 만들었는지에 흥미가 가는군.”
맞다.
내가 임의로 불살검(不殺劍)이라고 이름붙였지만, 이 검은 정말 말도 안될 정도로 날이 안 든다. 내 수준이 되면 병기의 날카로움에 구애받지 않지만 – 은하구절편같은 신병과 겨룰 때는 얘기가 다르다. 월하정야갑과 한 쌍이 되면 천재지변도 일으킬 수 있는 무기를 상대로, 사람을 죽일 수 없게 만들어진 검을 사용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 나도 잘 모르오. 하지만 이 검은 나와 강한 인연이 있는 것 같소. 그간 나는 너무 쉽게 사람을 죽여왔던 듯 싶어서, 자기수행의 일환으로 아껴서 사용하고 있소.”
” 자네는 쉽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가?”
” 검을 잡는다는 건 생명을 거는 일. 그러므로 고민할 일은 아니오. 허나 죽이지 않음으로써 얻는 게 있다고 생각할 뿐.”
그러자 하은천이 빙긋이 웃었다.
” 내 아버지와 비슷한 말을 하는군…”
그는 하늘을 잠시 쳐다보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치 실재하는 어둠이 존재하는 것처럼, 잠시 공간이 일그러졌다. 눈의 착각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 내가 젊은 나이에 태극기공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3대에 이르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네. 조부께선 태극기공의 완전한 18자 구결을 모으셨고, 아버지께서는 백전백패(百戰百敗)라는 수치스런 외호를 얻으면서까지 구결의 응용과 식(式)에 심혈을 기울이셨지. 그리고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철든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단잠을 자지 못하고 무공을 연마하고 있네.”
” ……”
하은천의 재능은 대공자나 모용휘급 이상이다. 아무리 불철주야 노력을 해도 고작 10여년만에 절대고수의 경지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하은천의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느끼는 점을 물어보았다.
” 초식이나 수준은 노력과 재능으로 갖출 수 있소. 그러나 내공은 세월이 필요한 법… 당신은 어떻게 태극기공을 완성했단 말이오?”
” 그 질문은 자네 자신에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 그건.”
하은천의 핀잔에 순간 할 말이 없어져서 멈칫거렸다.
사실 나는 수련한 시간만큼의 내공을 지니고 있을 뿐이지만 10일의 하루를 모르는 타인이 보기에 나의 내공은 불가사의하다. 하은천은 가볍게 웃었다.
” 난 격체전공(隔體傳功)은 받지 않았네. 영약도 먹지 않았어. 태극기공은 사로(邪路)가 원천봉쇄되어 있어서 속성으로 내공을 쌓지도 못했지. 이렇게 보면 나는 천하에 다시없는 바보이겠지만.”
” 으음.”
” 태극기공은 쌓는 게 아니라 소우주(小宇宙)를 ‘여는’ 심공(心功)일세. 그걸 터득했으니 그때부터 내게 내공의 경계는 의미가 없어진 게야.”
” ……!!”
그 순간 머리가 둔중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 하은천이 말하는 경지는 단전의 개념을 초월해서, 자기 주변의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이용해서 무공을 펼치는 수준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기를 출납(出納)하는 입구의 갯수를 늘리기만 하면 되므로 내공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태극기공을 통해 그걸 깨달았다면 10년만에 절대고수가 된 것도 납득할 만 하다.
그러나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나는 70여년 이상 노력에 몰두하고, 사투를 거치고, 또 사투를 거치고, 심마를 극복하면서 깨달음을 십여 번 이상 거치고 나서야 겨우 ‘여는 법’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의념(意念)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해서 수련한다는 건 내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충격받거나 말거나 하은천은 말을 이었다.
” 허나 불행하게도 내 아버지께선 그 비밀을 깨닫지 못해서, 십팔자 구결과 십대요결을 온전히 구사할 수 있었음에도 내공이 비천해서 늘 패배하셨지. 때때로 이길 수 있는 국면에서도 크게 져서 상처를 입었고, 누적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네.”
” ……”
” 백전백패로 불렸으나 아버지께선 태어나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으셨네. 나 또한 마찬가지고.”
하은천은 전에 없이 단호한 의지로 또박또박 말했다.
” 불살(不殺)은 신념이고, 선한 자의 자존심이다.”
그의 말을 듣자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은천이 나쁜 의도로 말하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그는 분명히 내가 확신을 지니지 못하는 불살에 대해서 용기를 북돋아줄 의도로 말한 것이다. 적인데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다.
그러나 해야할 말은 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하은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불살이라고 할 수 있겠소?”
불살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 무슨 말인가.”
당황한 기색이 없다.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는 하은천의 얼굴은 처음과 그대로였다.
” 나는 팔왕(八王), 양대무신, 천무삼성, 비뢰도… 어느 한 쪽이 정의라고 말할 생각은 없소. 우리 모두가 자기가 믿는 진리를 위해 싸워나갈 뿐이니. 그 결과에 무엇이 있든간에 승복할 수 있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우우우우 –
아마 이 말을 한 다음에 바로 사지가 뜯겨나갈지도 모른다. 하은천의 기세가 점점 광폭해지고 있으며 내 살갗이 엄동설한에 던져진 것처럼 시리다. 의도적으로 내가 말을 잇기 힘들도록 견제하는 것이다.
” 그러… 나! 팔왕은 분명히 중원무림을 피로 물들이려 하고 있소. 그것도 천겁령과 합세해서 전대의 마두를 사역하는데 거리낌이 없소. 심지어 진해(眞骸)를 동원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소.”
” ……”
하은천은 힐끔 발밑에 널부러져 있는 진해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강시술은 비인간적인 행위의 선두주자나 다름없다.
” 팔왕 하은천… 말해 보시오. 혈관음과 적멸존자가 정말로 무고한 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거요?”
하은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울한 눈으로 내 눈동자를 마주볼 뿐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마주친 것 뿐이었는데 마치 전신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전율했다.
‘ 이… 이건 마치 무신마와 대면했을 때 같은… 아니 그 이상?’
그제서야 나는 눈 앞의 하은천이 일전에 봤을 때보다 몇 배나 강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부터 수준차가 나서 잘 몰랐는데, 벽이 더더욱 높아진 걸 실감해버린 것이다. 또다시 아득한 벽이 생겨난 느낌이다.
하은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 유천영.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건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한다는 걸 의미하네. 좋은 일뿐만이 아니라 나쁜 일도 함께 하기에 동료라고 하는 것이지. 내 개인의 의지가 불살이라고 해도, 피를 봐야만 한다면 감수해야 하는 법.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욕을 먹어도 납득할 수밖에.]
” 무슨…”
[ 듣고만 있게.]반응을 보이는 나를 멈춰세운 하은천의 전음이 빠르게 들려 왔다.
[ 원래 나는 십이율의 분노를 대리하는 존재. 지금까지 변방무림을 박해해 온 중원인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보내는 게 목적이었다. 허나 흐름이 점차 가열되고, ‘괴물’ 두 명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게 되어서 예상이 틀어졌네. 자네 말대로 팔왕이 혈겁을 일으키고 천겁령이 악랄한 짓을 벌여도 막기 힘든 지경까지 와 버렸지.]원래 하은천은 팔왕에 속한 절대고수들이 마음대로 폭주하지 않게 할 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동시에 중원에 가볍게 복수한다는 목적도 달성시키기 위해. 그러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절대자들이 존재하는 바람에 자기 의지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 나는 오늘 종남파의 멸망을 내버려두고 그냥 갈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중원인들이 몇 명 죽든말든, 내 손으로 죽이는 게 아니면 상관없다는 심정이었지. 내가 이렇게 나선 건 자네의 목숨을 아깝게 여겨서일세.]나는 하은천이 다른 목적으로 종남산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마도 하은천은 정말로 오늘 종남파 멸망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팔왕 중 누군가와 ‘거래’를 하거나 정보를 얻기 위해서 온게 아닐까…?
[ 내 손에서 일단 버텨보게. 그러면 오늘의 종남파 멸망은 물릴 수 있을 게야.]하은천은 처음부터 나를 봐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 믿기지 않는군. 동료들의 원망을 사고, 당신 체면이 추락할 거요. 생판 남인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만일에 하은천이 호언장담을 해놓고 일백 초만에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팔왕 사이에서 비웃음을 살 것이다. 체면과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절대고수들 사이에서 그 모욕은 견디기 힘들다.
하은천이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 착각하지 말게. 내가 종남파와 자네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호의는 여기까지네.만일에 백여 초를 전개하다가 자네의 실력이 기대이하거나 실망스럽다면 나는 가차없이 자네를 격패시킬걸세. 설마 유천영 자네는 그정도 자존심도 없는 건 아니겠지?]
” ……”
진심이다.
나는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간단하다.
그냥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지, 있는 힘을 다해서 증명해 내기만 하면 된다. 상대의 수준은 무신마급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혈관음과의 격전 이상으로 두근거리고 있다.
” 한 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대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