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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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太王)
망량의 말에 혜정대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 드리는 건 문제가 없소. 외교관계의 댓가라면 대환단과 같은 외물(外物)을 내어드리는 건 어렵지 않으나…”
망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의뭉스러운 성격을 싫어하는 자 같았다.
” 말 질질 끌지 마.”
” 그와 당신은 오늘 처음 만나서 생면부지인 사이가 아니오? 그리 귀중한 기회를 날려도 되겠소?”
혜정대사의 말은 맞았다.
대환단이 소림사 최고의 영약이자,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귀중한 신물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물건일 뿐이다. 중요한 건 망량의 ‘부탁’에 들어있는 가치다. 십이율이나 정천맹같은 거대한 단체끼리에서 ‘빚’이란 건 때로는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인간 수백 명의 생명을 담보로 할 때도 있다.
불도에 귀의했다고 하지만 정치에 밝고 이해타산도 잘하는 혜정대사 입장에서는 망량의 제안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망량이 피식 웃었다.
” 불도에서는 인연(因然)이란 걸 가장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나 또한 왠지 이 놈에게서 그런, 애매모호한 걸 느꼈을 뿐이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결국 내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니 그대가 걱정할 필요 없어.”
” 그리 말한다면 상관없겠지.”
혜정대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에 있던 사대금강을 돌아보았다.
” 공무. 불심전(佛心殿)에 가서 대환단을 가져 오거라.”
” 네.”
휘익
사대금강 공무가 빠른 경공으로 사라졌다. 망량은 내게 말했다.
” 언짢은 표정이나 기쁜 표정이나… 아무것도 짓지 않는구만.”
” ……”
” 네 녀석은 정말 무심(無心) 그 자체구나.”
망량의 말대로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대환단이 그다지 나에게 효력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데다, 공력이 회복되더라도 큰 의미가 없는 일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공무가 하나의 묵갑을 들고 찾아왔다. 갑 안에서는 심상치 않은 영기(靈氣)가 감돌고 있었는데, 아마도 대환단이 지니고 있는 대자연의 기(氣)가 저절로 뿜어져나오는 영향일 것이다.
공무가 공손하게 내게 대환단이 든 묵갑을 내밀었다.
” 받으시지요.”
” 그러지요. 감사합니다.”
나는 천천히 묵갑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끄러미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망량이 재촉하듯이 말했다.
” 이봐. 받은 김에 이 자리에서 복용하지 그래? 이 자리에서 딱히 해를 끼칠 자도 없고, 사바세계에 나가면 그게 더 위험할 거다.”
” 전 그리 먹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만.”
” 뭐야? 대환단을 팔기라도 하겠단 소리냐? 그건 적어도 외교의 댓가니까 함부로 그런 짓을 하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거다.”
나는 망량의 으름장에 슬쩍 장내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 말대로 혜정대사는 ‘대환단을 판다’는 소리가 나오자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래 대환단이라는 건 소림사의 명예와도 일부 관련된 상징이었다. 시중에 돈 때문에 팔아넘기는 일 자체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피같은 영약을 외부인에게 송두리째 넘기는 것도 억울할텐데, 세상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는 싫을 게 뻔하다.
‘ 일단 먹고 봐야겠군.’
나는 별 수 없이 묵갑을 열었다. 묵갑을 열자 코 끝에 향내가 전달되어 왔다.
대환단은 생각과 달리 검붉은 빛을 띈 채 미묘하게 각진 형태였다. 알약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사탕에 가까워보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대환단을 집고 나서 망설임없이 목젖 뒤로 삼켰다.
꿀꺽
대환단이 몸 속으로 들어오자, 잠시 후 전신에 열기가 치솟아 오르면서 내단이 급격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망량은 설마 바로 삼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 심법을 운용해! 가만히 있으면 양기(陽氣)때문에 기혈이 뒤틀릴 거다.”
” 그러겠소.”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천히 내공심법을 운용했다. 물론 육합귀진신공을 대놓고 운용했다가는 사람들의 이목에 띌테니, 세간에서 건강용으로 권장되는 삼재심법을 사용했다. 어차피 공력을 쌓는 속도 외에 안정성은 크게 차이없기 때문이다.
우우웅
목젖을 타고 넘어가서 내장 초입에 다다르자 대환단의 열기가 확 퍼지면서 내공이 꽉꽉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 이걸 그대로 경락에 갈무리하면 그대로 60여년 분의 내공이 되겠지만, 나는 공력을 최대한 수습하기보다는 몸의 안정을 추구하기로 했다.
그렇게 반각 정도 심법을 운용할 때였다.
스스스
갑자기 전신에 충만하던 힘이 어디론가 쭈욱 돌아가는 듯 했다. 내가 반쯤 눈을 뜨자, 전신의 모공으로 기운이 쫙 빠져나갔다. 잠시동안 느꼈던 강력한 내공의 실감만을 남긴 채 대환단이 내 몸속에서 그대로 증발해버린 것이다.
‘ 역시.’
내 몸은 시간의 뒤틀림 때문에 더 이상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불변(不變)상태가 되어버렸다. 대환단으로 내공을 높이려고 해도 인과율을 초월하지 못하는 이상, 허공에 그대로 증발해버리는 게 당연한 것이다.
나는 숨을 들이쉰 후에 말했다.
” 대환단의 효력이 없소. 미안하게 됐구려.”
” 어?! 그럴 리가…”
망량이 당황해하며 내 등에 손을 대었다. 그는 내 몸에 흐르는 내공을 감지하다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 때, 땡초놈아. 너 혹시 가짜 대환단을 준 거냐?”
혜정대사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강하게 부정했다.
” 소림사를 모욕하지 마시오. 결코 사파 무뢰배처럼 공갈을 치진 않소!”
” 소림사의 이름을 걸고 진짜 대환단을 줬다고 맹세할 수 있는가?”
” 물론이오! 방금 드린 건 십오 년의 세월동안 세밀하게 제작한 진짜배기 대환단이오.”
” ……”
소림사 방장이 소림사의 명예를 걸고 확신한다.
건방지기 그지없는 망량으로서도 더 이상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 말에 깃들어있는 진실성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망량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 말도 안 되는군. 대환단을 먹으면 효력이 없는 게 더 힘들잖아? 차라리 역기(逆氣)때문에 경락이 파열되는 게 더 일반적인데, 이건 마치 무(無)로 되돌아간 것처럼 아무런 느낌도 없어!”
” 그게 정말이오?”
혜정대사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런 일은 처음 들어보는구려. 대환단의 기운은 천하에 다시없는 극렬한 기(氣)의 집합체… 그게 공허속으로 사라지는 건 있을 수가 없소.”
” 그러니까 하는 말 아냐!”
망량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 제길. 영약을 줘도 못 처먹으니 대체 네놈은 어찌된 놈이냐? 정말 알 수가 없구나.”
” ……”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점차 망량의 표정이 사나워지더니, 그는 기어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크아아아!! 짜증난다! 네 녀석은 나와 함께 십이율(十二律)까지 가 줘야겠어!”
” ……!!”
” 해동밀교주(海東密敎主)라면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망량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손을 내뻗어서 내 소매자락을 잡으려 했다.
‘ 이런.’
아까 추경을 겨뤘을 때와는 달리 강한 내력이 깃들어 있는 공격이라서 내 입장에서는 알고도 잡혀줄 수밖에 없었다. 피할만한 신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순간을 파악했다면 떨쳐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나는 천천히 반보(半步)를 옮기며 망량의 헛점에 검집을 갖다 대었다.
스윽
망량은 별 내공도 없이 내가 헛점을 찔러오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내가 찌른 헛점은 정확했지만 망량의 내공이 강대하기 때문에 그저 기운을 돋우어서 튕겨내면 그만이다. 내가 의미없는 발악을 한다고 생각하는지 망량은 소매를 잡아당겼다.
부웅
내 몸이 휙하고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하지만 이내 망량이 반대편 손을 떨치면서 나를 내던졌다. 그 순간에 내 검끝이 정확하게 망량의 인중으로 향했고, 아무리 내공이 없어도 약점을 찔리는 건 부담스러운지라 망량이 내던져버린 것이다.
” 이 자식!”
내가 허공에서 반바퀴를 돌며 자세를 다시 잡자, 망량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그는 체면이고뭐고 신경쓰지 않고 나를 제압할 생각인지 모든 내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망량의 좌수(左手)가 내 어깨 혈도를 제압하려 들자 내 속도로는 도저히 대항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 내공이 모든 걸 결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검집에서 검이 뽑히더니 찰나의 순간에 검날이 망량의 좌수를 막아갔다. 원래라면 망량의 공력 때문에 내 몸이 피떡이 되어서 튕겨나가겠지만, 망량은 검에 서려있는 예기(銳氣)때문에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뒤로 물렸다.
” 아니?”
잔영을 남기며 뒤로 물러선 망량이 말했다.
” 자연스럽게 검기(劍氣)를 전신에 흘리다니… 신검합일(身劍合一)을 몇 단계 초월했다는 거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검합일은 내공에 구애받는 경지가 아니다. 중소문파의 문주 정도면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봐도 좋고, 신검합일을 초월하면 어검술이나 검강, 검향(劍香)의 경지에 오른다고 일컬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결코 망량의 일 수를 막지 못한다. 망량의 실력은 숨겨진 강호 전체를 통틀어서 적어도 30위권 안에 들어가는 극강한 수준이고, 어검술조차도 박살내는 게 가능하다. 망량이 내 검기때문에 물러선 건 순전히 내 검에 흐르는 기운이 그의 호신강기로도 방어가 불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스스스스스
망량의 표정이 일변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못된 장난을 보는 눈빛이었지만, 내 기세가 점차 자연을 닮아가며 늘어뜨린 검극(劍戟)이 그의 정면에 겨누어지는 순간 달라졌다. 숨길 수 없는 경이(驚異)을 담고 있었다.
” 무형검(無形劍)….”
망량의 침음성에 장내에 모여있던 무인들이 깜짝 놀랐다.
소림사 방장, 혜정대사는 체면을 잊고 외쳤다.
” 그 전설의 경지가, 내공도 없이 가능하단 말이오?!”
” 닥쳐봐 땡중. 나도 놀라고 있으니까.”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영겁(永劫)의 공간에서 참오했던 천둔(天遁)의 하나를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동안 팔왕같은 강적들과 겨루면서 너무나 강기(罡氣)에 의존한다고 생각했고, 강기는 결국 밀도(密度)로 결판이 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강기의 밀도에 신경쓰다보면 결국 검기(劍技) 그자체가 무뎌지면서 균형이 흐트러졌다.
강기를 더욱 응축하면 강환(罡環)이 되어서 막강한 위력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집적율이 높아진다고 하는 게 상대방보다 강하다는 뜻은 될 수 없다. 단지 기(氣)의 이해가 높다는 것일 뿐, 종래에는 자기 내공을 상대방에게 자랑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무공수법을 연마하지 말고 평생도록 내공심법만 연구해도 되는 일. 검강이나 검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결국 사도(邪道)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수억, 수십억에 이르는 엄청난 무도(武道)를 받아들이면서 기존에 지니고 있던 유운검법의 경지가 흐트러지고 부숴지고 종래에는 사라지는(滅) 경지를 체험했다. 내가 검술이란 걸 펼칠 수 있다는 사실도 수십여 년간 잊어버렸다. 그 엄청난 충격에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나는 이미 거대한 길에서 한 발짝을 내딛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엄청난 세월 속에서 영혼까지 부숴지는 체험을 하면서, 내가 기존의 검술에서 지니고 있던 버릇, 생각, 기술, 성향이 모두 초기화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천둔이라고 하는 거대한 길보다 더욱 거대한 무종(武宗)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주루에서 일하고 있던 지난 세월동안 별다른 수련을 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수련이라고 하는 것은 – 자신의 그릇에 색깔을 담는 일. 내 영혼에 천문학적인 검로(劍路)가 담겨있는 상태에서 육체를 움직이며 되새겨봐야 무의미한 일이었다. 무색(無色)인 상태 그대로 나의 길을 찾아가는 게 전부이다.
망량은 나를 노려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퍼엉!
나는 별다른 호신강기를 두르지도 않았지만 망량의 지법(指法)은 내 지척에서 폭발해 버렸다. 내 정신의 속도가 검을 따라가면서, 일순간만큼은 언제든지 감지해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망량이 이내 경탄했다.
” 너같은 검객(劍客)은 처음 본다. 십이율에서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떤 수련을 해야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거냐?”
” 수련…?”
” 그래. 엄청난 수련이 아니면 도저히… 네 주변에 둘러쳐져 있는 검계(劍界)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망량 또한 준 팔왕급에 이르는 초강급 실력자.
그가 내공도 없는 내게 공격해오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의 눈에는 내가 대응해서 반격할 수 있는 검로가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공때문에 평균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일순간의 속도로 능가할 수 없다면 우위를 볼 수 없다.
” 의미 없소.”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 응?”
” 나는… 그저.”
순간 영겁동안 느꼈던 순간순간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나서, 나는 검을 늘어뜨리며 씁쓸하게 읊조렸다.
” 이 검 끝에 천 년을 담았을 뿐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