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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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太王)
도편수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어지더니, 이내 10년은 늙은 듯 했다. 그는 짧은 순간에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인중의 주름이 모여 있었다.
입술을 약간 떨던 도편수가 말했다.
” 패배를 인정한다.”
그렇게 말하고는 홱하고 고개를 돌렸다.
” 정진하고, 반성하겠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서야 그가 충격을 떨쳐내고 궤도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십이율 문주 중에서 세손가락에 꼽히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으니, 10년 후면 그는 분명히 천하무림의 축으로 꼽히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때였다.
마검(魔劍)
아수라(阿修羅)
그저 이야기로 흘려들었던 전설의 마검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아른거리기까지 했다. 잠시 후에는 환영처럼 하은천과 태왕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 시야를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 뭐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은천과 태왕의 대결 직전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하필 지금 마치 회상하듯이 선명하게 떠오를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내가 곤혹스러워 할 때 서서히 태왕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검끝에 삶을 닮고 검끝에 죽음을 그린다. 한 동작 한 동작에 고뇌, 번뇌, 행복, 철학, 삶, 죽음, 인간, 세계… 모든 것이 그려지고 있었다.
태왕의 검은 이미 형식와 무형식, 초식과 무초라는 것을 벗어나 있었다.
이미, 그것은 – .
무림(武林)의 검(劍). 그 역사(歷史)의 총화(總華)에 다름 아니었다.
… 하지만 – !!
나는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며, 어째서인지 불안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아까 설명으로 들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하게 뒤틀려버리는 감각이 심상치 않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으면서 어둠처럼 스며든 영락(靈洛)이 뇌를 뒤흔들었다.
엉성해진다.
흐트러진다.
부스러진다.
사라진다.
면면히 이어지지 않고 어느 순간 끊어진다. 지독한 부조화(不造化)가 나타난다. 무한히 자유롭고 고색창연하던 불멸의 검학이, 한 순간에 타락하여 사라지고 있었다.
– 무극조차 넘어선, 파천황(破天荒).
완벽하게. 그야말로 완벽하게 사라지고 어그러지고 부서지고 부정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차라리 대혼돈(大混沌). 그 혼돈 속에서 다시금 하나의 검(劍)이 초연(超燃)하였다.
검(劍)은 혼돈의 우주(宇宙)속에서 오로지 고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오만했다. 천지 아래 자신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진무(眞武)
아수라파천(阿修羅破天)
그리고 그에 맞서서 하은천도 초월절기, 반래삼보를 시전했다.
‘ 이럴수가…!!’
그렇다.
나는 지금 나유타영겁의 시간을 지나면서 증폭된 영락의 힘 때문에, 인과(因果)에 맺혀있는 모든 무공의 기록들을 읽어들이게 된 것이다!
‘ 하지만 어째서?’
그 대결을 직접 지켜본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철갑검마의 제자, 고려검왕 치타우 뿐이다. 망량, 아니 도편수라고 하는 십이율주는 그 최종대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락이 상대의 경험을 읽어들이는 것이라고 하면 명백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태왕(太王)의 진무 아수라파천이 펼쳐지는 순간에 다시금 깨달았다.
정신력의 궁극화.
이제 내가 지닌 것은 영락이 아니다.
영락에서 한 단계 진화한 신명락(神明洛)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영락은 용안의 하위호환격인 능력으로, 매개체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실시간 경험을 읽어들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영겁의 세월동안에 허공록에 접속해서 의지력을 행사하는 동안, 내 의념(意念)은 초월자의 수준에 한없이 가까워져버렸다.
신명(神明).
신(神)… 정령(精靈)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기초구성단위. 누구도 설명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작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이치를 결정할 수 있는 힘. 기(氣)나 초능력조차도 하위호환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단위. 신명이라는 건 차라리 의념의 흐름을 통솔하는 무언가였다.
그 때문에, 도편수가 패배의 감정을 느끼고 생각에 잠긴 순간 그를 기준으로 가장 강대한 시간의 흐름을 읽어내 버린 것이다. 어떤 원리로 내 신명락이 작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육신통(六神通)조차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되어 버렸다.
신이든 악마든, 일단 존재한다면 모든 시공간을 읽어내서 내게 보여주는 힘!
” ……”
어째서일까.
어째서 하은천은, 상대도 되지 않는데 태왕과 싸운 것일까.
나는 신명락으로 읽어내는 세계에서 숨을 멈추고 두 사람의 대결에 집중했다.
아수라파천의 힘에 전신이 조각조각나려는 순간, 하은천의 전신에 휘광이 일었다.
그리고 하은천이 이를 악물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결코 아수라파천무를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것은 다만 무예의 한계일 뿐만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의 한계이다.
하지만 무(武)란 원래 강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약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술, 그리고 비굴함. 무예의 본질은 바로 수비(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격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대항할 수가 있다.
어떤 고수도 압도적인 수준차가 나지 않는 이상, 일격에 적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삼보(三步)만 있으면 누구든 쓰러뜨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공격을 받는 측에서도 삼보가 있으면 어떤 공격이든 피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무학의 이치이다.
일 보.
이 보.
거기까지도 아수라파천무의 힘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이것이 단 하나의 보법비기, 반래삼보(反來三步)이다.
쿠웅
그러나 하은천은 마지막 세 번째 걸음을 내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반래삼보 또한 초월무공이라 두 걸음까지는 생존을 허락해 주었지만 – 태왕의 아수라파천무는 결코 격하(格下)의 어떤 무공에도 파훼되지 않는 극한. 하은천의 역량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잠시 후 결판이 나고 – 태왕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장소를 일별했다.
그리고 마검 아수라를 거두며 치타우에게 말한다.
” 그 녀석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검(劍)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수라(修羅)의 길.
아신(亞神)의 길.
천마(天魔)의 길…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강자들은 모두 자기만의 길을 향해서 걸어왔던 거겠지.”
치타우는 대답하지 못한다.
검황(劍皇)!
태왕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한 가지의 단어였다.
무(武)의 극한(極限)을 본 자!
하은천과 싸우기 전에 했던 자기소개는 결코 과장도 허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도리어 눈 앞의 태왕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깔보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마음만 먹으면 신도 악마도 파멸시킬 수 있는 절대적 존재 그 자체…!!
” 내 앞에 올 존재가 있다면… 누구든간에 적어도 하나의 경계를 통과한 자일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 둬라.
자신의 답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날 찾아오지 않느니만 못하리라.”
이어진 말에 나는 크게 놀랐다.
” 기다리겠다 유천영.”
이럴 수가.
신명락을 통해서 읽어낸 건 그저 대결장면 그 자체일 뿐이다.
도편수가 치타우에게 전해듣고, 치타우는 직접 보았던 대결장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지금 태왕은 – 내가 나유타영겁을 뚫고 부활했다는 걸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하은천과의 대결장면을 읽는 지금상황조차도 예측한 것처럼 말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인지라 나는 영겁을 뚫은 정신력으로도 곤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당황했지만, 곧 이해하고는 탄식했다.
” …. 아아.”
” 왜 그러지?”
내 눈에 비치는 태왕과 하은천의 대결장면과는 별개로 현실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뜬금없이 멈춰서서 탄식하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도편수가 의아해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이런 관계가 있을 수가 있는가.
내 원수의 스승이.
나를 죽인 자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 줄이야.
‘ 그랬던 거군.’
하은천은 어째서인지 내가 신명락을 얻을 거라는 사실을, 태왕과의 대화 도중에 깨달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하은천 입장에서는 그냥 태왕과의 대결을 피하고 복귀하는 편이 옳았다.
유검보다 더욱 강력한 절대자를 상대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 그 자체였다.
백 번 물어도 백 번 틀린 행위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말하겠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은천이 목숨을 걸고 태왕에게 도전한 이유.
그건 바로 태왕의 필살기, 마검 아수라와 진무 아수라파천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치타우의 영락을 읽어들여서 음미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좋았을테지만 – 적어도 하은천은 무림의 절대자 태왕의 정보를 후인(後人)에게 남겨주려고 했다. 진무 아수라파천과 사전정보 없이 겨루면 이 세상 누구라고 해도 질 게 뻔하니까!
” … 너무하군.”
내 육체는 죽었다.
영겁 속에서 재구성해서, 인류의 의지를 꺾고 모든 인과를 무(無)로 만들고 왔다.
여기에 서 있는 건 ‘유천영’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다.
그래서 이제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나 자신의 길만을 고독하게 추구하려 했건만 – 하은천이 나를 과거로 잡아끌고 있었다.
나는 그 부름을 거부할 수 없다.
그래… 인간의 찬가가 용기의 찬가라는 사실을 보여준 동방무림의 영웅(英雄)은 믿고 있었다. 유검을 꺾은 후에도 신념을 잃지 않고 나아갔다.
나라면, 태왕(太王)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이 죽더라도 태왕을 꺾어줄 수 있을 거라고.
” 용기를 모르면 벼룩과 다를 바 없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해야할 일이 생겨버렸다.
지금부터 열흘 간, 도편수와 싸운 후 태왕의 진무아수라파천을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