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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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혈신(天劫血神)
내가 오해를 푼 것은 소림사를 떠난 직후였다. 어차피 내공을 잃은 상태라고 설명한 상태라, 내가 의형살인강을 썼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오직 도편수 혼자만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게서 상황설명을 들은 도편수는 약간 화난듯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 당신은 말로만 듣던 성령독요(聖靈獨曜)에 진입한 모양이군.”
” 알고 있는가.”
” 팔우도(八牛圖)는 민간에 관제묘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것이오. 내 무학경험을 동원하자면, 그 이외에는 지금의 경지를 설명할 길이 없군.”
툭
길가의 돌멩이를 발로 찬 도편수가 떫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투가 달라진 걸 보면 나에 대한 태도를 달리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 당신은 아마 마음만 먹으면 전신기화(全身氣化)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오. 내 빗장걸치기를 받아낼 때도 단순히 기(技)로 받아낸 게 아니라 여과되지 않은 힘을 모조리 투과시켰고.”
” 맞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편수의 예측대로 나는 전신을 기와 동화시켜서 파장을 맞추고, 심지어는 흩뜨리거나 되돌리는 게 가능하게 되었다. 보통은 그게 뭐가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특정한 무공을 발동시키지 않아도 의지만으로 가능하다는 게 차이점이다.
” 기(氣)와 의(意)가 분간이 되지 않는 지경… 반선(半仙)이라고 해도 다르진 않겠지. 내게 전음을 보내려 했는데 의형살인강이 된 이유는 바로 그거요.”
” 전음은 자신의 의지를 기화(氣化)시켜서 상대방의 신경중추에 전달하는 형식이니, 처음부터 기의 흐름을 움직이게 되면 공격이 되어버리는 거군.”
도편수가 훗하고 웃었다.
” 보통 무림인들이 팔뚝에 힘을 주어서 기라는 이름의 수레를 끄는 거면, 당신은 힘을 줄 필요도 없이 수레를 날게 하는 셈. 속세의 무공과는 이미 차원을 달리 하게 됐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오.”
” …….”
나는 침묵했다.
반선지경!
말로는 듣기 좋지만, 달리 말하자면 이미 반쯤은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다. 내공 하나없이 빈약한 몸으로 보이지만, 그건 내 몸을 억지로 기를 둘러서 보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아마 대기중에서 무한대나 다름없는 기를 끌어모아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 아직 내 힘이 익숙하지 않은 건… 아마도 무공을 통해서 힘을 끌어오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억겁의 세월동안 엄청난 숫자의 무공을 보고, 받아들이고, 분석했다. 그 동안에 내가 원래 익혔던 [종남파]의 껍질을 깨는 건 성공했지만 여전히 무림인으로서 무공을 사용하는 방법에 익숙해져 있다. 이래서는 반선지경에 오른 힘을 다루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도편수가 툴툴거렸다.
” 쳇. 하은천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이 시대에는 왜 이리도 초월자가 많은지 모르겠소. 하긴 유검이나 태왕같은 괴물이 나타날 정도니, 무(武)의 신(神)이 결판을 내라고 부추긴다고 여겨질 정도군.”
” 무신(武神)?”
내가 무심코 반문하자, 도편수가 갑자기 장난기어린 표정을 지었다.
”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는가.”
” 무슨 얘기 말이오.”
” 이 세상에 무의 극한에 도달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외로운 존재일 것이오.”
투두둑
하늘에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닥에 검고 둥근 물자욱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편수는 천천히 아름드리 나무 아래로 걸어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이 세상에 무(武)를 전파해서, 자신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를 계속해서 키우도록 하는 것이지. 적어도 두 명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로움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정상은 하나 뿐.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해야하는 것이오?”
” 말했듯이 외롭기 때문이겠지.”
도편수가 낄낄거렸다.
” 우리가 싸워서 강하다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건, 겨룰 수 있는 타인(他人)이 존재하기 때문이오. 혼자의 힘이 아무리 강해봤자 그걸 시험해볼 수 있는 상대가 없다면 의미가 없지. 그런 의미에서 무신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불행한 존재임이 틀림없소.”
” ……”
” 뭐 중원의 무신 혁월린 정도는 나도 이길 수 있겠지만. 애초에 중원뙤놈들은 과장이 너무 심하다니까…”
도편수가 자화자찬이 섞인 뻘소리를 했지만 흘려보냈다.
나는 문득, 신명락에서 읽어낸 태왕(太王)의 모습을 생각해냈다. 그는 평범해보였지만 무한했고 절대적이었다. 아수라파천무를 몇백 몇천번이고 되새겨봐도 그는 절대자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무(武)의 극한(極限)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면 바로 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고독(孤獨)도 느껴졌다. 아수라파천무같은 절대적인 힘에서 감정을 읽는다는 게 이상하겠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하은천조차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진 것이다.
과연 지금의 내가 아수라파천무에 대항할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무혼(武魂).’
속으로 중얼거렸다.
‘ 적어도 5단계 이상이 아니라면 안 되겠지.’
이제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무의식에는 무혼이라고 불리는 기이한 체계가 자리잡고 있다. 육합귀진신공의 합일이나 나유타영겁 조차도 2단계에 불과하며 윗단계는 측정조차 불가능하다. 이건 무공이라기보다는 실현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고 보일 정도다.
지금까지 나는 무혼의 이 단계를 통과했다. 그것만으로도 반선지경에 올랐는데, 이후에는 도대체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까?
한참을 걷던 중 도편수가 말했다.
” 망량. 당신은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필요없는’ 것이니, 굳이 나를 따라서 동방무림으로 갈 필요는 없겠군. 내게는 당신의 발걸음을 강요할 힘이 없으니, 이쯤에서 당신이 갈 길을 정하도록 하시오.”
” 흠.”
나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얼떨결에 세상에 나와서 모습을 비추긴 했지만, 정말로 딱히 갈 곳은 없다. 수행은 어디서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주루로 돌아가서 경비무사 일을 해도 되는 것이다.
쏴아아아
빗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하늘을 보면서 빗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오는 날씨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왠지 지금 생각을 하는데는 방해가 된다고 여긴 것이다.
무심코 검지를 내밀어서 하늘을 향했다.
점차 고요해졌다.
비가 갑자기 멈추더니, 촌각(寸刻) 후에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화창하게 되었다. 도편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외쳤다.
” 자, 잠깐만! 당신 지금 설마…!!”
우연이든 필연이든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빗소리가 멈췄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느긋하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 사천당문에 가겠소.”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