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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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혈신(天劫血神)
육합(六合).
세상에는 하늘과 땅과 동서남북을 가리킨다고 하며, 지지의 두 가지 오행(五行)이 합해서 만들어지는 형상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저 편한 도가(道家)와 음양가(陰陽家)의 해설이며, 세상 사람들도 그저 육각문양을 연상하곤 할 뿐이었다. 무술이름에도 더러 쓰이기 때문에 불편하거나 어려운 울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겉핥기가 아니라 제대로 도학(道學)에 입문하게 되면 결코 육합이 쉽고 간단한 개념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지지의 합(合)’이라고 하는 특수한 속성 때문이다.
어째서 두 가지 지천간의 합이 동서남북상하의 육방(六方)을 가리키게 되는 것일까? 그건 말 그대로 천지만물(天地萬物)이라는 뜻인데! 어찌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유구한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육합이 특수한 까닭은 바로 변화(變化)의 향상성(向上性)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축합 인해합 묘술합 진유합 사신합 오미합의 육합(六合)은 오행(五行)과는 달리 성질이 딱히 변화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대신에 지지의 균형 속에 천간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는 무한(無限)의 증명(證明)이나 다름없다.
무술이나 술법에서 자주 육합(六合)을 언급하고 이름에도 끼워넣는 건 육합의 특수성이 세상의 법칙(法則)과 연동되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흔히 말하는 오행의 변화와 달리 육합은 운(運)의 모든 가능성(可能性)이다. 사물의 물리적변화 뿐만 아니라, 운명(運命)이나 신(神), 소명(疏明), 인과(因果)를 포함하게 된다.
‘모든 것의 모든 시공간의 상태’, 그것이 바로 육합의 본질(本質)!
” 육합의 괘를 장악했다는 건.”
고반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 이 세상 모든 변화의 형상을 무효화(無效化)시킬 수 있다는 것이니… 술수로는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겠군.”
술법으로 생명체를 해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생명체가 존재하는 ‘안정된’ 상태를 뒤틀어서 바꾸기 때문이다. 주술의 근원이 이름(名)이건 뭐건 예외가 될 수 없다. 법칙을 흔들면 그 위의 물질이 함께 흔들린다.
접시가 흔들리면 위의 사과도 함께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육합의 괘를 장악하게 된 순간, 내 몸과 주변은 아예 ‘접시’라고 불리는 매개물조차도 사라지게 된다. 아예 인과율(因果律)을 부수는 수준의 술법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다.
그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고반다는 갑자기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다.
” 있을 수가 없다! 그건 반칙이다… 신(神)의 사도(使徒)조차도 그런 식으로는 육합을 통제할 수 없거늘… 으아아아아!!”
우웅
고반다의 손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지옥염(地獄炎)이라고 불리는 술법과 마황염(魔皇炎)이라고 불리는 술법이 재차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윽고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픽하고 꺼져버렸다.
”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반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육합성만조천하를 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양극합벽이나 브라흐마스트라를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 당연한 일이오. 이 공간에서는 설령 진짜 신(神)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요.”
육합성만조천하가 펼쳐지는 동안, 이 세계에 존재하는 변화와 운행이 내게 해로운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한없이 0에 수렴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움직일 가능성은 한없이 무한대로 발산한다.
즉, 술법사인 고반다는 지금 맨몸과 다를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 당신조차도 봉쇄될 정도이니, 이전에 천 년(千年), 이후로 천 년… 신마정령(神魔精靈) 누구도 내 앞에서 술수를 사용할 수 없겠구려.”
” … 그 말이 맞다…”
고반다는 처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완전히 전의를 잃은 듯, 두 손을 늘어뜨렸다. 그는 무이궁의 차기궁주이자 천무대제의 사제이니 무공도 뛰어나겠지만 – 무형검을 사용할 수 있는 내 앞에서는 의미없는 일이었다. 고반다는 약간의 경외심을 담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 네게 쌓여있는 사겁(四劫)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구나… 크크크… 아니, 이제 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육합성만조천하를 펼쳐서 모든 이능(異能)과 평행차원 간섭, 시공간 조작을 막아내는 시점에서 내 경지는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는 까닭은 ‘나보다 강한’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 죽여라.”
짤막한 말.
그 말을 하는 고반다의 표정은 마치 성인(聖人)처럼 온화한 빛이었다. 누구라도 약간의 동정심이나 망설임을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옆에서 어리둥절해하며 보고 있던 도편수도 주춤거리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반다를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 나는 당신과 싸우면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소.”
고반다는 눈을 감은 채 내 말을 무시했다. 한시라도 빨리 자기 목을 끊어줬으면 좋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배짱을 부리는 건 아니었고, 실제로 그는 차라리 죽기를 원하고 있었다.
” 내가 무혼 삼 단계, 육합성만조천하를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게 새겨진 시간의 저주는 작용하지 않소. 결국 평행세계를 혼이 이동할 뿐이니 무효화될 것이오. 이제 나는 저주에서 반쯤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꿈틀
고반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실눈을 뜨더니 말했다.
” 그런 거였군. 이해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그대도 진입자(進入者)였나…”
” 이봐, 당신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좀 알아듣게 설명해 줘!”
속이 답답한 듯 도편수가 자기 가슴을 쾅쾅 쳤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할 만한 게 아닌데다, 지금 나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서 고반다를 도발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 두 번째는, 암왕(暗王) 권강한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오.”
” ……”
” 권강한은 이 세계에 총 다섯 명의 진입자가 존재한다고 했소. 하나하나가 거대한 수류(水流)나 다름없어서 이 세상에 혼란과 파괴를 불러온다고 했지. 나는 얼마 전까지 그 말을 믿고, 남아있는 진입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소. 그래야 내가 수련을 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오.”
고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하지만 그건 틀렸지. 태왕이나 유검은 도저히 이 세상의 인간이라고 볼 수가 없고, 내 눈 앞의 고반다 당신또한 이계(異界)의 술수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소. 뿐만 아니라 전생(前生)의 기억을 매우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소. 진입자는 다섯 명이 아니라 의외로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오.”
”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군.”
고반다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 내게 그 말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오. 이 세상에 각 차원의 강자(强者)와 마인(魔人)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고 있는 이유를.”
이미 세상은 크게 뒤틀려버렸다.
팔왕만 해도 하나하나가 무림제패를 노릴만한 마왕(魔王)들이었는데, 그들을 뛰어넘는 초고수가 다시 등장하고, 또 다른 은거기인이 등장한다. 일반 무림인들의 상상에서는 생각할수도 없는 천외천(天外天)이 형성되어버린 것이다.
” 음…”
고반다는 약간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 한 가지 약속해라. 그걸 말해주면 나를 여기서 멀쩡히 놓아 주겠다고.”
” 물론이오.”
고반다는 틀림없이 마인(魔人)에 위선자의 부류에 속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견제를 한 이상 함부로 날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확답을 주자 고반다가 잠시동안 고민했다. 그러더니 양 모양 가면을 다시 눌러쓰며 말했다.
” 내게 특별한 이유는 없다. 바깥 우주의 삼천세계(三天世界)에는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고, 나는 우연히 이 세계에 환생한 것 뿐이다. 하지만 확실히, 뭔가 나를 이끄는 ‘부름’은 분명히 존재했다.”
” 부름?”
” 강한 자의 혼(魂)은 세계를 떠돌고, 기억은 혼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 나를 제외한 다른 자들도 그 부름에 이끌려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미 신적인 힘을 지닌 자들은 호기심에 왔을 테고, 힘을 갈구하는 자는 욕망때문에 왔을 게 틀림없다.”
” 으음.”
나는 고반다의 말을 듣고 침음성을 흘렸다.
‘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에 진입자가 몇 명이나 와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인가?’
실로 오싹한 이야기였다. 만일에 고반다 수준의 괴물이 열 명이나 더 있다면 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 내가 억제할 힘이 있으니 멀쩡히 이야기할 수 있을 뿐, 힘이 부족하면 그들은 언제든지 마왕(魔王)으로 돌변할 것이다.
어쩌면 권강한이 거짓말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권강한이 관측한 시점에서는 다섯 명이다가, 갑자기 늘어났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자 고반다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고반다 또한 내 살의를 감지했는지 몸을 움찔하더니 체념한 듯 말했다.
” 그대는 나를 보고 겉과 속이 다르다 여기겠지만, 그대라고 다를쏜가? 어차피 하나의 얼굴만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데…”
” 고반다. 그대는 뭘 위해서 살아가고 있소?”
” 나를 위해서 살고 있다.”
” ‘나’는 어디에 있는 거요?”
” 여기에 있지.”
” 여기가 어디오?”
고반다는 거기까지 문답을 나누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다가 결국 거칠게 말했다.
” 어디인들 상관없구나!”
그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어서 저 멀리로 걸어가 버렸다. 술수로 이동할 수 없으니 그냥 가는 듯 했다. 고반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도편수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 죽이려던 게 아니었소? 어째서 그냥 놔두시오.”
그 말대로, 내 수련의 귀찮음을 덜기 위해서라면 약속을 깨는 한이 있어도 그에게 금제(禁制)를 가하려고 했다. 적어도 술법을 폐(廢)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반다의 마지막 한 마디 때문에 그를 가게 놔둔 것이다.
나는 삼십여 장을 멀어진 고반다의 조그마한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 그는 꽃 한 송이의 미소(拈華微笑)를 깨달았소.”
앞으로 그를 볼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눈으로 일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