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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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혈신(天劫血神)
비류연이 무신마와 선운산에서 만난 일은 심등대법과 무결천위를 수련하고 있던 모든 기재들에게 전해졌다. 과거 천무학관 주작단의 단장으로서, 남궁세가의 떠오르는 기대주라고 불리던 남궁상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 대사형께서 뭔가 임무를 맡으시는 걸까?”
남궁상의 옆에서 묵묵히 무당파 특유의 호흡법을 연마하며 내공을 다지고 있던 주작단의 현운이 대꾸했다.
” 그 양반 일을 알 게 뭔가! 죽여도 죽지 않을 사람인데?”
” 허.”
” 일 년 후에 우리가 살아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는 판국에.”
평소라면 남궁상은 기겁하며 현운의 무모한 언행을 지적했을 것이다. 대사형에 대한 불경은 곧 인세에 도래하는 구타(狗打)로 이어진다. 하필이면 무신마의 눈에 띄어서 대사형 비류연과 함께 선운산에 갇혀서 수련을 하기 시작한 바람에 두 사람의 운명이 꼬였다. 수련 자체보다는 비류연과 함께 있는 괴로움이 더욱 컸던 것이다.
하지만 남궁상이 침울한 얼굴로 대꾸했다.
” 정말로 유천영이 죽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 ……”
주작단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유천영 생전에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무당산 합숙이나 화산규약지회라는 아비규환을 동시에 겪긴 했지만, 유천영은 어쩐지 쉽게 다가갈 수가 없는 존재였다. 본인이 타인에게 크게 벽을 쌓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 이야기를 몇 마디 해 보면, 마치 강철로 되어있는 무언가와 이야기하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천무학관과 무림 전체를 통틀어서 유천영의 친구라고 할 만한 이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종남파 출신의 무시무시한 검귀(劍鬼)를 경원시할 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감은 맞았다. 화산규약지회가 끝났을 때, 무림의 모든 인간은 유천영이 그때까지 드러낸 실력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을 뛰어넘어 천무삼성과 겨룰만한 초고수였다니! 유천영의 나이에 그정도 무위를 얻은 인간은 무림역사를 뒤져봐도 찾기 힘들었다.
유천영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건 얼마 전의 일이다. 종남파에 귀환해서 요양을 취하는 듯했던 유천영은, 난데없이 쳐들어 온 팔왕에게 패배해서 죽었다. 팔왕 서열 삼 위, 동방무림의 주인 하은천의 무공이 초월지경이라는 사실은 무림인들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친구도 아니었지만 주작단 사람들이 유천영의 죽음에 슬픔과 허무감을 느끼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사형 비류연과 거의 유일하게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비류연이 장난이나 폭력으로 대하지 않는 자였다. 비록 직접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유천영이라는 존재에게 묘한 호감을 느끼는데는 아마 비류연이 그를 좋게 평가했던 게 한몫 했으리라.
지금 두 사람이 허무감을 느끼는 이유는 – 그 유천영마저도 어이없게 사망할 정도로 팔왕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과, 주변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질감이었다. 어쩌면 곧 자신들도 유천영의 뒤를 따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현운이 말했다.
” 효룡과 모용휘, 나예린은 이미 물극필반을 얻은 것 같더군. 그들은 이제 후기지수가 아니야.”
” 후.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았지. 자네도 대충 짐작하고 있지 않았나?”
현운은 그 순간 남궁상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표정의 변화가 생기는 걸 포착하자 현운의 심경도 변했다.
” 시치미를 떼는군.”
” 뭐?”
남궁상의 반문에, 현운이 피식 웃으며 갑자기 면장(綿掌)을 벼락같이 출수했다. 강호의 누구라고 해도 기습이라고 할 정도로 빠르고 형태없는 공격이었다.
면장!
무당파에만 전해져 온다는 독특한 장법으로, 기본적인 원리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다. 단순한 내가중수법이라면 무당면장은 결코 명성을 얻지 못했을테지만 – 무당면장의 두려움은 바로 면면부절(綿面不絶)의 성질에 있었다.
아무리 초식이 연환되어도 기세가 끊이지 않고 중첩되면서 위력을 더해간다는 건 언뜻 이해가 안 되지만, 실제로 무당면장을 십 성 이상 수련한 무당권사(武當拳士)는 무림의 어떤 권법에도 밀리지 않았다. 무당면장을 완벽하게 터득하면 팔장건곤(八掌乾坤)이라고 하는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데, 팔장건곤은 소림사의 백보신권만큼 대단하게 취급받고 있었다.
남궁상의 손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극정의 움직임이 이어진 후 자연스럽게 발검(拔劍)하고 현운의 장력을 막아내었다. 남궁상의 검기가 허공에 뿌려진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 헉?!’
놀랍게도, 현운의 면장은 허공에서 열여덟 번이나 휘어지더니 다시 제각각 성질이 변화한 것이다! 천무학관에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경지인지라, 남궁상은 현운이 심등대법(心燈大法)을 수련한 후 무시무시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휘어져 꺾이는 면장이 재차 파장끼리 뭉치면서 위력을 더해가자, 천하의 어떤 절초에도 뒤지지 않는 위력을 자랑했다.
‘ 장난이 아니군!’
뿐만 아니라 남궁상이 뒤로 피하는 순간까지 예측해서 어수천강기(御手天降氣)의 수법으로 퇴로를 봉쇄해 버렸다. 도저히 현운의 나이에 보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서 남궁상은 삽시간에 목젖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현운의 삼 초(三招), 태극일효(太極一曉)가 펼쳐지자 현운의 장심이 남궁상의 명치 코앞에까지 날아왔다. 고작 삼 초식만에 현운은 남궁상의 목숨을 거둬갈 기회를 잡은 것이다. 남궁상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파캉!
하지만 현운의 마지막 한 수는 허망하게 튕겨져 나갔다. 정확히는 남궁상이 현운에게 맞대응해서 실력을 보인 순간, 현운 스스로가 치명상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뒤로 물린 것이다. 삼 장 밖으로 뛰쳐나간 현운의 소매는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현운은 타버린 소매조각을 뜯어내며 말했다.
” 음흉하군. 친구인 나에게까지 숨겨야 했나?”
” ……”
남궁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남궁상의 입이 굳게 닫혀있는게 마음에 안 드는지 현운이 불쾌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 방금 전 태극일효 건곤격(乾坤擊)을 박살낸 초식이 남궁가의 검법이라고 주장할 셈은 아니겠지? 이 친구야.”
” 그, 그건.”
” 섭섭하기까지 하군…”
남궁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은 결코 배신할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현운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진령. 결국 남궁상은 대사형의 당부를 깨고 비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그래 맞네. 자네 생각대로 나도 물극필반의 경지에 올랐어.”
남궁상 또한 세 사람에 버금가는 초인의 경지에 발을 올렸다!
현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그게 아니면 팔장건곤을 어떻게 무마할 수 있겠나? 이미 의념(意念)을 통솔해서 성질을 뒤바꿀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군.”
” 후우. 나를 책망하지 말게.”
비아냥이 느껴지는 현운의 어조에, 남궁상은 한숨을 쉬며 검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 나를 개별지도해준 것은 대사형일세.”
” 대사형이?”
남궁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균형을 맞춰야 한다느니, 귀찮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느니 하는 말씀을 하시더니 한 달 전부터 내게 비결을 전수해 주셨네. 특별한 검법이나 수법을 배운 건 아니지만 대사형은 이미 그 경지에 도달한지 오래된 것 같더군.”
” 그럴수가…”
현운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사형 비류연의 무공이 말도 안 되는 경지에 오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한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무신마가 양성하는 10인의 기재로 함께 들어온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궁상의 말에 따르면, 대사형은 애저녁에 천무삼성의 경지를 초월해 있었다는 뜻이 된다.
‘ 대사형! 그대는 정말로 인간이란 말이오?! 어찌 그 나이에 신이나 다름없는 무공경지를…’
질투심조차 나지 않는다.
차라리 공포!
비류연 앞에 서면 일 초도 버티지 못하고 찢겨나가는 자신을 생각하니 절로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구타 정도는 완전히 애교였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공포가 새삼 떠오른 이유는 현운 본인의 무공이 일취월장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정상이 더욱 높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원리와도 같다.
남궁상이 씁쓸하게 뇌까렸다.
”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에게도 전수해 달라고 말해 봤지만, 대사형이 거절하셨어. 내 이름에 걸고 치졸한 경쟁의식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네.”
현운은 남궁상의 말에 모든 감정을 풀었다.
” 그 말을 믿겠네.”
우유부단하고 때로는 멍청해 보여서 못미더운 게 남궁상이지만, 동시에 우직하고 솔직호방한 면이 있는 게 남궁상이다.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호감을 주는 천성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주작단의 단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주작단의 무공순위만 따지면 남궁상보다 강한 자가 세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궁상이 분명히 사람을 이끄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를 대장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현운은 남궁상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느꼈다.
” 대사형이 비밀을 조건으로 전수해줬나 보군.”
” 그렇네. 그리고…”
” 그리고?”
” 아, 아무것도 아닐세.”
남궁상은 황급히 말을 삼켰다. 이것까지 말하게 되면 현운에게 평생 붙들려살게 될 것이다. 아직도 대사형의 악마같은 얼굴이 떠올라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 궁상! 이제부터 내가 전수해주는 건 심등대법과 무결천위를 보완하고 단기간에 속성터득이 가능하게 하는 비결이다.] [ 가, 감사합니다 대사형.] [ 단지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 네?]대사형은 대사형답지 않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이건 너희 주작단한테 시켰던 똥개훈련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본문(本門)의 상승심득 중 하나거든. 즉 이걸 너에게 전해주는 순간, 나는 너를 외인(外人)이나 문외제자(門外第子) 취급할 수가 없다는 거다. 사부에게 정식으로 보고한 후에 처우를 결정해야 하는 거지.] [ 네?! 저는 남궁가의 무공을…] [ 아 거참 말 많네! 생각 좀 하게 가만히 있어 봐.]비류연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남궁상에게 명령했다.
[ 일단 내가 사부를 만나서 얘기하기 전까지 궁상, 네 신분은 비뢰문의 노예다.] [ 네?! 노예?!]노예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백정만도 못한 게 바로 노예였다. 몇몇 악독한 마도문파가 비밀리에 노예를 두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대사형이라도 남궁세가의 후손을 노예로 만들겠다니!
하지만 남궁상의 반항은 잠시 후 제압되었다. 항의하던 남궁상은 약 이 초 후, 삼복구타권법에 떡이 되도록 맞아서 처참하게 쓰러졌다. 속시원하게 두들겨팬 비류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좋아 노예 1호. 일단 물부터 떠와라. 때린다고 목 마르다.]” …….”
회상을 끝마친 남궁상은 주르륵 눈물을 흘렀다.
” 어흐흐흑…”
대사형 덕분에 엄청난 경지에 발을 들이밀긴 했는데, 어쩐지 평생 가도 대사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슬픈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현운이 당황했다.
” 자, 자네 왜 그러나? 심적외상이라도 입은 건가.”
” 혼자있고 싶네. 나가주게.”
” 알겠네. 좀 있다 다시 얘기하지.”
현운은 감히 따져물을 수가 없었다. 남궁상의 얼굴에 떠오른 엄청난 번민과 슬픔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지금 이야기를 시켰다가는 마치 인격이 붕괴될 것만 같아 보였다.
한편 비류연은 나예린을 따라와서 무신마 갈중혁을 만나고 있었다.
나예린이 방에서 나가자, 무신마 갈중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자네가 나보다 강한 걸 알고 있네.”
비류연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탁자에 놓여있던 용정차를 들어서 한 모금 음미했을 뿐이다. 사대암천도 그 자리에서 은밀히 호위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비류연의 불경죄를 묻지 못했다. 자신들의 주군이 얼마나 이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류연이 한참 후에 용정차를 내려놓고 말했다.
” 그래서요?”
이 무림의 누구도 무신마 앞에서 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즉 자신이 무신마 갈중혁보다 강한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의 권위에 전혀 겁먹지 않았음을 뜻했다. 어찌보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무신마는 개의치 않았다. 자기 생각대로라면 비류연을 무력으로 협박하는 건 천하에 다시 없는 바보짓이다.
무신마 갈중혁도 차를 한 잔 들이키고는 말했다.
” 내가 죽는다면 자네가 흑천맹(黑天盟)을 이끌어 주게.”
청천벽력같은 부탁!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흑도문파의 연맹, 흑천맹을 무명(無名)의 이십대 청년에게 맡기다니, 세상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흑천맹은 갈중혁의 아들인 갈중천이 맡아서 수십년 전부터 운영해오고 있는 것이다. 사대암천들은 자신들이 헛소리를 들었나 생각했지만 무신마는 진심이었다.
비류연은 물끄러미 무신마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싫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