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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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혈신(天劫血神)
‘그’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운중월(雲中月)을 등지고 있었다. 샛노란 갈대빛이 월광에 스치는 사이에 기묘한 기류(氣流)가 사방을 스쳐지나갔고, 유천영은 자연스럽게 ‘그’를 인식할 수 있었다.
괴이한 인물이었다.
생사안(生死眼).
그것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눈동자로, 생과 사를 꿰뚫는 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수백만, 아니, 수천만을 넘어 셀 수 없는 생과 사를 지켜본 자만이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을 간파하고 본질을 꿰뚫는다는 눈.
이것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눈이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수천, 수만 번 넘어서며, 생사의 경계에서 그 몸을 비우고 마음을 무(無)로 만들면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물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오직 생과 사를 초월한 정각자만이 얻을 수 있다는 눈.
깊고 맑은 그 눈은 끝없는 허무를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현상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눈동자에서 해체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사안을 가진 자는 두려움을 모른다. 무수한 죽음을 그 눈으로 보아오며 생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생사안을 얻은 자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저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역량이나 경험으로 따지자면 현재의 유천영이 지닌 신명락(神明洛) 또한 생사안에 준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천영은 삶과 죽음의 경계보다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더욱 깊게 파헤친 상태였다. 본질적으로 괴인의 생사안과는 다른 것이다.
유천영은 뜬금없이 출몰한 괴인의 용모파기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은발(銀髮)이며, 유달리 흐느적거리고, 한 자루의 검을 패용하고 있다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힘!
말도 안 되는 무량(無量)!
눈 앞의 상대를 형용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유천영은 잠시 권강한에게서 시선을 떼어서 뚫어져라 그 인물을 응시할 정도로, 존재감에 압박을 느꼈다.
권강한은 유천영이 괴인을 응시하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 부럽군. 나는 그정도 경지에는 평생 걸려도 갈 수 없을 거야. 설마 일목(一目)으로 그의 잠재력을 알아보다니.”
유천영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괴인을 쳐다보았다. 괴인은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부담스러운 듯 한 번 머리카락을 긁적였으나, 이내 털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암왕(暗王). 불러서 오긴 했는데 이건 무슨 난리통인지 모르겠군. 나더러 뭘 하라는 거야?”
” 별로 하실 일은 없소. 우연히 상황이 바뀌었을 뿐.”
” 그런가~ 그렇다는구먼.”
은발의 괴인은 흠 하고 자신의 턱을 쓰다듬은 후 근처의 바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그 또한 유천영에게 호기심이 일어났는지 말을 꺼냈다.
” 당신의 검술은 괴상망측한데 이상하게 익숙해. 잃어버린 친척을 보는 느낌이야. 왜 그럴까나.”
” 내게 한 말인가?”
유천영의 반문에 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조금 전부터 보고 있었는데 썩 재밌는 구도는 아니더군.”
권강한과 유천영은 괴인이 하는 말의 진의(眞意)를 깨달았다. 괴인의 존재를 눈치챈 건 방금 전이지만, 괴인은 그 전부터 기척을 숨기고 두 사람의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 괴물이군.’
그건 괴인의 무위(武威)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의 권강한은 초끈에만 의존해서 싸우고 있지만, 본신의 무력도 천무삼성에 크게 뒤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나유타영겁을 지나쳐서 무형검을 깨달은 유천영은 확실하게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의 감지범위를 자유자재로 피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초월했다는 뜻이다.’
유천영은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무신마의 천외일도(天外一刀), 하은천의 천의무봉(天衣無縫), 연화의 백식관음(百式觀音) 같은 절대적 경지들은 결코 외양으로 강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생사안을 지녔을 때 짐작은 했지만 지금 등장한 은발의 괴인도 결코 그들에 못지 않다는 것이다.
권강한이 말했다.
” 이 쪽은 마천십삼대(魔天十三隊) 육번대(六番隊) 대장인 무명(無名)이다. 예정대로였다면 밑에서 같이 오리고기를 먹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어.”
마천십삼대!
흑도의 지존세력이 흑천맹에서, 마천각에 존재하는 무력집단. 백도의 천무학관과 다르게 학생들 스스로가 무력단체를 만드는 마천각이었다. 거기서도 대장노릇을 하고 있다면 강호의 절정고수임은 틀림없다.
물론 이 자리에서 절정고수 정도로는 명함을 내밀 수도 없고, 의미도 없었다. 도리어 마천십삼대 대장이라는 명패보다는 무명 본인에게만 시점이 맞춰졌다.
” 응, 오리고기? 난 별로야. 차라리 계퇴(鷄腿)를 시켜먹는 게 어떻냐.”
” ……”
무명이 정색을 하고 음식취향을 말하는 바람에 권강한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유천영을 놀리려고 했던 말인데 무명이 끼어들줄은 모른 것이다. 마천십삼대의 대장인 무명은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 그래 맞아. 재밌는 구도는 아닌데, 어쩐지 가능성은 있다고 할까? 형태에 얽매여서 완전히 힘을 다 못 쓰는 느낌이라고, 당신. 많이 아까워.”
” ……”
뜬구름잡는 말이었지만 유천영은 그 말에서 아득한 현기를 느꼈다. 유천영은 속으로 무명의 말을 곱씹으면서 아연해지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 초끈의 절대적인 권능을 보았을텐데 가능성이 있다고? 정말로 그럴까?’
유천영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지만 – 그게 대항할 방법을 찾았다거나, 승산이 보였다는 뜻은 아니다. 말 그대로 버티고만 있는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다. 초끈은 인과율과 현실을 조작하는 막강한 권능이므로 공격이든 방어든 의미가 없는 것이다.
권강한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 무명. 그게 무슨 말이오? 정말로 유천영이 내 능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무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 음~ 사실은 잘 모르겠어. 엄청난 능력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쩐지 ‘끊을 수(斷)’ 있을 것 같거든. 아까 저 청년도 비슷한 일을 했으니까 아쉽다고 말한 거고.”
” 하하.”
” 진담인데.”
권강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살기도 죽인 상태로 권강한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 진담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 봅시다.”
” 어, 그래.”
뜬금없는 대결구도였다.
권강한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천영은 급박한 심정이 되었다.
‘ 이런, 위험해!’
지금의 권강한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읽히고 혼란스러워하는 상태였다. 충동적으로 유천영을 죽이려 드는 것도 이성적인 행동으로는 볼 수 없었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쉽게 절망하는 권강한의 감성이라면 – 제 아무리 계획에 따라서 거둬들인 ‘말’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수 있다.
이대로는 무명이 초끈에 당해서 죽고 만다!
그렇게 생각한 유천영이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절대고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심적권청의 세계에서 무명이 가볍게 웃으며 손을 젓는 게 보였다.
” 이봐, 필요 없어. 이런 건 그냥 맞춰나가면 돼.”
타앙
” ……!!”
못 봤다.
유천영은 한 차례의 격돌이 있었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이번에도 권강한은 압도적인 초끈의 권능을 사용해서 현실을 조작하려 했고, 그건 과정도 필요없이 결과만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무술의 어떤 수법을 쓰더라도 마천십삼대 육번대 대장 무명의 전신이 찢겨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피를 입에서 토하며 삼 장도 넘게 날아가 있는 건 권강한이었고, 무명은 팔짱을 푼 상태로 약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명은 자신의 은발을 살짝 쓸어넘기며 뺨에 흐르는 땀방울을 훔쳐냈다.
무명의 팔에도 약간 피얼룩이 져 있었다. 쉬웠던 일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 어이구 힘드네. 제대로 하면 그냥 동귀어진(同歸於塵)이겠어~ 무서워라.”
쿨럭!
내상이 깊었던 모양인지 권강한은 피를 한움큼 더 토해냈다.
” ……?”
유천영은 그 모습도 이해되지 않았다. 초끈의 힘이라면 ‘부상’이나 ‘사망’조차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형검으로 수백번은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털끝하나 건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마치 초끈을 사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권강한이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서며 히죽 웃었다.
” 하… 하하하… 멋지구만. 설마 이런 방법으로 파해(破解)할 수 있을 줄은… 괜히 태왕(太王)이 경계한 무맥(武脈)이 아니었던가.”
무명은 뜬금없이 흥분한 기색이었다. 방금 권강한과 나눈 일 합(一合)의 대결이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 한 번 더 해볼까? 나 왠지 기억이 날듯말듯 해. 사실 방금도 긴가민가했거덩!”
” 아니, 됐소. 갑자기 공격한 걸 사과드리오.”
” 그런가~ 그런건가~”
무명은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재차 바위에 걸터앉았다. 유천영은 한참동안이나 고민하다가 방금 전에 있었던 대결의 전모를 대충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 말도 안 되는…’
마천십삼대 육번대 대장 무명.
그가 한 일은 간단했다.
‘초끈’을 잘랐다!
뭐가 어찌되었기에 그런 이해불가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초끈은 말 그대로 삼천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작은 단위이자 현상계에서는 관측조차 불가능했다. 분자나 원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초끈은 보통은 관측조차도 거의 불가능했기에 초끈을 조작하는 권강한의 능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됐든간에 무명은 초끈을 잘라버렸고, 초끈을 조작하던 권강한은 그 여파 때문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버린 것이다. 겉으로는 내상으로 끝났지만 실제로는 초끈을 이용해서 겨우 피해를 수복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 가설대로라면 지금 권강한은 반작용 때문에 제대로 초끈을 조작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천영은 일말의 경외심이 일어났다.
‘ 자른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초끈을 자른다는 건 광자(光子)를 자르는 것보다 더욱 현실성이 없는 얘기였다. 말 그대로 어린애들 말싸움이나 하다가 나올 법한 경지였다.
당연하다. 실증된 적도 없고 진동수로 소립자의 패턴을 정한다는, 1차원의 존재를 무슨 수로 벤다는 말인가? 그런 괴물같은 짓을 눈 앞에서 무명의 손으로 해냈다고 생각하니 전신이 떨렸다.
벨 수 없는 것을 벤다!
말 그대로 검사의 최대 꿈이 아닌가.
유천영은 왠지 이제 와서야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은 걸 확인한 느낌이었다. 흔히들 무림인들이 ‘벨수 없는 걸 벤다’고 생각하는 심검(心劍)의 경지는 고도의 정신능력으로 사물을 관통하는 것일 뿐, 무예의 궁극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었다. 그래서 유천영은 심검을 얻는데 매달리지 않고 더 높은 경지가 있다는 걸 가정하면서 수련의 폭을 넓혀나갔었다.
그리고 무명의 한 수를 보고서, 유천영은 수백 수천년간의 노력이 삽질이 아니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름뿐인 심검보다 확실히 ‘위’에 있는 경지를 눈 앞에서 본 것이다!
나유타영겁때문에 극단적으로 감정이 메마르고 통제된 상태가 아니었다면 – 유천영은 지금 느껴지는 감정 때문에 오열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지금의 한 수는 의미가 깊었다. 단지 정신적으로 식물이나 다를바 없을 정도로 기복이 적었기 때문에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으로 끝났을 뿐이다.
권강한은 유천영을 바라보며 멋쩍어했다.
” 이것 참.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한 번만 살려줘. 지금 초끈을 못 쓰겠네.”
유천영은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권강한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천영의 무형검은 말 그대로 일 초에 수백 번도 넘게 공격할 수 있으므로 시험삼아서 공격해 보면 바로 들통나게 되어 있었다. 무명때문에 초끈을 못 쓰는 지금의 상황에서 유천영은 권강한의 목숨줄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천영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 봤다.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 건 틀림없었다.
권강한을 죽일 이유는 명확했다. 난데없이 초끈으로 농락당하며 머리를 몇 번씩이나 짓밟히고 굴욕을 받았다. 내버려두면 언제고 다시 유천영 자신을 죽이려 할 테니, 안 죽이는 게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권강한을 죽이려 든다면 옆에서 관전하고 있는 무명이 끼어들 가능성이 컸다. 틀림없이 북천멸겁이나 하은천급의 절대자인 무명을 상대로 지금 겨루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유천영은 마음 한 구석의 찜찜함 때문에 선뜻 권강한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무인으로서의 도전정신, 혹은 패기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유천영의 침묵은 길었다. 약 반 각 동안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권강한을 응시했다. 유천영의 시선을 마주하는 권강한은 전신에 땀을 비오듯이 흘렸는데, 유천영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의념이 너무나 강렬해서 전신이 다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유천영은 자신의 검을 거두며 침묵을 깼다.
” 그만두지. 앞으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 고맙다.”
권강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신 떨떠름한 곁눈질로 옆에 서 있던 무명을 바라보았다. 무명이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이 쓸데없이 무명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괜히 자기 무덤을 팠다는 기분이었다.
유천영이 그런 권강한에게 말했다.
” 객관적으로 너는 최강(最强)의 진입자일 것이다. 나도 너를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게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
” 문제점?”
유천영은 팔짱을 꼈다.
” 도망칠 필요가 없는데도, 도망치고 있다. 정말로 모든 걸 걸어야 할 때는 그러지 못한다. 네가 지금까지 격동하는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 ……”
권강한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에 유천영이 권강한의 본성을 파악한 후가 아니었다면, 권강한은 그저 패배자의 발악으로 치부하고 코웃음쳤을 것이다. 하지만 비웃고 지나가기에는 유천영의 말이 폐부에 찌르는 사무침이 있었다.
그랬다.
그건 권강한이 살아온 삶의 자세의 문제점이었다. 한창 진입자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과 고통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정점에 오른 다음부터는 부담스러운 일을 피하고 보려고 했다.
유천영의 말대로 권강한은 지금까지 이 세계를 바꿀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제약’을 의식하지 않고 일찌감치 태왕이나 유검에게 도전해서 쓰러뜨렸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수라파천무와 무상검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대결을 피한 결과, 도리어 이 세상에 진입자들이 판을 치고 다니며 역사가 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용기가 있었다면 애시당초 이계여행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세계의 사람들과 진솔한 얘기를 하면서 정체성을 찾아나가면 될 문제였다.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초끈의 지배자’로써 삼천세계를 방랑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 뭐야? 이 녀석…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권강한은 유천영의 통찰력이 이 정도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대면한 게 몇 번에 지나지 않을텐데도, 겨우 그 만남으로 권강한의 인격과 문제점을 송두리째 파악해낸 것이다. 유천영이 나유타영겁을 지나치면서 초인적인 통찰력을 보유했다는 걸 간과한 그의 실책이었다.
잠시 동안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벌리고 있던 권강한이 이를 악물었다.
” … 쳇! 충고 고맙군. 그럼 나도 내 ‘제약’이 뭔지 말해 주마. 빚지는 건 싫으니까.”
” 무슨 말이지?”
” 방금 너와 싸울 때처럼 초끈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면 나는 태왕 빼고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세계에서 지금까지 그냥 무공만으로 싸워 온 이유가 뭐냐 하면.”
권강한이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 이 세계에서 내 초끈 능력은 ‘소모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능력을 소환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만.”
그 한 마디로 유천영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권강한이 초끈 능력이라는 압도적인 권능에도 불구하고 전면에서 깽판을 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쓰면 쓸수록 줄어들게 되고 결국 조작할 수 있는 초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혼돈을 조장하는 원흉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써댄다면, 나중에 중요한 시점에 피를 볼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권강한은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할 수 있었다. 초끈능력을 끌어올려서 싸웠는데 정작 유천영을 죽이지도 못하고 괜히 제약만 더해진 것이다. 권강한은 민망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 나도 더는 나설 수가 없겠군. 한바탕 벌어질 때까지는 조용히 지내는 편이 낫겠어.”
후웅
권강한이 암왕의 경공을 발휘해서 산을 훌쩍 내려갔다. 그 때까지 권강한과 유천영의 대치를 지켜보던 무명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힐끔 권강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따라가야하나~ 말아야하나~”
” 무명. 당신은 왜 암왕을 따라온 것이오?”
” 왜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무명은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별건 아니고, 저 녀석이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호기심 때문에 따라와 봤지.”
” 마천십삼대 대장이라는 건 그리 궁금한 정체는 아니오만.”
” 에이, 넌 내 말 뜻을 잘못 알아들었구나.”
무명이 실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 자넨 ‘나’라는 게 뭐라고 생각해?”
무명이 갑자기 물었다. 싸움을 앞두고 묻기에는 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 중요한 문제잖아. 사람은 뭘 가지고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걸까? 사실 별달리 근거도 없잖아? 이게 바로 ‘나’ 라고 하기엔 말이야.”
유천영은 잠시 생각했다. 세상에서 유천영보다 그런 고민을 많이 한 생물은 없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 근거같은 거 없어도 나는 나요. 내가 가는 검로(劍路)의 이름은 천년검로(千年劍路)요.”
” 천년검로…!! 호오, 자네도 괴물이구만.”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칭찬이었다. 유천영의 확고한 의지를 읽은 무명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자네와 달리, 난 아직까지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지난 수십 년 동안 알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도, 다 소용이 없더군.”
유천영은 무학의 이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반문했다. 상대방의 말은 진솔하게 기억이 없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 기억상실이오?”
” 맞아, 난 소위 말하는 ‘기억상실증’이야. 그것도 중증이지. 그래서 과거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네.”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마천각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다. 덧붙이자면 그가 기억을 잃은 원인을 기억상실증 때문이 아니라 치매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 아니, 대부분이었다. 일각에선 아주 오래전,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에서 뒹굴다 죽었던 소고기를 구워먹은 뒤 부작용으로 저렇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 난 그 모든 기억이 없거든. 부모의 모습과 이름도, 내가 자란 마을도, 그리고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도, 심지어 내 이름까지도 말이야.”
그래서 그의 이름은 무명이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이 ‘무명’이었다.
그는 이 이름을 아주 오랫동안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르는 뒤에도 그는 여전히 이름없는 자, 무명이었다.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했고, 때문에 이름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었다.
” 마지막 기억이 언제요?”
” 으음…. 글쎄, 한 백 년쯤 전인 것 같아.”
” 오래 살았군.”
” 그러게 말일세.”
유천영이 농담이나 장난으로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무명이 활달하게 말했다.
” 이봐. 혹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나?”
”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업(業)이 되오. 본질이 표류할 때, 지각(知覺)의 씨앗이 움트며 관념이 사라지는 경계에 이르게 되오.”
나유타영겁 때의 경험이다.
” ……”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무명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저 연결문으로 했던 질문인데 뜻밖에 현기가 담긴 대답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천영이 무명 이상으로 자아와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무명은 약간이지만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 자네의 답도 몹시 괴롭게 느껴지는군. 모르는 사람은 잘난체 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것 또한 지옥을 몇 단계씩이나 거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대답이야…”
” 누군들 그렇지 않겠소?”
” 내 느낌은 이랬네. 디딜 발판이 없는 곳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백 년 동안 새로운 기억을 쌓아오긴 했지만….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국 나무가 아닌 거지. 그런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자기가 무엇을 맺어야 하는지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그래서 난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백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네. 하지만 아직도 못 찾고 있지.”
” 일기일회(一期一回)일 뿐이오.”
잠시 생각해 보던 무명이 반문했다.
” 일기일회라? 생애에 한 번 뿐이라고? 그게 내가 나 자신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냇물 속에 달이 흘렀다. 구름 속에 별이 묻혔다. 소슬한 밤, 유천영은 자신의 경험이 무명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을 꺼냈다.
” 삶 그 자체가 되면 행복과 불행의 경계가 사라지는 법이오. 자신을 등불로 삼는 행위 이외에는 모두 일겁지간(一劫之間)의 망념(妄念).”
” 일겁지간이라. 아주 크게 잡는군.”
비꼬는 듯한 무명의 말에 유천영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권강한이 사라진 언덕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소.
누군가의 찰나가 내겐 영겁(永劫)일 수도 있는 일이오.”
무명은 이죽거리고 싶었다. 유천영의 말에 흐르는 현기가 어떤 느낌인지는 파악하고 있었고, 그 깊이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꼬면서 잘난체 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 … 후우, 유천영이라 했던가. 자넨 내가 백 년 동안 만난 인간 중에서 제일 특이한 인종이야.”
하지만 속이 답답해져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찌된 일인지, 기억상실증에 걸린 무명 자신보다 더욱 괴로운 지옥 밑바닥에 처박혀 있는 듯한 자의 말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필설로 형용하자면 – 나락조차 없는 지옥을 현실에 구현한 듯한 사내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무명은 잠시 질린 표정을 짓다가 말을 이었다.
” 아무튼 나는 내가 누군지,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안 다음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뭐가 될지를 규정하려면 말이야. 뭣보다도 내 안에 있는 뭐가가 ‘나’를 찾으라고, 불완전한 나를 완전히 되찾으라고 날마다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게 증거지.”
” 찾을 수 있소?”
유천영의 반문에 그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 기억을 잃은 나에게도 유일하게 남겨진 것이 있긴 해. 바로 무공이지. 지금까진 내 무공이 어떤 문파의, 누구의 무공인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무공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실마리고, 그렇기 때문에 난 강한 녀석이랑 싸워보고 싶어.”
” 싸우면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건가?”
” 글쎄 뭐랄까, 그들의 강함이 내 안의 무언가를 일깨울 수 있을 것만 같거든. 하지만 최근엔 그런 영감이 느껴지는 상대가 없었지. 그래서 그냥 잠만 자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암왕과 자네를 만난 거야.”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지만 유천영은 무명이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권강한을 그냥 보내준 이유는 초끈을 상대하는 건 무명으로서도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유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한 수 부탁하오.”
” 시원시원하군. 친구로 사귀고 싶은 인간은 백 년 내에 처음 만난 것 같아.”
스으
유천영과 무명.
두 사람의 간합이 정확하게 일 장 거리로 맞춰졌다.
그것은 – 권강한이 천겁혈신(天劫血神)이라 짐작한 인물과, 수백 수천년 동안 천년검로 하나만을 위해 달려온 노력의 괴물이 부딪히게 된다는 신호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