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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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혈신(天劫血神)
찰나.
찰나.
번개가 튀기고, 공간이 잘리는 듯한 짧은 순간.
늦었다!
파앙 –
접지보(摺地步)
순신공상(瞬身空想)
파공음과 함께 하나의 형체가 대지를 스쳐 지나간다. 장홍은 팔에 얹힌 묵직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다는 건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리라.
끼이이익 –
대지에 한 차례 불꽃의 선(線)이 일어나고, 장홍의 발바닥에 화끈한 느낌이 찾아 왔다. 내공으로 전신을 보호했지만 너무 속력이 빨라서 미처 다 보호하지 못한 것이다.
남궁상의 목숨을 끊지 못했다.
필살의 일격을 가한 당사자, 천겁삼성(天劫三星)은 자신의 엄령환을 움켜쥐고 뒤늦게 장홍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뭔가가 끼여드는 건 알았지만 너무나 신법이 빨라서 미처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 뭐지? 저 놈도 선운산의 기재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원판은 나쁘지 않지만 두메산골에서 짐승처럼 지냈는지 턱에 부숭부숭한 수염이 길게 매달려 있어서 척 봐도 ‘아저씨’였다. 얼추 봐도 삼십대를 넘어보이는 외모에 옷도 후줄그레한 수련복이니 삼성은 그가 기재라는 부류에 든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심쩍은 시선이 화살처럼 내려꽂혔다.
‘ 상황이 안 좋군…’
그러거나 말거나 장홍은 삼성의 모습을 힐끔 확인하더니 자신이 한쪽 팔에 안고 있는 남궁상의 모습을 확인했다.
반죽음.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리라.
엄청난 뇌압(雷壓)을 머금은 참격에 몇 번이고 관통당했는데 여태 살아있는게 기적이었다. 장홍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강호행을 하는 동안 이토록 순수한 뇌령지기를 운용하는 무공을 본 적이 없었다. 전신이 시꺼멓게 그을려 있고 특히 가슴 쪽에는 상당한 화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도리어 장홍은 아직까지 남궁상이 숨을 쉬며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방금 전 삼성의 공격은 말 그대로 필살기였는데 남궁상이 어떻게든 치명상을 피해낸 것이다.
‘ 이 친구…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건가…’
장홍은 입을 꾸욱 다물고 남궁상을 한켠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서 상대방, 천겁삼성을 향해 겨누었다.
삼성은 엄령환을 하단세로 겨누어든 채 말했다.
” 동료를 구하러 온 모양이지? 허나 만해 황황엄령이궁에 당한 이상, 길어도 일 주야면 숨통이 끊어질 게다. 네 놈도 저세상으로 보내 주마.”
” 흑룡객(黑龍客).”
흠칫!
난데없는 장홍의 한 마디에 천겁삼성이 몸을 움찔거렸다. 설마 이 대목에서 자신의 진짜 정체가 밝혀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장홍은 날카로운 눈으로 삼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 삼십 년 전, 대막(大幕)에서 배출된 백년 내 최고의 검귀가 실종되었소. 지금은 왜 천겁령에서 일하는지 모르겠구려. 정사중간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 네 놈은 누구냐? 어떻게 내가 흑룡객이란 사실을 알아챈 것이냐!”
삼성은 당혹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것이, 천겁삼성은 천겁령에 들어갈 때 북천멸겁에게서 직접 제의를 듣고 들어갔다.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모조리 말소했고 정보기관의 눈과 귀를 모두 피했다. 외모도 왠만큼 변했으며 피풍의를 입어서 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왠 수염 텁수룩한 아저씨가 대뜸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다니! 장홍은 침착하게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 뻔한 거 아니오? 괴상한 무기를 쓰고있긴 하지만 당신의 검법은 흑룡객만이 사용하던 흑룡십이절(黑龍十二節). 그런 인간이 따로 있을 리 없지.”
천겁삼성이 이빨을 빠득하고 갈아대었다. 분한 마음이 든 것이다.
” 웃기지 마라! 내 독문검법을 한 눈에 식별할만한 인간은 예전에 모두 모랫바람에 죽어 사라졌다. 네놈이 뭔데 흑룡십이절을 알아챈단 말이냐?”
” ……”
장홍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사실은 백도무림의 첩보를 담당하는 부대 ‘무영대’의 대장격인 인물로 지위도 상당히 높아 무림맹주 직속급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현재는 무영대주 직위를 완전히 계승해서 강호에 숨겨진 비밀의 8할 이상을 파악하고 있어서, 흑룡객의 비밀따위는 낱낱이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삼성은 노화가 목젖까지 솟구쳐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방금 전에 그는 남궁상의 검법때문에 밀리는 느낌이 들어서 단숨에 만해로 승부를 결판내었다. 그 사실은 남궁상을 속으로 두려워했다는 뜻이라서 적지 않게 짜증이 나고 있었는데, 장홍이 비밀을 쑤시자 정신이 흔들린 것이다.
상대방의 기운이 음산하고 격렬해지자, 장홍은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 내가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삼성은 장홍이 일대일로 쓰러뜨릴 수 없는 고수다. 남궁상과 현운이 이렇게 밀린 상대들이라면 이미 강호 최정상을 달리는 수준이다. 정면으로 싸운다면 아마 오십 초 이내에 사지 중에서 한짝이 달아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삼성의 검술을 관찰한 덕분에 약점을 찾을 수가 있었다. 장홍은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남궁상의 목숨을 살릴 생각이었다.
” 죽어라!!”
삼성의 검, 엄령환이 한 순간 뇌전(雷電)으로 변해서 장홍의 가슴을 관통했다. 방금 전에 남궁상도 당황했던 시해 엄령환만의 독특한 기술이었다. 순간적인 검속이 너무 빨라서 피할수는 있어도 막을수는 없었다.
츠칵
” … 어?!”
잔영(殘影)!
심장이 찢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장홍의 몸은 이미 이 장 밖으로 날아가 있었다. 이번에도 삼성은 장홍의 움직임을 놓쳐버렸는지라 당황해서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경악할만큼 빠른 순신(瞬身)!
삼성 흑룡객의 이목마저도 흐릴 정도의 속도라면, 이미 그 자체로 강호 최고의 신법대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은 눈 앞의 턱수염 수북한 아저씨가 생각 외로 강하다는 걸 깨닫자 흉소(凶笑)를 흘렸다.
” 흐흐.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피할 수 있나 볼까.”
파바바밧
‘ 좋아. 이목을 내게로 돌리는 건 성공했어…’
장홍의 몸이 일 순간에 잔영을 열 여섯개씩 만들어내며 허공에 허깨비처럼 흘렀다. 시해 엄령환이 이따금씩 번개로 변해서 날아들었지만, 장홍이 아예 반격을 포기하고 회피에 집중하자 맞추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발이 땅에 거의 닿지 않았다. 발의 코등이 위를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면, 그 위를 재차 밟으며 공간을 가로지른다.
운무(雲舞)가 일어났다. 신영(身影)이 대지에 불볕처럼 늘어지며 환각을 만들어 내었다. 그 모습은 실로 망량의 백팔유령환을 연상하게 했는데, 실제로 장홍의 숙련도가 높아진다면 백팔유령환을 익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운산 지옥수련 동안에 전수받았던 두 개의 비기(秘技)는 원래 장홍이 지니고 있던 가능성을 한층 크게 개화시켰다.
심등대법(心燈大法)과 무결천위(無決天位)!
창천룡 용천명은 겉핥기로만 이해하는 바람에 기대이하의 성취를 얻고 말았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다들 비류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면서 의념의 경지를 살짝 엿본 적이 있고, 두 대법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위력을 습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파파파파팟…
한 사람은 공격하기만 하고 한 사람은 피하기만 하는 기묘한 전황이 무려 이백 오십 초 동안 이어졌다. 삼성은 전력을 다해서 공격하고 있는데 장홍이 신출귀몰하게 피해내자 화딱지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 이 놈! 싸우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 당장 목을 내밀어라!”
하지만 장홍은 그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피하는 데만 집중했다. 언뜻 장홍이 완벽하게 피하는 듯 보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조금이라도 반격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면 움직임이 둔해질테고 그 때부터는 삼성이 원하는대로 끌려가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때였다.
쿠콰콰쾅 –
마치 폭탄이 터진 듯, 후방에 있던 만해 염마귀뚜라미의 시꺼먼 공간에 폭열(暴熱)이 일어났다. 폭열의 범위와 광채는 마치 화약 수천 근을 터뜨린 것처럼 밝고 거대했다.
” 크윽?!”
폭발의 후폭풍 때문에 장내에 있던 자들은 일시적으로 대결을 멈추고 뒤로 날아가려는 몸을 천근추로 바로잡아야 했다.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제일 빠르게 파악한 것은 장홍이었다.
‘ 왔군! 부탁하네!’
만일에 지원군조차도 통하지 않는다면 장홍도 여기를 무덤으로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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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라?’
현운은 자신의 목이 아직도 붙어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분명히 마지막에 일자혜검이 실패한데다 전신의 기력이 다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이제는 천겁이성의 풍륜에 목을 내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하지만 천겁이성은 아직까지 그를 끝장내지 않은 상태였다. 칠흑같은 어둠의 공간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천겁이성은 나직이 말했다.
검은 안대가 부르르 떨렸다. 그는 이미 바닥에 누워서 반쯤 혼절한 현운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어둠 너머의 적(敵).
” … 누구냐. 누구길래 의지만으로 내 움직임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냐.”
천겁이성, 금검사자 은룡은 현운을 죽이지 않은 게 아니다. 죽이지 ‘못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현운이라는 강적을 처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운을 베려는 순간에 엄청난 의념(意念)이 소용돌이처럼 그를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의념은 실재하는 물리력이 아니라서 무시해도 천겁이성의 몸이 다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격적인 의념이 그에게 도달하는 걸 방치하게 되면 그대로 의지력이 박살나 버리고 만다. 의념은 정신공격도 가능했기 때문에 도저히 좌시할 수 있는 견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견제는 놀랍게도 만해 염마실솔의 ‘외부’에서 그에게로 정확히 쏘아지고 있었다. 얼음보다 차갑고 냉철한 살기가 어둠을 헤쳐나오고 있다. 어찌나 정제된 의지인지 이성의 등줄기에 땀이 배여나올 정도였다.
천겁이성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정도 역량의 소유자를 만나 본 일은 많지 않다. 자신의 주군 북천멸겁보다는 약하지만, 이 살기의 주인은 충분히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절대고수다!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성은 견제를 벗어나려 해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현운을 죽이려 하면 자신이 치명타를 맞고 만다. 결국은 상대방과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침음성을 흘렸다.
” 으음… 그대는 누구요?”
그 대답은 행동으로 드러났다.
쿠콰콰쾅 –
만해의 공간을 일직선으로 꿰뚫고 날아든 폭열! 천겁이성은 만해의 공간 속에서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었으므로 손쉽게 피했지만, 이윽고 만해 염마실솔에 모습을 드러낸 장본인을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여자?!’
폭열이 일어난 이유는 상대방이 원거리에서 쏘아낸 의념이 현실에 구현화되면서 거대한 빙폭(氷爆) 현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난히 한기가 도는 이유는 상대방이 지닌 살기와 냉철함이 금검사자 은룡의 심기를 상회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초절정고수가, 고작해야 나이가 이십 세를 갓 넘겼을 법한 아름다운 미녀(美女)라니?
천겁이성은 맹인이라서 눈으로 직접 상대방의 외형을 확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기감(氣感)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해 있어서, 보이지는 않아도 기감으로 상대방의 외형과 생김새를 보는 것만큼이나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상대방의 외견은 마치 신이 직접 깎아서 만든 듯한 천상(天上)의 미모(美貌)였다.
혜성이 달빛을 스치는 순간, 혹은 별구름을 이어서 상상으로 빚어낸 듯한 미색(美色)! 어지간한 남자는 마성(魔性)이나 다름없는 그 외모에 홀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맹인이라 객관적으로 사실파악만 하는 이성조차도 감탄할 정도니 가히 천상의 가인(佳人)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성이 놀란 것은 그녀가 뿜어내는 검기가, 그에게서 빛을 빼앗은 장본인의 것과 매우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이성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검후(劍后) 이옥상? 설마… 당신인가?”
천무삼성(天武三星)
검후 이옥상!
다른 천겁칠성과 다르게 이성은 처음부터 천겁령에 가입하려 하지는 않았다. 칠십 년 전, 동영 최고의 병법자인 귀면도 동문보의 습격에서 황제를 지켜낸 금검사자 은룡은 최고의 명예를 구가하고 있었다. 황궁제일고수라는 명호에 우쭐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삼절황검이 어느 경지에 올랐는지 알아보려고 강호무림을 휘젓고 다녔다. 황궁 삼대무학 중 하나를 달통한 달인의 실력은 과연 대단했다. 그는 정천맹과 흑천맹을 통틀어 오십 번 비무했지만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정천맹과 흑천맹에서는 과연 황궁제일고수답다고 치켜세워줬지만 그의 욕심은 끊이지 않았다. 금검사자 은룡은 호기롭게 남해(南海)의 검각(劍閣)으로 가서 자신이 천무삼성의 전설을 뛰어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결과는 처참했다. 금검사자 은룡은 당시 정천맹주나 흑천맹주를 뛰어넘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검후와의 대결에서 삼백 초도 되지 않아서 패배하고 말았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그는 너무나 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계속 덤벼들었으나, 검후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지 못하고 두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분노와 증오!
그는 황궁제일고수의 지위를 버리고 북천멸겁을 따라서 천겁령에 투신했다. 과거 이미 천무삼성을 뛰어넘었다는 북천멸겁을 따른다면 천무삼성을 이길 수준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에 지난 과거를 회상한 천겁이성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 … 아, 아니군. 그녀와 외모가 달라… 기세도.”
그래도 착각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천겁이성은 상대방이 검후의 제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 기감(氣感)이 칠감(七感)의 영역에 도달해 있군요. 당신같은 초절정고수가 제 사부님을 알고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마치 천상의 화음이 고요히 율격을 맞추는 듯,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천겁이성도 순간 마음이 울렁였지만 이내 그 효과가 상대방의 사심(邪心)없는 천성 때문이란 걸 알아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 별 거 아니다. 난 그녀에게 패했고 두 눈을 빚졌다. 언제고 그 빚을 갚으려 한다.”
” 당신이 은룡(隱龍)이군요.”
흠칫!
천겁이성이 몸을 떨었다. 그는 검은 안대를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
” 나를 아는가?”
” 사부께선 늘 상서롭지 못한 일로 당신을 베었던 일을 후회하셨습니다.”
” ……!!”
그의 마음이 격동했다.
반 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그는 검후가 자신을 베고 오만하게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밤 꿈에서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증오가 끓어오르는 동안 그의 검은 갈수록 흉폭하고 맹렬해져 갔다.
검후에게 복수하고 말겠다.
오로지 그 일념으로 삼절황검을 연마했고, 동천멸겁에게 혈전이라는 이상한 비법을 배우면서까지 강해지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검후의 제자뻘 되는 의문의 여고수에게 ‘후회’라는 한 단어를 듣자, 그의 마음속 한켠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 나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왜?’
”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질문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이성은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지금은 전투 중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야, 지난 칠십여 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나이를 먹을대로 먹어서가 아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생각할수록 회한만이 덮쳐오기 때문이다.
그는 망념을 잊고 다시금 검을 잡았다.
” 그렇다. 나는 은룡(隱龍)이다. 너와 겨루기를 원한다!”
어째서 자기소개를 할 때 천겁이성이라고 말하지 않은 건지는 그 스스로도 몰랐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천겁령 소속이 아니라, 한 명의 검객으로써 눈 앞의 여고수와 결판을 내고싶은 마음이 강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서 흘러오는 기백과 잠재력은 간만에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잠시 후 그에게 대답이 들려왔다.
” 검후의 제자, 나예린.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음 순간 –
두 검사(劍士)는 모든 것을 잊고 서로가 지닌 절학의 최대절기를 내보였다. 남궁상이나 현운도 상대가 안될 정도로 막강한 금검사자 은룡이었지만 나예린 앞에서 함부로 힘을 아끼면 즉시 패배한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무결천위와 심등대법의 수련을 통해서 의념의 경지에 급성장해서 도달했지만, 역시 전대(前代) 황궁제일고수와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하다. 이 자리에서 전력을 다해서 쓰러뜨리지 않으면 그녀 또한 칼의 녹이 될 게 뻔했다.
파지지직
기류(氣流)가 뒤틀리며 염마귀뚜라미의 공간에 와풍(渦風)이 일어났다.
바싹하고 올올이 영혼이 울부짖는다.
어둠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황궁 삼대절학이자, 무장(武將)들이 익힐 수 있는 최후 단계의 검학(劍學)인 삼절황검(三絶荒劍)이 뻗어 나왔다.
삼절황검(三絶荒劍)
비오의(秘悟意)
찬황흑풍(燦皇黑風)
석년의 검후도 찬황흑풍을 상대로 할 때는 정면으로 받아넘기지 못하고 일단 피해야 했다. 단일위력으로는 최강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면’의 파괴력이 압도적이었다. 황궁무학 특유의 패도적인 힘을 수십 년 이상 단련해 온 은룡만이 사용할 수 있는 필살기였다.
무엇보다도 만해 염마실솔의 공간에서는 사용자의 기가 무한히 충전되는데다가 모습마저 보이지 않아서, 상대하는 쪽에서는 공격방향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필살기를 얻어맞는 격이었다. 은룡이 천무삼성을 상대로도 승리를 자신하는데는 이 만해의 위력이 절대적이었다.
‘ 이겼다! 이걸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놈이 있을 리가 없다!!’
이제 나예린의 천상의 미모는 찢겨져서 만해 염마실솔의 먹이가 될 것이다. 세상의 지보를 없애는 느낌이 들어서 아까웠지만, 일대일 결투에서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할 여유는 없다.
무엇보다도 만해의 바깥에서 정확하게 은룡의 위치를 알아내고 의념을 쏘아보낼 정도의 실력자다. 방심하다가는 당한다는 사실을 오랜 실전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투쾅!!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나예린이 호신강기를 써서 막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신강기 따위로는 오래 막을 수 없는 게 찬황흑풍의 기(技)다.
투쾅
두 번째 격음이 울리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두 번씩이나 울리는 상황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맹인인 그는 기감으로만 주변을 파악할 수 있는데다, 완전한 칠흑의 어둠인 염마귀뚜라미에서 눈으로 뭔가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
” ……!!”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묘의(妙意)
통천하(通天下)
은룡은 자신의 가슴에 한 자루의 장검이 꽂혀있다는 사실을 알아 챘다.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도 몰랐지만, 나예린의 일격은 확실하게 그에게 치명상을 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무형무흔무기(無形無痕無氣) 상태로 은신해서, 왠만한 기감으로는 위치조차 파악이 불가능한 그에게!
비틀
그는 천천히 뒤로 쓰러지려다가, 간신히 심령을 붙잡고 버티고 섰다. 여기에서 쓰러지는 건 검사의 수치다.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숨을 몰아쉰 천겁이성 은룡은 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어떻… 게… 염마실솔에서… 나를…”
나예린 또한 크게 지친 상태였다. 묘의 통천하는 다른 오의나 극오의와 다르게 도박같은 기술이었고, 성공할지는 확신조차 불가능했다. 잠력까지 끌어쓴 나예린은 쓰러져서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묘의 통천하는… 당신과 겨룬 후 사부님께서 만드신 기술이에요. 해상비조천참절 같은 광대(廣大)한 기술과 다르게, 오직 황궁무학에 대응해서만 쓸 수 있는 일식(一式)입니다.”
순간 은룡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뭐… 라고…?”
” ……”
나예린은 사부인 검후의 명예를 위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검사에 대한 예의로 대답을 해 줬지만 그 이상은 무리인 것이다. 하지만 은룡은 듣지 않아도 행간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칠십 년 전.
은룡 자신은 검후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검후 또한 삼백 초 동안 최선을 다해서 싸운 것이다. 필사적인 승부였기 때문에 검후도 은룡을 향한 살초를 거두는 게 불가능했고, 그래서 의도치않게 두 눈을 실명시킨 것이다. 실력이 비슷한 상황에서는 봐주는 게 불가능하므로.
미안한 마음은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싸우는 날에는 은룡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삼절황검에 대응하는 대항마(對抗魔)를 개발한 것이다.
‘ 그럼… 그 두 번의 소리는…’
투쾅 하는 소리가 들린 이유는 호신강기에 막혔기 때문이 아니다. 묘의 통천하는 ‘상대의 흐름’에 맞춰서 자신의 의지를 흘려내는, 의념(意念) 단계 전용의 기술. 나예린은 두 번에 걸쳐서 ‘면(面)’으로 오는 찬황흑풍의 기술을 직각으로 꺾어버려서 무효화시킨 것이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묘의 통천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삼절황검의 완벽한 시간차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사용자 또한 의념의 경지에 올라있어야 한다. 나예린이 도박같은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천겁이성 은룡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 크… 크크크… 그랬군… 나는… 이기고 싶다는 의지에서도… 그녀에게 뒤쳐진 것인가…”
진 사람보다 이긴 사람이 더욱 이기고 싶어했다는 것. 어이없는 일이다.
이제서야 그는 자신이 황궁제일고수였지만 천무삼성 검후를 이기지 못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무삼성은 강하지만 더욱 강해지려 하는 자들이었다.
끝도 없이 순수한 무(武)를 탐구하는 마음. 천성과 노력이 합쳐진 자들이었기에 ‘황궁’이라는 고리에 매여 있는 그가 넘지 못한 한계를 빠르게 넘은 것이다.
‘ 그래. 이 찬황흑풍은 그 때의 검후를 상대로라면 반드시 통할 거야… 하지만 칠십 년 후 지금의 검후는, 전혀 생각도 안 해봤다…’
허탈하게 웃던 이성은 마지막 기력을 다해서 입을 열었다.
” 너라면… 검후를 뛰어넘을 것이다… 하지만… 황궁에 있는 그 괴물…”
” 괴물…”
끄륵거리며 괴이한 웃음이 성대에서 흘러나왔다.
” 삼대절학을 통합한 그 자는… 분뢰수(奮雷手)… 귀면도 동문보가 일 초만에… 흐하하… 너희는… 진짜 괴물이 누군지… 모르…”
풀썩
나예린은 잠시 뒤를 돌아 보았다. 기력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그녀가 강호에 나온 이래 만나본 최강급 고수인지라 지금도 전신이 떨렸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만일에 상대방이 장기전으로 가려고 했다면 나예린은 반드시 패했을 것이다. 나예린이 용안으로 만해를 꿰뚫어 보는 건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용안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조급증을 유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 쓰러져 있는 현운을 들쳐 업었다.
‘ 안 돼. 이런 생각은…’
그녀는 잠시 약한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비류연이 있었다면,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기자신이 싫었다. 자신의 힘으로 강해지기로 생각했는데도 아직까지 이런 망설임이 있다니.
파앗!
그리고 사용자가 죽어서 만해의 공간이 깨졌다. 흑암의 공간에서 벗어난 순간 나예린은 기묘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 남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