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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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지회
햇빛을 받아 선명하게 반짝이는 칼날. 그것은 검이었다.
그것도 백 년의 풍상에도 날이 상하지 않는 절세 보검.
평범한 자의 소유일 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모두 검?’
그러나 이 검들은 완전하지 않았다. 반 토막으로 부러진 채 대지에 을씨년스럽게 박혀 있었다.
그래, 마치 묘비처럼…
“이 묘지의 황량함이 마음에 드는가?”
그들 가까이 다가온 노인이 한 명 있었다.
빛바랜 유삼, 가슴께까지 흘러내린 수염. 치렁치렁한 백발. 도제의 눈이 불꽃처럼 뜨겁고 낮처럼 격렬했다면 이 노인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고 밤처럼 고요했다.
노인의 오른손이 있어야 할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노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옮긴 여관도 몇 명이 짧은 신음과 함께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얼굴은 끔찍할만큼 흉측한 검흔들로 뒤덮여 있었다. 비늘 대신 칼날을 두른 수십 마리의 뱀들이 꿈틀거리며 기어간 듯한 흔적. 감히 눈을 마주치기조차 오금이 저릴 정도로 두려운, 실로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노 선배님께서는 누구신지요?”
빙검이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심상치않은 검기. 노인의 손에는 검이 없지만 노인의 마음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한 자루의 검이 있었다.
“나 말인가? 난 이 묘를 지키는 평범한 묘지기일세!”
노인의 대답에 빙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묘라니요? 이곳 어디에 무덤이 있단 말씀입니까?”
주위를 둘러봐도 둥글게 거북이 등처럼 흙을 쌓아 올리려 다진 봉분은 보이지 않았다. 묘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땅 전체가 묘지일세. 자네들의 눈에는 이 대지 위에 꽂혀있는 저 많은 검들이 보이지 않는가?”
물론 보였다. 확실히 각양각색의 검들이 대지에 박혀 세월의 풍상을 뒤집어쓴 채 자연의 일부처럼 서 있었다. 비스듬한 것도 있고 똑바른 것도 있고 모두들 제 각각이었다.
“여기 있는 검들의 수는 정확히 108자루라네. 그리고 백 년 전에는 모두 주인들을 가지고 있던 검들이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울림은 무척이나 불길한 것이었다.
“그, 그렇다는 것은…”
검은 무인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이런 외진 곳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멍청이 검객은 구주를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인이 자신의 검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단 한가지 뿐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산화했군요.”
갑자기 공기가 엄숙하게 변했다.
“노 선배님께서는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염도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노부의 하잘것 없는 이름을 알아서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만, 굳이 밝히자면 노부는 섭운명이라고 한다네! 아는 사람들은 검치라고도 불렀지.”
“헉!”
검치 섭운명.
칼에 미친 바보라는 뜻을 가진 별호의 소유자.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여 년 전, 아무렇게나 깍은 나뭇가지 하나로 뭇 검도 고수들과 천하제일검을 다투었던, 그래서 별호도 일지번천(나뭇가지 하나로 하늘을 뒤집는다)인 그자를 향해 미치광이 바보라고 부를 수 있는 그자야말로 진정한 왕바보일 것이다.
백 년 전, 수많은 무용담을 남기며 강호를 풍미했던 검도계의 전설!
‘도에 일도단애 도제 용경의가 있다면 검에는 일지번천 검치 섭운명이 있다.’
당시 강호를 떠돌던 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비교할 때면 항상 사람들은 검치 섭운명의 손을 들어 주었다. 당시는 아직 천무삼성 중 필두인 검성 모용정천이 이름을 얻기 전이었다.
백 년! 수많은 검객들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실제로 잊혀졌다. 그러나 지금도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검성 모용정천의 실력은 곧잘 백 년 전 전설의 검객 검치 섭운명과 비교되곤 했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검객이었는지 능히 짐작할수가 있다.
“여기 꽂혀 있는 검들 모두가 다 그때 그들이 지니고 있던 애검들이었네. 이제 모두가 다 주인을 잃고 자신의 생명마저도 잃은 검들이지. 그리고 그 검을 묘비로 삼은 묘지가 생겨났네.”
한 번 부러진 검은 다시 이어 쓰지 못한다. 이미 그 생명을 다했기 때문에 이어봤자 실전에서는 더이상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악몽의 한 가운데서 노부 혼자만이 비겁하게 살아남았네. 아니, 그가 살려줬다고 해야 더 옳겠지!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전령으로 말일세.”
아직도 그때의 치욕과 굴욕감을 잊을 수가 없는 듯 하다.
“자! 보게!”
검치가 자신의 허름한 장포를 훌렁 벗어 젖혔다.
“…!”
비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예린도 장흥도 이진설도 독고령도 마찬가지였다. 좌중들의 눈이 파르르 경련했다. 염도와 빙검을 비롯한 대표단 전원의 눈 또한 크게 부릅떠졌다.
가뭄의 계속되는 황량한 대지에 선 고목처럼 그의 몸은 깡말라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조금 전에 그와 똑같은 흔적을 본 적이 있었다. 검치의 얼굴 전체를 덮은 검흔도 흉측했지만 그의 몸에 난 상처에 비하면 양반이라 할 만했다. 그의 상반신을 갈가리 찢어 놓은 빽빽한 거미줄 같은 상처. 그것은 그들이 겁흔벽에서 본 것과 똑같은 형태의 상처였다.
그리고 그것은 백 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패배자의 낙인이었다.
“이, 이럴 수가!”
빙검과 염도가 동시에 소리쳤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고 이내 무언의 합의를 이루었다.
“으음…”
비류연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관찰만을 계속했다. 그의 눈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 누구도 현재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렇다면 역시 그 팔은 그 자가…”
빙검이 검치의 헐렁한 소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답은 의외였다.
“아닐세! 이건 그자의 짓이 아닐세.”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날세!”
“예?”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반문에 섭운명이 다시 한번 대답해주었다.
“날세! 범인은 검치 섭운명이지!”
“그런 천인공노…”
“…하지 않으신 분이…”
비분강개 하려던 사람들은 화급히 입을 봉해야만 했다.
“이 오른손을 자른 건 바로 나 자신일세. 이 얼굴의 상처 또한 대부분 나 자신이 저지른 소행이지. 스스로의 부족함과 모자람에 절망한 나머지 저지른 객기라고나 할까? 지워지지 않는, 그리고 지울 수도 없는 광기의 흔적이지.”
‘그’에게 패하고 검치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검담을 나누던 친구들과 존경하는 선배들을 그자리에서 모두 잃었던 것이다.
더이상 자신과 검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통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줄수 없었던. 아니 함께 죽을수 없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오른손은 수전증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계속 떨렸다. 검은 커녕 술병조차 제대로 쥘 수 없었다. 검치는 자신의 오른손이 두 번 다시 검을 잡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코 자신이 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이미 훌륭한 패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