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the Nine Dragons RAW novel - Chapter (175)
구룡전기-175화(175/217)
구룡전기 (175)
“그 난리 속에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태어나 누군가를 걱정해 본 건 네가 처음이었다.”
화린이 구룡장주임을 알고 있었던 오황자는 그가 사혈맹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 걱정이 앞섰다.
어렸을 땐 그렇게 괴롭혔지만 몇 달 전에 구룡루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화린 역시 자신의 동생이며 자신이 큰형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처럼 화린 역시 괜찮은 사람이라 인정하여 함께 지내는 동안 정을 주어서였다.
그는 황제에게 화린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한 적도 있었지만 황제 역시 화린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화린이 헤쳐 나가야 할 일이라며 다른 황자들과 황녀들에게는 화린이 구룡장주임을 알리지 말라 엄명을 내렸고, 이에 오황자는 혼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아마도 내 어린 날, 너에게 한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서가 아닐까 한다. 그때 구룡루에서 너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았다면 이러한 걱정도 안 했을 것인데 말이다.”
화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겼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사황을 만나지 않았다면 제가 사혈맹의 무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개인이 단체를 이기기는 힘들 테니까. 그것도 단체들이 모인 연맹이니 그들 중 너보다 강한 자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화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림을 삼등분하고 있는 단체이니까요. 사실상 제가 이길 가능성은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걸 알고도 그리 싸웠단 말이냐?”
“일단 버티면 누군가는 나를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천맹이든 마교든 말입니다.”
“무모한 생각이다. 한 치 앞에 일어날 상황도 모르는 우리가 어찌 그 먼 곳을 바라보고 예측할 수 있겠느냐?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라. 폐하께서 겉으로 드러내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식이라 안 좋은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릴 터이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다른 형님들과 누이들도 오셨다고 하던데 누가 오신 겁니까?”
“셋째 형과 여섯째, 일곱째가 왔고, 둘째, 넷째 누이가 왔어. 아마 숙부님 생신 당일에는 첫째 누이와 둘째 형님께서 오실 거다.”
“태자 형님께서는 안 오시는 겁니까?”
“큰형님께서는 국사를 배우시느라 바쁘시니 둘째 형님이 큰형님을 대신하여 친서를 전달하실 게다.”
“듣자 하니 요즘 황궁도 시끄럽다고 하던데.”
“내가 태어나 사물을 인식하고 난 후, 황궁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매일 시끄럽지. 황후마마는 황후마마대로, 비들은 비들대로, 대신들은 대신들대로 각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라 바람이 잦을 날이 없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가 좋긴 한가 봅니다. 그리 탐을 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난 좋은 건지 모르겠던데 왜들 그리 아옹다옹하는 건지.”
“그런데 황후마마께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글쎄다. 황후전에서 좀처럼 나오진 않지만 그래도 황궁의 행사 때에는 꼬박꼬박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때마다 싸움닭이 되어 비들을 들들 볶으시는 것도 여전하시던데?”
화린은 황후를 떠올리며 천성은 안 변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다른 비들을 어떻습니까? 황후마마께서 그리 분탕질을 치시면 비들도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폐하께서 비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신 적이 있어서 비들도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고 황후의 뒷담화나 하며 분을 삭이는 것 같다. 나의 모친께서 대표적인 분이시지.”
화린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무척이나 아끼시나 봅니다.”
“나도 그리 생각해. 가만히 보면 황후마마께서는 폐하만을 바라보고 사시는데 폐하께서는 간혹 딴 여인에게 눈을 돌리시니, 질투에 사로잡혀서 그리 비를 닦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형님께서는 참 긍정적인 생각을 하십니다. 다른 형님들이라면 모친의 편을 들어 황후마마의 험담을 늘어놓았을 텐데 말입니다.”
“나도 모친의 비위를 맞출 때는 그리하지. 하지만 그뿐이잖아. 그러고 나면 나에게 이득이 되는 건 하나 없는데. 나중에 불이익이 찾아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그냥 내 위치에서 좋게 생각하는 거지.”
오황자가 어릴 때는 철이 없었다고 해도 지금 보면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화린은 느낄 수 있었다.
“큰형님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해. 최근에 폐하께서 큰형님께 황궁 보고를 개방하셨는데, 보름 동안 황궁 보고에서 지내시고는 나와서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신다네.”
화린의 모친은 황궁 보고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 황궁지약을 훔쳐 몰래 숨겨 두었고, 그걸 찾은 화린이 오 년 동안 황궁 보고에서 수련하고 나와 황제에게 열쇠를 돌려주었다.
그게 육 년 전의 일이었는데, 최근에 개방하였다면 그가 황궁 보고에서 지낸 오 년 동안의 흔적을 모조리 지웠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큰형님의 무공도 상당하시겠군요.”
“그런데 큰형님은 몸치야.”
“몸치?”
“내가 비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동창이며, 금의위, 황궁수비대의 무사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을 많이 지켜보았는데, 큰형님은 무공에 소질이 없으신 분이야. 대신 이게 좋아.”
오황자인 주영호는 자신이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큰형님께서는 무공을 익히시지만, 아마도 건강을 위해서 익히는 것이지, 호신의 목적이나 혹은 무공으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 익히시는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래. ‘황궁 무고에서 무공서도 좀 보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무공총람이라는 책만 읽고 나왔다고 하더구나.”
화린은 자신이 읽은 무공총람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께서 큰형님을 잘 보필해 주십시오. 저는 밖에서라도 응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하마. 너는 네 걱정이나 해. 무림에서 그런 큰 사고 치고 다니지 말고.”
화린은 고개를 뒤로 돌려 입구를 향해 잠시 바라보다 다시 주영호를 보았다.
“저를 찾아온 사람이 있나 봅니다.”
“너를?”
그때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흥친왕 전하께서 구황자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숙부님께서?”
“그러하옵니다.”
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영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리고 너 혼자 있는 것이 적적하면 이 형의 방에 와서 지내도 된다. 여긴 혼자 쓰기에는 너무 넓거든.”
화린은 고개를 주억거린 후에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화린은 흥친왕 주영국을 만나 독대하였고, 그도 사혈맹과 구룡장의 싸움에 대해서 궁금하였는지 그에 대해서 물었다.
화린은 가감 없이 있었던 일 그대로를 말해 주었다.
“결국 두들겨 맞고 떡실신이 되어 의원 신세를 졌다는 말이구나.”
군대를 통솔하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신분에 맞게 말을 순화하여 사용하기보다는 편하게 말을 하였다.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는 제가 이길 수 없는 강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중원십대고수 중 한 명이라고 하나 최고를 다투는 세 명 중 한 명이니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주영국은 사황 백무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듯 말을 하였고, 화린도 그의 말을 인정하였다.
“반 수의 차이라고 하지만 그는 나를 상대로 빈틈을 보여 주지 않았으니 백 번, 천 번을 싸워도 지금은 제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하면 시간이 흐르면 이길 수 있겠느냐?”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는 노쇠해 갈 것이고, 저는 아직 정정하니 이대로 이십 년만 더 지나면 제가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하나, 그리 이긴다면 제가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 지금도 부지런히 수련 중입니다.”
주영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련이나 학문을 갈고닦음에 있어 습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지. 하루에 얼마나 많이 걷느냐가 아니라 매일 똑같은 걸음을 걷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화린이 고개를 숙여 조언을 듣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겼다.
“아, 약소하지만 제가 숙부님의 생신을 맞아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화린이 허공에 손을 올려 뭔가를 잡는 시늉을 하다가 쭉 당기자, 손에 황색의 보자기로 싼 넓은 상자가 딸려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주영국은 놀란 눈으로 화린을 보았다.
“색목국의 마법이라는 것입니다.”
화린은 자신이 배교의 술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주영국에게 숨겼다.
“색목국의 마법?”
“그렇습니다. 맹호사사혈전대 소속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색목국으로 임무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주영국 역시 화린이 맹호사사혈전대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화린의 자료를 모두 지웠다고 하지만 그는 흥친어림군의 수장으로 화린이 맹호사사혈전대에 입대하였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의 마법을 익힌 것이냐? 한두 해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마법을 구해 돌아와서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부단히 수련하여 겨우 이 정도의 재주를 부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가 음흉하다는 소리는 듣고 있었지만 마법을 익히고 있다는 걸 숨길 줄은 몰랐구나.”
“마법뿐만 아니라 제가 임무에 투입되어 멸문시킨 문파, 단체 등에서 얻을 수 있는 무공이나 비술 등을 취해 몰래 익혔습니다.”
“그 많은 걸 익혀 도움이 되겠느냐? 하나를 전문적으로 익힌 고수가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저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 뭐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는 최대한 많은 무공을 익히고 그 무공들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여 저만의 무공을 만들고자 합니다.”
“너만의 무공? 독문 무공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일대종사의 길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일대종사라는 말은 다양한 세상에서 쓰이는 말로 무림에서는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여 무공을 알리고, 유명세를 얻고, 수많은 제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등 무림계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존경을 받는 스승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에게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서예를 하는 예인들에게는 새로운 문체를 만들어 널리 세상에 퍼트리는 이들이 일대종사라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처음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전수함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들에게 붙여 주는 영광스러운 칭호였다.
“폐하와 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으로 무림에 족적을 남기고자 할 뿐입니다.”
주영국은 화린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곤 뭘 해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알겠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
화린은 포장을 한 황색 보자기를 푼 다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해동국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해구신과 천뇌산삼입니다.”
상자 안 가운데에 해구신이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천뇌산삼 여덟 뿌리가 있었다.
“이 귀한 걸…….”
“음지의 상인을 통해서 구입한 것이라 죄를 짓긴 하였지만 숙부님께서 드시고, 오랫동안 건강하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허허. 이거 나 혼자 다 먹고 숙모와 밤을 보낸다면 태호 동생이 태어날 수도 있겠구나.”
주영호가 호탕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곤 화린의 눈에서 옅은 푸른빛이 감돌았다.
“숙부님.”
“말하여라.”
“삼 년 전에 궁상파에서 한 장의 미인도를 선물로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마음에 쏙 들어 저기 걸어 두고 오며 가며 보고 있단다.”
화린은 몸을 돌려 벽에 걸린 미인도, 선화유정도를 보았다.
“저에게도 오랜 세월이 흐른 미인도가 한 장 있습니다. 숙부님의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화린은 품에서 그림이 담긴 족자를 꺼내어 주영국에게 보여 주었다.
며칠 전 화방에서 산 황금화 전여빈의 전신 그림으로 화린이 오래된 먼지와 습기, 이끼 등과 술법을 함께 사용하여 오래된 그림으로 둔갑을 시켜 놓은 것이었다.
얼핏 보면 선화유정도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 그림처럼 보였다.
“오호,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숙부님.”
그림에 마음을 빼앗긴 듯한 주영국에게 화린이 나지막하게 말을 하였다.
“이 미인도와 벽에 걸려 있는 미인도를 바꾸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