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a Munchkin RAW novel - Chapter (116)
먼치킨 길들이기 116화
* * *
시간이 얼어붙은 듯했다.
멈춰 있던 두 사람을 깨운 것은 10층의 미로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였다.
밀실의 바닥으로, 벽으로. 지진이 오는 것 같은 진동이 멀리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조급해진 에이얀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숨이 막혀 왔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키네미아가 손 틈 사이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에이얀은 얼굴을 쓸어내린 후에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면 되겠어?”
“뭐?”
“뭐든 할게. 네가 바라는 대답. 네가 바라는 말. 전부 다.”
키네미아가 입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날뛰는 듯 어지러웠다. 애써 침착하기 위해 들끓는 숨을 반복해서 내리 쉬었다. 그러나 아무리 뜸을 들여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내가 바라는 대답?
전부 사실이 아니길 바라면, 내가 바라는 대로 입에 발린 이야기를 해 주겠다는 걸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찰 대답을 꺼낼 게 아니라, 내게 네 이야기를 솔직히 전해야지.
어떻게 지금 이런 상황에 와서도-
“-너는 계속 날 기만하네.”
키네미아는 서늘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에이얀이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미아.”
돌아선 키네미아를 향해 그가 손을 뻗었다.
키네미아의 손끝이 닿았다. 어릴 적, 둘이 함께 베히모스를 찾아갔던 예전처럼 에이얀이 작은 손의 끝을 잡았다.
긴장으로 차가워진 기다란 손은 잡은 손에 힘을 주지도 못한 채 감싸고만 있었다.
키네미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리, 시험은 이제 끝내자.”
잡힌 손에서 힘이 빠졌다. 스르륵 손이 풀리자 그녀는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제 뒤에 망연히 선 에이얀을 둔 채.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게 나을 테니까.
* * *
남자는 짙은 어둠 속에서 킁, 숨을 들이켰다.
겁에 질린 소녀의 체취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제 심장을 위협하는 소녀. 저것의 여린 살에서 묘하게 익숙한 냄새가 섞인 것도 같은데…….
그가 기억을 되짚는 사이였다.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몸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
우득, 우드득. 제 몸이 부서지고 재생된다. 그 끔찍한 감각 속에서도 그는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찾았다.’
‘저게 바로.’
‘내 힘.’
그 순간이었다.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고요 속에서 부유하는데, 귓가에서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 같은 놈!”
흔들의자에서 잠시 눈을 붙였던 줄리안 에버렛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쳤다.
황실의 비밀 서고에 찾아든 그를 질책하던 케네스 리온의 목소리였다.
이제는 오래된 꿈을…….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그는 제 심장께를 어루만졌다.
‘그건 결국 죽었나.’
미로 속에 숨어 살던 지저분한 껍데기.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아주 어릴 적부터, 매일 꿈속에 찾아 들어와 과거의 영광을 속살거리던 마물.
사생아로 태어나 모멸과 천시가 일상이었던 그에게는, 그 속삭임이 마치 선택이라도 받은 듯한 짜릿한 환희를 가져다줄 때도 있었지만…….
꼴좋게 됐군.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줄리안 에버렛이었다. 그런 퇴물의 영혼이 아니라.
“키네미아 리온.”
그가 혀를 굴려 한 이름을 읊조렸다.
얼마 전, 그는 워맥 자작의 소유지에서 낡은 책을 찾아냈다.
마치 누가 부러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던 용사와 그가 남겼다는 고대 유물에 대한 기록이 적힌 책.
자작이 찾으려 했던 고대 유물은 그 소녀가 가지고 있을까?
그는 귓가를 맴돌던 케네스 리온의 말을 떠올렸다.
“참, 질긴 악연이야.”
뭐, 이젠 그것도 끝낼 때가 됐지.
21장 우리가 전하지 않던 것들
유모 바네사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며칠 사이에 유독 잠이 많아진 제 아가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몸이 좋지 않은 건가 싶어서 쉔 티엔을 불러도 보았지만, 키네미아를 진찰한 쉔 티엔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럼 마음의 문제라는 걸까.
흠, 깊게 숨을 내쉰 바네사가 키네미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가씨.”
속삭이듯 부르자 이윽고 새파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멍한 눈이 바네사의 눈을 찾아 올려다보았다.
새삼 예쁜 얼굴에 감탄하던 바네사는 가볍게 키네미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 잠시만 일어나서 뭐라도 드시고 주무세요.”
“……으음.”
부스스 일어나니 머리카락이 비죽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키네미아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키네미아가 배시시 웃으며 바네사를 꼭 끌어안았다.
“더 만져 줘, 유모.”
“이렇게요?”
바네사는 어리광을 부리는 키네미아를 한 팔로 끌어안고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아니이! 이렇게 말고!”
웃음을 터트린 바네사가 비명을 지르는 키네미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가씨, 어디 아픈 데가 있으신 건 아닌 거죠?”
이마에 손을 올렸던 바네사는 키네미아의 체온이 높진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다시 내렸다.
“응응. 그냥, 자꾸 나쁜 꿈을 꿔서 자도 자도 피곤한가 봐.”
“그럼 향을 둬 볼까요? 혜민원에서 받아 둔 게 있을 텐데.”
이참에 입욕제와 침구도 바꿔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바네사가 돌연 두 손을 마주쳤다.
“참, 아가씨.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백작님께서 눈물의 서신을 보내셨는데…….”
“아…….”
편지가 눈물 때문에 우글우글해졌다면서 바네사가 고개를 젓자, 키네미아가 난처한 얼굴로 숙부를 떠올렸다.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셨을 터다. 조카가 수도로 온 사실도 몰랐는데, 갑자기 영웅까지 돼 버렸으니까.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지.’
창 너머로는 한낮의 태양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잠에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탑에서 돌아온 이후, 며칠 동안 줄곧 침대 밖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키네미아는 침대 위에 누워 바네사를 통해 그사이 황태후가 흑야를 인정하고 던전 관리국의 국장을 갈아치웠다는 이야기와, 키네미아 리온이 탑의 주인을 잡아 영웅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싫다…….’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키네미아가 재차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창틀에 새카만 그림자로 만들어진 듯한 깃털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그것은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아가씨?”
“갈게.”
미간을 구긴 키네미아는 거친 손길로 커튼을 쳐 버렸다.
* * *
“탑주님,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벤자민은 침대 위에서 모로 돌아누운 울프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다 큰 중년은 사춘기가 다시 왔는지 미동도, 대꾸도 없는 채였다.
“……탑주님.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입맛이 없네.”
벤자민은 이불을 걷어 내고 등짝을 팡팡 내려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이게 대체 며칠째인지.’
울프만은 시련의 탑에서 돌아온 이후 내내 저런 상태였다.
벤자민은 그날을 회상했다.
에이얀을 구하러 갔다가 키네미아를 마주하게 된 상황이었다. 10층에 도착한 울프만은 고생한 키네미아를 안아 주려 눈물 바람으로 두 팔을 쫙 벌렸다가, 제 품을 피하는 그녀에 의해 1차 충격을 받고 굳어 버렸다.
그런 울프만에게 키네미아는 냉랭한 얼굴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전부 알고 계셨죠?”
크리티컬. 2차 충격이었다.
키네미아는 충격에 빠져 입만 뻐끔거리는 울프만을 지나쳐, 흑야만 데리고 시련의 탑을 빠져나갔다.
당시엔 걱정스럽긴 했다만 괜찮으리라 여겼는데.
이게 웬걸. 울프만이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아예 파업까지 해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키네미아의 거부에 시름에 잠긴 건 마탑주뿐만이 아니었다.
에이얀도 제 방에 틀어박혀 마력만 미친 듯이 뿜어내는 중이었다. 제 근처에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사실 그것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내 먹지도 않고 괜찮을는지.’
마력을 헤치고 들어가 몇 번이나 문 앞에 식사를 준비해 두었지만, 그는 며칠째 손도 대지 않았다. 아무리 에이얀이라지만 언제까지고 먹지 않은 채로 살 수는 없을 텐데.
벤자민은 깊게 숨을 내뱉으며 목을 쓸었다.
마탑을 좌지우지하는 두 사람이 저런 상태였으니, 마탑은 태풍의 눈 속에 들어선 것과 같은 적막한 긴장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녀 측으로 재차 사역마를 보내 봤지만, 그쪽도 묵묵부답이고.
벤자민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았다.
‘어머니, 아버지. 제 능력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마탑의 붕괴, 세계 멸망.
차마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남사스러운 종말 따위를 떠올리던 그때쯤이었다. 벤자민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온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