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a Munchkin RAW novel - Chapter (143)
먼치킨 길들이기 143화
27장 충돌
사령을 피해 도망치던 늙은 기사가 나무를 잡고 멈춰 섰다. 헉헉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늑대가 우는 듯한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버렛 공작의 뒤를 따르는 게 아니었는데. 한평생 삶의 기준이라 생각했던 기사도란 것이 이렇게 형벌처럼 다가올 줄이야.
그는 보석을 쥐었다. 여긴 지옥이다. 도망쳐야 했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서 짐을 챙기고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으려던 때였다.
목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제 앞을 막아선 소녀의 검이 그의 목울대를 찌르고 있었다.
“사,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숨이 벌벌 떨리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를 응시하는 새파란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의 자상에서 고통이 점점 강해졌다.
“……제발.”
애처로운 목소리는 소녀에게 닿지 않는다는 듯,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말했다.
“안내해, 너희의 왕에게로.”
* * *
줄리안 에버렛은 긴 망토를 끌고 카펫 위를 걸었다. 그가 걷는 길 끝에 왕좌가 있었다.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는 왕좌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작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이렇게 공기가 달콤할 수가 있나.
멀리서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들도 마치 교향곡 같았다.
“하늘 아래 이렇게 완벽한 국가가 존재했던가?”
그는 어둠 속을 향해 물었다.
“그대는 본 적이 있나?”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과 바다처럼 새파란 눈이 드러났다.
“이따위 소꿉놀이가 하고 싶어 이런 일을 벌였나.”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남자를 쥔 채였다. 키네미아가 뒷덜미를 쥐고 질질 끌고 오던 남자를 왕좌 앞으로 집어 던졌다.
길을 안내했던 기사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 인형처럼 고꾸라졌다.
에버렛은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흥미로운 장난감이라도 관찰하듯 키네미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보낸 초대장은 어떠했지? 네 감상이 듣고 싶군. 직접 보고 싶었는데 보시다시피 바쁜 와중이라 좀처럼 짬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그의 기대와 달리 키네미아는 무감한 표정 그대로 에버렛을 마주했다.
“초대장은 네 앞에 두었지 않나.”
새파란 눈동자가 바닥에 내팽개친 기사를 가리키자 에버렛은 흠, 목을 울렸다.
분명 파격적인 초대장을 보냈는데 받지 못했던가? 저 예쁜 얼굴이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는데. 오늘을 위해 아이리아 리온의 무덤까지 팠던 고생을 생각하면 퍽 아쉬운 일이었다.
“대공녀는 영웅의 장례식에서 처음 뵈었는데, 기억나지 않으시겠지?”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 없을 리온의 후계자가 더없이 슬피 울던 그날이 무척 인상 깊었다고, 그렇기에 그 영웅의 무덤을 직접 파내어 선물하려 했다고, 에버렛이 그리 말하려던 때였다.
“호칭이 틀렸어. 대공 전하라 부르게, 에버렛 공작.”
그가 눈을 반짝였다.
“아하, 대공. 그래, 언젠가는 얻어 내리라 생각했지. 하나 대공께서는 언제가 되어야지 내 말을 알아들으시려나? 난 공작이 아니라 왕이야!”
그가 찢어질 듯 소리 지르자 샹들리에가 좌우로 흔들렸다.
“대공께서는 일국의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도 배우지 못하셨나?”
아! 그때 무엇이 생각났다는 것처럼 에버렛이 손잡이를 탁 쳤다.
“대공에게 예의를 가르칠 이들은 전부 죽었지?”
그는 정말 재미있다는 것처럼 끅끅 웃어 댔다.
“그러니까 나를 업신여기지 말았어야지. 나처럼 특별한 인간을 몰라보고. 나는 특별한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어. 언제든지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할 예정이었단 말이야.”
에버렛은 마침 잘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공의 조부가 마지막에 어떻게 괴로워했는지 알려 줄까?”
그의 눈동자가 키네미아를 핥듯이 관찰했다. 미세한 고통의 흔적조차 모두 찾아내어 만찬을 즐길 것처럼.
“숨이 막히는데 어찌할 수가 없었는지 목을 이렇게 긁더란 말이야.”
에버렛이 장난스럽게 제 목을 긁어 보였다.
“그 영감, 평생 그렇게 무기력했던 적이 없었을 텐데. 생의 마지막에서는 그래도 똑똑히 배웠을 거야. 그 독 구하겠다고 수도의 저택 하나 값은 치렀는데, 돌아보면 그렇게 만족스러운 소비도 또 없었지.”
하나 키네미아는 고저 없이 버석버석 말라 버린 투로 물을 뿐이었다.
“고작 네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린 죄였나?”
“고작? 왕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은 중죄다!”
“왕?”
작게 지저귀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키네미아의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백성도 없고, 나라도 없고, 누구도 우러러보지 않는 자리에 앉아 왕을 논하는 자를 세간에서는 광인이라 칭하지 않던가?”
키네미아가 우스꽝스러운 광대를 마주한 것처럼 키득키득 웃어 보였다.
이에 한순간 광대가 되어 버린 에버렛이 핏줄이 서도록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에게서 자신을 경멸하던 케네스 리온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단숨에 흥이 식었다. 역시 리온의 존재 자체가 그의 깊은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왕좌에 앉는 날이 왔음에도 자꾸만 벗어나고 싶은 과거에 그를 옭아맨다.
“걱정 말게. 곧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게 될 테니까.”
이내 카펫을 뚫고 수많은 손이 올라왔다. 오래된 고목처럼 앙상하게 마른 가지 같은 손들은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으어어어어-”
이곳저곳에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신경을 긁어 댔다.
그들은 곧 키네미아에게로 덮쳐 들어왔다.
팟!
그러나 손들은 그녀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무효화 능력 탓인지 영역 안으로 들어선 사령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뭐?”
놀란 에버렛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 어떤 징조도 없이 사령들이 먼지가 되어 갔다. 눈을 비벼 보았으나 환각이 아니었다.
“내 사람들을 건드린 값은 비싸게 갚아야 하겠어, 에버렛.”
* * *
키네미아는 먼지가 휘날리는 카펫 위를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달려드는 손이 하나둘 사라지고, 고통스러운 신음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어떤 주문을 외운 것도, 무슨 술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저건 인간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특별한 존재는 리온이 아니다. 바로 나란 말이다!
안절부절못하던 에버렛이 벽에 걸려 있던 예장용 검을 빼 들었다.
생전 검을 쥐어 본 적 없던 그의 어설픈 손놀림에 검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와 봐!”
그가 위에서 아래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난 왕이다! 너 같은 애송이 하나 상대하지 못할 줄 알고?”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키네미아에게 그가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하지만 저런 움직임으로는 개미 하나 잡지 못할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을 지켜보던 키네미아는 무심히 검을 한 번 휘둘렀다.
챙!
강한 힘이 에버렛의 손을 강타했다. 예장용 검이 빙글빙글 돌며 멀리까지 튕겨 나갔다.
새파란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광기가 깃들었다. 포식자를 앞에 둔 것처럼 에버렛은 온몸의 털이 바짝 솟는 것을 느꼈다.
“친히 광인의 목을 베고 성벽에 매달아 주지.”
“넌, 넌 대체 뭐냔 말이야!”
푸른 칼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본능이 경고한다. 선득한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네 피를 짜 네 아비의 무덤에 뿌릴 것이고, 몸뚱이를 찢어 짐승의 먹이로 줄 것이다. 말라붙은 머리는 언제나 리온의 첨탑에 올려 두어 리온의 번영을 죽어서도 모를 수 없게 해 주겠다.”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그때가 되면 네가 바라 마지않던 대로 모두가 널 올려다볼 테니 기대해도 좋아.”
키네미아의 검이 점차 다가왔다.
죽는다.
“요제프 크로츠!”
그의 처절한 절규가 울릴 때였다.
“여기 있으셨군요!”
높은 남자의 목소리가 둘을 갈랐다.
미간을 찌푸린 키네미아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마귀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이얀……?”
* * *
쉔 티엔이 발레리의 떨어진 머리를 응시했다. 별것도 아닌 것이 꽤 힘을 쓰게 만드는군.
마물들이 함께하면서 가지는 시너지를 파훼하기 위해 마법사들과 흑야는 둘로 갈라졌고, 고전 끝에 발레리의 머리를 벤 것이다. 쉔 티엔이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해치웠나?”
그가 흘린 말에 로우가 눈을 부릅떴다.
“스승님, 사막에서 그런 말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에 동의한다는 듯 흑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막에 내려오는 금기가 있습니다. 전투 전에 동료에게 혼인할 상대의 사진을 보여 주지 말 것. 전투 중에 ‘해치웠나?’라고 말하지 말 것. 높은 절벽에서 떨어진 적의 생사를 넘겨짚지 말 것.”
“맞습니다.”
“‘해치웠나?’라고 말하면 적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쉔 티엔이 연이어 이어지는 흰소리에 열이 받은 듯 긴 담뱃대를 휘둘렀다.
“그게 뭔 복 떨어질 개소리냐!”
어이가 없으려니까. 분명 목에서 머리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산단 말인가. 쉔 티엔이 웃기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는 사이였다.
갑자기 발레리의 머리가 몸통으로 굴러가 길게 뿌리를 내기 시작했다. 뿌리가 닿자 몸이 비틀비틀 일어났고 발레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제 목 위에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