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a Munchkin RAW novel - Chapter (89)
먼치킨 길들이기 89화
“오해하게끔 구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랬어. 나 좀 남자로 봐 달라고.”
“…….”
“그러니까 전부 시험해도 돼. 나한테 끌리는지, 내가 닿아도 괜찮은지, 날 좋아해도 되는지.”
왜 그런 말을 눈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냐고! 도리어 부끄러워진 키네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사람 말고, 나한테.”
마지막은 숫제 애원하는 듯한 투였다. 감정이 짙게 밴 그의 말이 목을 꽉 죄어 왔다.
그때, 에이얀이 포개 잡은 손끝에 입을 맞췄다. 말캉한 감촉이 닿은 손끝에서 열꽃이 피는 듯했다.
‘읏!’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키네미아가 난처함이 가득 담긴 눈을 떴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에 덜컥 겁이 날 정도로 심장이 뛰어 댔다.
“나는…….”
뭐라고 말하면 좋지.
평소에는 쉬이 내뱉었던 싫다는 말도 무언가에 턱 걸린 것처럼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말끝을 흐린 그녀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데, 에이얀이 몸을 일으켰다.
“내 마음에 대답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말했잖아. 이건 그냥 시험이고-”
그가 허리를 숙였다.
“-너는 잠시만 내 억지에 휩쓸려 주면 돼.”
그의 손이 키네미아의 두 볼을 감싼 채 들어 올렸다.
뭐야. 갑자기. 바짝 긴장한 키네미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당황과 두려움이 엿보이는 눈에 에이얀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받을 게 아직 남아 있잖아.”
“응?”
“잊었어? 기대한다고 했는데.”
키네미아가 눈을 깜빡였다. 기대한다고 했다니. 설마 쥬디스의 공약을 말하는 건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에이얀의 얼굴은 이미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 그건 쥬디스가 멋대로 그런 거 알잖아.”
순간 에이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었다. 음, 목을 울린 그가 낮게 속삭였다.
“어쩌지. 그래도 봐줄 생각 없는데.”
웃음기가 어린 새카만 눈동자가 훅 눈앞으로 다가왔다. 윽! 키네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목 안으로 웃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촉, 에이얀이 입꼬리 옆에 짧게 입을 맞췄다.
눈을 반짝 뜬 키네미아가 상체를 물렸다.
“오늘까지는 착하게 굴려고.”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할 건 다 해 놓고 착하게 군대.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녀가 손등으로 입꼬리 옆을 문지르며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
“산책!”
그러자 성큼 다가온 에이얀이 손을 잡아 왔다.
차가워. 키네미아가 시선을 폭포 쪽으로 돌렸다. 저처럼 긴장한 듯 차게 식은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18장 나도 내 삶의 주인공!
“어! 자네!”
황궁의 중정 앞을 걷던 허링 후작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퍽 반갑다는 기색으로 워맥 자작의 어깨를 짚었다. 워맥 자작은 예의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후작을 반겼다.
“허링 후작님.”
“워맥 자작, 들었네. 폐하께 이번 토벌전 출전을 자청했다고?”
“그걸 벌써 들으셨습니까?”
“이 사람, 지금 수도 내에서 소문이 짜하다네. 자네가 리온의 영지에 주둔하면서 대공녀에게 제 주제를 가르쳐 줄 셈이라고 말이야.”
리온의 영지라는 말에 워맥 자작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 그게 어디 리온의 영지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주인 없는 땅이지요. 뭐, 지금으로서는 작위도 없는 자가 황제 폐하의 땅에 무단 점유하고 있는 꼴이 아닙니까.”
키네미아 리온은 아직 작위를 받지 못한 대공녀 신분.
선대 대공이 적법하게 작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죽은 이상, 제국법으로는 작위 계승 인허가 황제에게 넘어간 셈이다. 그리고 대공녀는 아직 황제에게서 작위 인허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꼴에 나름 영주 노릇은 하고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무단 점유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거 그렇군! 내가 실언을 했어. 맞아, 엄밀히 말해 주인 없는 땅이지.”
허링 후작이 반색을 하자 워맥 자작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아무리 대공녀가 이런저런 일들로 위명을 높이고 있다지만, 태양이 높이 뜬다고 모든 땅에 빛이 들지는 않는 법이었다.
황제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훈장이니 뭐니 챙겨 주면서도, 제일 바라 마지않을 것은 틀어쥐고 놓지 않고 있었다.
그때 허링 후작이 큼, 목을 가다듬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는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워맥 자작에게 조용히 물었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네만. 자네가 폐하께 이번 토벌을 지휘하겠다 나선 이유가 리온의 계집애 말고도 따로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예?”
워맥 자작의 표정이 굳었다. 허링 후작은 그에게서 불쾌한 기색을 읽어 내지 못한 채로 채근했다.
“내게만 좀 알려 주지 그러나.”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어찌 뒤로 품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제가 출전하는 이유는 그저 기사로서 제국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흐음, 그런가.”
뭔가 더 있을 법한데…… 워맥 자작이 모르쇠를 고수하자 허링 후작이 쩝,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저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잘 다녀오시게.”
“예, 물러나 보겠습니다.”
워맥 자작의 인사에 허링 후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워맥 자작은 빙긋 웃었다.
‘네게 알려 줄 이유가 없지, 멍청한 놈. 제깟 게 후작은 무슨.’
욕지거리를 입 안으로 삼킨 워맥 자작이 허링 후작을 흘기며 그의 옆을 지나쳤다.
* * *
새해가 밝아 왔다.
새로운 해의 첫날, 이제 18살이 된 키네미아가 향한 곳은 혜민원 안에 설치된 제실이었다.
동대륙 출신인 연금술사들은 제국과는 종교가 달랐고, 새해에 자신들의 신에게 복을 빌기 위해 제실을 설치했다.
새해가 되기 전 겨우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던 차에, 연금술사가 키네미아에게 넌지시 권했다.
“아기 선녀님께서도 새해 복을 빌어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요?”
“난 무교인데, 내가 빌어도 들어주실까?”
“저희가 모시는 신은 제국의 신과는 달라서 어느 누구에게나 자애로우십니다.”
“호오오오오…….”
키네미아는 연금술사들의 권유에 따라 제단 앞으로 다가가 향을 피웠다.
평소 같은 때였다면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웃으며 지나갔을 테지만, 곧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남은 나날을 무사히 보내고 싶은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키네미아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주인공이 나타나도 저와는 아무 관계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게 해 주세요.’
곧 원작 주인공이 나타날 시기였다. 그것도 리온의 영지 내에서!
원작과 달라진 부분은 많아졌지만-
‘……별일 없겠지.’
코어가 부서졌다는 쥬디스의 말을 떠올리던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리 없어. 괜한 생각 말자.
‘올해도 원한과 단두대가 스리슬쩍 빗겨 나가게 해 주세요.’
기도를 마치자 제실을 지키던 연금술사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기 선녀님. 룻다 님께서는 연정 기도도 잘 들어주십니다.”
연정? 순간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에 키네미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 아니. 안 빌어. ……그런 건 안 빌어도 돼. 그런 사람 없어.”
“그러시군요.”
키네미아가 우물우물 변명하듯 말하니 연금술사가 사춘기 딸아이를 보는 엄마처럼 미소를 지었다.
‘……!’
돌연 부끄러워진 키네미아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에잇! 그녀가 제단 앞에 놓인 함에 통 크게 금화를 와르르 쏟아 넣었다.
“……?!”
연금술사는 화들짝 놀라 키네미아를 말렸다.
“이, 이렇게 많이 넣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금술사에게 잡혀 뒤로 물러난 키네미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 내가 좀 간절해서…….”
“예?”
“많이 넣으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나, 가진 건 돈뿐인데.
돈으로 신의 호감마저 사고 싶다. 배금주의로 똘똘 뭉친 그녀가 연금술사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피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대체 뭘 비셨기에…….”
“말하면 영험함이 떨어지거나 하는 거 아니야?”
“글쎄요.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여긴 그런 미신은 없나?
그렇게 키네미아가 연금술사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새였다. 어린 연금술사 하나가 제실로 뛰어 들어왔다.
“아기 선녀님! 여기로 좀 와 주십쇼!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
키네미아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