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63)
EP.164)밤 # 5
164 – 낮과 밤 # 5
완전 난장판.
나는 우선 미르나의 손에 흐르고 있는 피를 지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유리를 깬 건지 미르나의 손등에는 상처가 나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으니까.
새하얀 손등에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서 바닥을 온통 적시는데. 아찔한 쇠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피의 철분 냄새란 사람의 상상이상으로 강한 법이니.
그 모습에는 엘가라고 하더라도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게 다 뭔 짓이야? 갑자기 왜 그래? 미쳤냐?”
그런 엘가를 향해 미르나가 씩씩 거릴 뿐.
“멋대로 방을 들어오다니. 교양이 부족하네요. 어서 나가도록 하세요…!”
물론 그 말을 듣는다고 엘가가 바깥으로 순순히 나갈 위인이 아니었고. 나도 이렇게 흥분하고 다친 미르나를 두고 홀로 어딜 갈 만큼 심장이 튼튼하질 못했다.
“미르나 아가씨, 일단 진정하시고 상처 치료부터 하죠.”
“…….”
미르나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 빨간 눈동자는 눈물을 흘렸던 건지 더욱 빨갛게 부어올라 있어서 마치 토끼 같았다.
곧 작게 입을 여는 미르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그 목소리가 꼭 자포자기한 사람 같았다. 그렇다. 자포자기. 자기파괴. 정신이 급격하게 무너져 있는 사람이 보이는 징조다.
그리고 언제나 침착함과 고상함을 유지하려고 하는 미르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기도 했다.
오늘 아침 혹은 어제 새벽 미르나에게 무슨 일이 있긴 했었다는 소리겠지. 나는 그런 그녀의 귀를 바라봤다.
그녀의 귀에는 구멍이 뚫렸던 흔적이 있을 뿐. 어제 나르미가 용기내서 달았던 귀걸이는 온데간데없다.
혹시 이 문제가 그 사라진 귀걸이 때문에 생겨난 문제는 아니겠지? 그럴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그때 미르나가 빽 소리쳤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어서 나가라고 했잖아요!”
“…….”
그에 내 예민한 요정귀가 잠시 먹먹해진다.
나는 흥분한 미르나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더욱 예기치 못한 일을 벌이기 전에 일단 어떻게든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엘가 님. 일단 미르나 님 좀 봐주실래요?”
“뭐? 내가 왜.”
“이대로 있다가 더 크게 다칠지도 몰라요.”
“번거롭게 하네. 정말.”
엘가가 미르나를 마크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 손에 붙잡히는 것은 앙그마르의 비술첩.
하나의 마법을 저장할 수 있는 이 비술첩에 내가 저장해둔 것은 바로 아이라에게 부탁한 소규모 시공간 마술이었다.
“뭘 하려는 거죠?”
미르나가 바닥에 펼쳐진 비술첩의 마법진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에 나는 대답하는 것 대신 주문을 읊어서 마법진을 가동시키기로 했다.
─다람쥐 저장고-!
짝.
주문을 외운 뒤에 박수를 치자 우우웅-하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마법진. 나는 그 마법진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쑤욱.
나의 손은 마법진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얼핏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사라진 건 아니고 마법진과 연결된 공간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몇 번 해봤는데도 아직까지 영 적응이 안 되네.
그 모습에는 화가 나 있던 미르나라고 해도 흥미로 솟았던 듯 했다.
“…포탈 마법이로군요? 5위계 이상의 대마법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죠. 아이라 님께서 비술첩에 저장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공간에서 물건을 집어넣고 꺼낼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게임 속 캐릭터들이 물건을 넣었다 빼냈다 할 수 있는 인벤토리다. 이 마법 ‘다람쥐 저장고’에 집어넣을 수 있는 총량은 대략 1톤 탑차의 화물칸 정도.
여담으로 이름이 다람쥐 저장고인 이유는 이 마법을 비술첩에 저장해준 아이라의 작명이었다. 다람쥐가 귀엽다나.
아무튼.
덕분에 나는 많은 물건을 구구절절 들고 다니는 대신 이렇게 저장해두었다 꺼낼 수 있어서 편리해졌다. 그런 내 손에 마침내 붙잡힌 것은 붕대와 연고다.
* * *
다행인 점을 꼽자면 미르나의 왼쪽 손등에 생긴 상처는 그리 깊거나 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흉이 살짝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일단 임시로 처리한 것뿐이니까요.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면 상처가 또 벌어지고 피가 날 거에요.”
슥슥슥.
미르나의 손에 붕대를 잘 감아 튼튼하게 고정해주었다.
처음에 날 선 반응을 보였던 미르나도 이제는 진정을 했는지 그저 내 응급치료에 순순히 손을 내어주고 있을 뿐.
그렇지만 아직도 얼굴에 불만이 뾰로통하게 솟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기 때문인지 볼 살이 꼬집고 싶을 만큼 볼록 튀어나왔다.
“애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흑마술 때문에 드디어 미쳐버렸어?”
잘그락, 잘그락.
엘가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유리조각들을 대충 슬리퍼로 슥슥 밀쳐내며 미르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 엘가의 꾸중에 와락 인상을 찌푸린 미르나가 더욱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알 거 없어요.”
“그래, 그러시겠지.”
“엘가 님, 다치실 수 있으니까 유리조각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나는 빗자루와 대걸레를 이용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유리조각들과 핏자국들을 깔끔히 치웠다.
부서진 유리창의 틀을 때어내고 박살나버린 거울을 복도 바깥으로 빼놓자 그때서야 조금 사람 사는 곳답게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미르나는 저기압이다.
“…….”
미르나는 내가 자신의 손에 쥐어준 찻잔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 듯하더니. 갑자기 손을 휙 높이 들어올렸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찻잔을 내려치려는 듯한 모습.
“뭐 하는 짓이냐?”
하지만 그러지 못한 까닭은 엘가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 팔에서 잔을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엘가에게 맡겨두길 잘했구만. 나 혼자였으면 못 막았겠지.
“얘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네. 대체 왜 그래?”
이쯤 되니 엘가도 미르나의 상태가 궁금해진 것 같았다. 다만 미르나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는데. 아마 엘가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마 자매 싸움이었겠지.
내가 봤을 때는 분명 그런 문제다.
그러니 바깥의 외부인이자 경쟁 가문의 장녀인 엘가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많은 것일 터.
“엘가 님. 일단 잠깐 바깥으로 나가주실 수 있나요?”
“뭐?”
“어쩌면 엘가님의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흥, 드레이코 놈들. 아주 사람 애먹게 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니까. 됐어. 나도 피곤하니까 내 방으로 가 있는다.”
엘가는 흥미가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수긍한 것처럼, 바로 옆방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이제 미르나와 단 둘이 남게 된 나는 아직도 무언가 앙금이 풀리지 않은 것 같은 미르나를 향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미르나 아가씨께서 이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
이번에도 미르나는 대답하는 것 대신 침묵했다. 그에 나는 미르나의 굳게 닫힌 마음에 문을 두드려볼 겸 슬쩍 한 마디 떠보기로 했다.
“자매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신 겁니까?”
움찔.
미르나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아주 작은 떨림이지만 반요정인 내게 있어서는 큰 자백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가족 문제인가.
단순한 가족 문제라면 사실 내가 이 이상 캐묻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미르나와 나르미의 다툼 간에 나에 대한 일도 껴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콕 하나 짚어보자면 어제 나르미를 부추겨서 귀걸이를 끼게 만든 것 정도. 어쩌면 미르나가 나르미에게 나와의 관계를 들켰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일단 오늘은 미르나를 하루 종일 옆에서 지켜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오늘 미르나는 무언가 꼭 사고를 일으킬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막 강으로 뛰어들거나 차도로 뛰어들 것처럼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 주변엔 차도도 없고 강도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르미는 어떻게 된 거지.
방 안에 하나도 남김없이 깨진 거울과 유리들을 보며 나는 상태를 알 수 없는 나르미에 대해서도 걱정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바로 미르나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
“태오 경, 세상에는 규칙이라는 게 있어요.”
“규칙이요?”
“네. 지켜야만 하는 규칙. 그리고 많은 규칙과 규범, 율법과 규율들은 다소 가혹하고 답답하더라도 지키고 따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에 생겨나죠.”
“…규칙이라.”
“그리고, 규칙을 어겼을 때에는 응당 비판과 벌을 받아야 할 때가 있죠. 그래서, 이제 제게는 자매 같은 게 없어요. 그리 알아두도록 하세요, 태오 가스펠.”
“…….”
자매가 없다니. 의절했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미르나와 나르미는 의절하고 싶다고 서로 안 볼 수 있는 사이가 아닐 텐데?
나는 나르미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고 걱정 되서 영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물어보면 미르나가 정말 화내고 또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냥 참았다.
그래도 죽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미르나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 해 주겠지.
* * *
미르나와 나 그리고 엘가 또 아이라. 이렇게 네 사람은 고급 식당의 넓은 테이블에 동그랗게 앉아 식사를 했다.
다만 엘가와 나는 미르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가 아무래도 평소와는 상태가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맛있네요. 구운 토마토가 이렇게나 맛있는 요리였다니.”
달각, 달각.
평소 조용히 식사를 감내했던 미르나와 다르게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마치 일부러 밝은 척 하는 사람 같기도 해서 오히려 신경 쓰인다.
어쩌면 나와 엘가를 향해 자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식당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좋네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
“…….”
그래서 그런지 나도 엘가도 그런 미르나를 보고 있는 것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후, 입술을 손수건으로 우아하게 닦은 미르나가 말했다.
“점심 먹고 할 일들이 없으면. 모두 다 같이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요? 다 같이 친목이라도 도모하는 의미에서 말이에요.”
“산책? 지금 산책이라고 말했냐? 그리고 뭐, 친목 도모?”
엘가는 참을 수 없어진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오늘 보이는 미르나의 이상 행동이 엘가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고 해도 좋다.
“야, 너 대체 무슨 꿍꿍이야? 오늘 왜 그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엘가의 물음에 미르나가 말했다.
“꿍꿍이라니. 그냥 산책을 하고 싶은 것뿐인데 말이에요.”
“…….”
그에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술을 뗐다가.
“후-.”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나를 바라보는 엘가. 나라고 뭐 딱히 답을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서 그저 어깨를 슬쩍 으쓱일 뿐이다.
“산책.”
그 이야기를 받은 것은 의외로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이라 쪽이었다.
“산책 좋지. 때마침 날씨도 좋은 것 같은데. 우리도 평범한 백작이나 남작 가문의 아가씨들처럼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여유를 즐긴다니.
매일 아무 일 안하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 아이라의 입에서 여유를 즐긴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조금 미묘했지만.
아이라는 미르나가 갑작스럽게 제안한 산책이 무척 마음에 들은 듯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식사 자리를 파하고 산책을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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