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66)
EP.167)밤 # 8
167 – 낮과 밤 # 8
나르미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해가 저물고 난 후였다.
다들 퇴근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시간. 그때서야 겨우 밀려 있던 업무들을 처리한 뒤에 저녁 식사를 끝낼 수가 있었다.
“이제 다 끝났네!”
그런 느낌으로 느으으-하고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는 나르미. 미르나였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에 문득 웃음을 지을 뻔 했다.
아니, 미르나라도 혼자 있을 때는 저렇게 빈틈을 보이면서 기지개도 켜고 하품도 하고 그랬으려나?
“뭐야! 결국 저녁이잖아! 저녁에만 쉴 수가 있다니. 이래서야 언니가 있을 때랑 똑같은데!”
나르미는 어느덧 창문 바깥으로 저물어버린 태양과 어둑어둑한 저녁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루 종일 일에 빠져 있다가 이제 겨우 쉴만해졌는데 해가 저물었다니.
나르미 말대로 언니가 있던 시절, 달처럼 밤에만 나타났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하루 일과에 불만이 생긴 것이겠지.
물론 나르미가 서툴러서 그런 것도 있다.
언니인 미르나는 일손이 빨라서 이것저것 금방 처리한 후에 자유시간도 갖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랬으니까.
다만 미르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몸이니 여동생인 나르미가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적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
나는 짐짓 그런 생각들을 숨긴 채 물었다.
“일이 늦게 끝나셨네요. 오늘 언니 분의 삶을 대신 살아보니 어떠셨습니까?”
“…오늘은, 오늘은 어색하고 첫 날이라 그래. 내일부터는 나아 질 거야. 일도 얼른 끝내고 낮에 산책도 하고. 꽃이랑 천둥오리도 구경하고 할 거거든…!”
과연 그렇구만.
아직 첫 날이라 감이 잡히지 않았다는 핑계가 역시 나온다.
* * *
“그래서 내가 공을 받으니까, 옆에 있던 부관 한스가 소리친 거야. 엘가 님, 이쪽으로 공을 차 주십시오-!”
나른한 오후의 점심 식사시간.
엘가는 병사들 사이에서 함께 축구했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펼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관중은 루비처럼 빨간 눈동자를 깜빡이는 나르미 드레이코 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나르미의 얼굴 옆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미르나 아가씨, 손이 멈추셨습니다. 여기 이쪽 서류는 점심 시간 이후 바로 제출해야하는 증명서들이라서 얼른 사인해주셔야 해요.”
“그, 그렇죠-!”
슥슥, 슥슥슥.
나르미는 밥 먹는 시간마저 쪼개 일에 매진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덕분에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고 있던 엘가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사람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할 맛 떨어지게. 야, 미르나. 너 요즘 뭔데 이렇게 식탁 위에서까지 일하고 있냐? 영애로서의 기품은 어디로 간 거야?”
“…….”
미르나라면 엘가의 비아냥에 한 마디 쏘아줬겠지. 아니, 애초에 미르나라면 엘가의 말처럼 식탁에 일거리를 가져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르미에게는 그럴 여유가 좀처럼 없었다.
오늘 저 할당량을 끝내지 않으면 저녁 시간이 지나서도 야근에 철야를 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랬다간 쉬는 시간조차 없어진다.
스윽.
그때 입술을 손수건으로 우아하게 닦은 아이라가 한 마디 했다.
“드레이코 가문의 일로 바쁜 모양이구나.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왕국에서의 일은 언제나 과중된 업무의 연속. 여왕으로서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아이라는 정말 지친다는 것처럼 후우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달큰한 한숨에 엘가는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묻는다.
“사촌, 네가 바쁜 적이 있었다고?”
“그래. 하지만 나는 현명한 여왕답게 해답을 찾았지. 그건 바로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것이었어. 덕분에 내 번거로운 일은 대부분 태오가 하지.”
“뭐야, 결국 남에게 다 미뤄서 하나도 안 바쁘다는 소리 아냐?”
“남에게 미룬다니. 할 일을 지시하는 거지. 그것도 여왕의 중요한 업무야.”
맞는 말이긴 했다.
적임자를 찾아서 할 일을 지시하는 것도 여왕으로서의 업무지. 하지만 나는 내가 알아서 일을 다 했기 때문에 딱히 아이라로부터 지시 받은 적도 없지 않나 싶었다.
아이라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 채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행복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싶었던 것도 잠시.
“그럼 내 사촌 엘가 그리고 태오야, 오늘도 나와 함께 원앙을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 어제 내가 눈 여겨 보고 있던 원앙이 새끼를 낳았거든. 곧 큰물로 이사를 갈 것 같아.”
아이라는 요새 푹 빠져 있던 연못의 새 구경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었다. 엘가의 반응은 물론 “그러셔?”라고 시큰둥할 뿐이다.
엘가의 반응이 밋밋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라는 열심히 서류에 서명하고 있는 나르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드레이코 영애. 함께 산책하지 않을래? 새끼 원앙 보고 싶다 하지 않았어?”
“새끼 원앙….”
“교단이 지정한 천연기념물이야. 여왕인 나도 함부로 기를 수 없는 새지. 새끼는 어미 뒤를 따라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데 작은 님프처럼 엄청 귀여울 거야.”
“후….”
나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지만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아, 그래. 아쉽게 됐어. 그럼 아쉽지만 내 사촌인 엘가와 둘이 가야겠네.”
아이라는 정말 아쉽다는 듯 말하고는 엘가와 함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오야, 동행하겠니?”
“아뇨, 저는 미르나 님을 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응, 그래. 가자, 에르가네스.”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불러? 아, 그리고 태오. 네가 부탁했던 것 네 기숙사 앞으로 배달 시켜놨다.”
그것으로 아이라와 엘가는 자리를 비웠다. 이제 남은 것은 나와 나르미 그리고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의 산더미 뿐.
슥. 와락.
그때 나르미가 식탁 위에 엎드렸다. 누군가 봤다면 “귀족 영애로서 기품이 없군요.”라고 톡 쏘아줄 만큼 칠칠치 못한 행동이었다. 나르미도 알고 있겠지.
“일이 안 끝나…. 나도 새끼 원앙 보고 싶은데….”
하지만 나르미는 더 이상 그러한 것을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것 같았다.
벌써 며칠째 낮에 생활해보니 슬슬 가중된 업무에 대한 피로가 쌓이고 쌓여서 힘에 부치는 것이리라.
“태오야, 너는 놀러가고 싶으면 놀러가도 돼. 이건 내 일이니까 굳이 내 옆에 있을 필요 없어. 나도 이제 어느 정도 할 줄 알고…. 나 때문에 못 놀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나르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해방해주었다.
평소 나를 혹사시키는 아이라나 엘가가 이런 말을 했으면 나도 “태오는 이제 자유로운 반요정이에요.”라고 말하며 얼른 도망쳐버렸겠지만.
나르미는 나름대로 보듬어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또 내게도 나름의 노림수가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녀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힘내보죠. 조금 더 힘내시면 한 10분 정도는 쉬실 수 있겠네요.”
“응….”
다시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나르미. 그녀는 이내 입술을 꾹 다물고 손을 파르르 떨며 자신이 처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서류를 흘겨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보였지만 잘 억누른 것인지 다시금 사각사각 펜촉을 움직인다. 기특하구만.
기특하지만─.
이래서야 조만간이겠어.
조금만 더 힘들어지면 이제 나르미도 안에 갇혀 있는 미르나를 해방해주지 않을까 싶어진다. 그렇다고 나르미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나르미는 최선을 다했다.
솔직히 나르미에게 할당되어 있는 업무량은 내가 봐도 혼자서 처리할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걸 혼자서 멀끔히 해결하며 개인시간까지 만들어냈던 미르나가 굉장히 대단한 것이겠지. 이제 슬슬 나르미도 그것을 인정하고 언니인 미르나와 화해하지 않을까?
다만 나르미도 자존심이 있다.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겠지.
나는 오늘밤 이 기묘한 자매 싸움을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르미 님. 만약 제게 정말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계신다면 말입니다. 오늘 일이 다 끝나면 저녁에, 제게 시간을 좀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시간?”
* * *
나는 나르미와 함께 아크 부지의 바깥을 나섰다.
내가 나르미를 데리고 향한 곳은 도시 그라시아의 내에 있는 꽤 번잡한 식당.
「임프 꼬리 주점.」
식당이라기보다는 여관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지. 숙박업과 주류 및 식사의 판매를 겸업하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곳의 특징은 밤에 더 활발히 장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하루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일꾼들이나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 술잔을 부딪히고 주정을 부리는 곳들이 다 그렇듯이 여기도 사람이 많았다.
“엄청 북적북적하다-.”
나르미의 감상이 딱 알맞았다. 북적북적하고 시끄럽고, 교양없이 걸걸대고 여기저기 깨지는 소리와 테이블에서 떨어지는 식기 소리가 가득한 곳.
“이런 곳에는 처음 와 봐.”
“그렇군요.”
귀족의 아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밤에 자주 돌아다니는 나르미라면 혹시 이런 선술집 여관에 온 적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경험이 없는 듯했다.
혼자 들어오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곳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저녁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엄청 많아!”
나르미가 주변의 인파와 시끄러움을 보며 몹시도 들 떠올랐다.
나르미는 사람들 틈에서 에너지를 얻고 활기를 얻는 외향적인 친구. 이렇게 시끄럽고 난잡할 정도로 무질서한 곳이 의외로 취향에 맞는 느낌이다.
내가 말했다.
“이런 곳은 저녁이나 밤에서야 본격적인 장사를 하는 곳이니까요.”
“그래?”
“제가 살 테니 관심 가는 게 있으면 다 시켜보세요.”
“음-. 그럼 여기 매콤한 칠리 소시지랑 맥주.”
“맥주요?”
“응응! 언니는 매일 포도주만 마시니까. 나는 이 맥주라는 것도 마셔보고 싶었어.”
“그럼 그렇게 주문 할 게요.”
나는 내가 먹을 것들과 나르미가 주문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점원에게 주문했다.
얼마 기다릴 것도 없이 곧 접시가 나오고, 점심조차 거르고 일했던 나르미는 무척 배가 고팠던 것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올렸다.
물론 주변의 야만적인 흡입과는 다른 우아한 귀족 아가씨다운 느낌의 식사였다.
“생각보다 맛있다.”
그 자체로 하나의 경건한 기도 행위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로. 맥주잔의 하얀 거품이 입에 묻었지만 그마저도 매력적이다.
그런 나르미는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귀족집 아가씨인 모양이네.
━저 은발 머리에 루비 눈동자.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 혹시 미르나 드레이코 아냐?
━에이, 설마. 미르나 드레이코가 이런 곳에 왜 오겠어? 값싸게 물탄 맥주 마실 일이 뭐가 있다고.
슥.
나르미는 그때 스푼을 내려놓았다. 나르미의 얼굴은 몹시도 붉었는데 그게 여러 감정들 때문인지 아니면 자꾸 들이켰던 맥주의 취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나르미가 말했다.
“다들 내가 언니인 줄 알아.”
“그야, 세상에는 주로 미르나 님에 대한 것만 알려졌으니까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다들 나인 줄 몰라.”
“그야….”
“다들 언니만 찾아. 태오야, 너도 그렇잖아. 오늘 이렇게 날 불러낸 거. 이제 슬슬 언니를 풀어주라는 이야기 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
역시 나르미도 눈치가 빨랐다. 내가 오늘 나르미를 이런 곳에 불러낸 이유는 여러모로 나르미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밤에는 밤만의 세계가 있고.
낮에는 낮에 사는 자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러니 이제 슬슬 미르나를 풀어줘라-. 낮에 열심히 고생을 해보니 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냐-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나르미가 먼저 선수를 쳐버리니 내 할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내가 침묵에 잠겨 있을 때, 감정에 복받친 것인지 나르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그냥 햇살을 받고 싶었을 뿐이야. 평범한 사람들처럼 웃고. 햇살 가득한 바다라는 곳에도 가보고 싶었고.”
“…….”
“평범하게 낮잠도 자보고 싶었어. 하지만 역시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걸까? 그냥 이렇게 달빛 아래에서만, 어두운 지하에서만 살아야 하는 거야?”
또르르르.
결국 요 며칠 열심히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나르미가 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가슴이 조금 아팠다. 그녀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좋아서 이렇게 태어난 게 아니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있는 지도 몰라.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 거야.”
“나르미 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구요?”
“그래. 밤에만 나올 수 있는 여자라니. 모두가 잠자는 시간 깨어있는 여자애를 누가 좋아하겠어?”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슥.
나는 허리춤에서 비술첩을 꺼내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내가 그 인벤토리 안에서 꺼낸 것은 바로 유리병 안에 모셔져 있는 꽃이다. 아까 전 엘가가 나를 위해 준비해준 드라이플라워기도 했다.
이런 곳에 쓰일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나는 엘가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나르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꽃인지 아시나요?”
“몰라.”
“달맞이 꽃이에요. 예전에 달을 좋아했던 님프가 있었는데. 그 님프가 결국 이런 달맞이꽃으로 변해버렸다고 하죠.”
“…….”
“그래서 이 꽃은 밤에만 핀다고 합니다. 꽃말도 기다림이에요. 달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린다는 뜻인 모양이죠.”
믿거나 말거나지만. 스텔라 벨호크로부터 받았던 요정 설화에서는 실제로 그런 내용이 있었다.
오직 수많은 별들 중에 달만을 좋아해서 벌을 받은 님프가 있었고. 달의 여신은 그런 가여운 님프를 꽃으로 만들어주었다나.
나는 그 내용을 머릿속으로 상기하면서 말했다.
“밤에 뜨는 달만을 좋아하는 요정이 있었다면. 밤에만 나오는 아가씨를 좋아하는 반요정이 있어도 이상할 거 없지 않겠나요?”
“뭐?”
내 물음에 방금까지 서글프게 울던 나르미의 표정이 몹시도 안절부절못하게 변했다.
“그, 그 말은 뭐야. 꼭 태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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