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93)
EP.294)# 3
294 – 떨어지다 # 3
발란 교수가 나를 깨웠다.
덕분에 수마에 잠겨 흐릿해졌던 정신이 조금은 멀쩡하게 돌아온다.
나는 섬세한 동작으로 몸을 슬며시 일으켰다. 고개를 둘러보자 나의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스텔라 교수가 보인다.
스텔라 교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동굴 입구를 기어 나갔다.
바깥에 나가자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발란 교수의 빨간 완광이 으스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일은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잠을 자는 게 좋다고 들었는데요.”
“태오 님께 드릴 말씀이, 그, 그 전에 이걸 받아주세요.”
스륵.
발란이 자신의 품에서 내게 내민 것은 빨갛고 동그란 사과였다. 웬 사과. 내가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자 발란 교수가 으흐흐-하고 음흉한 느낌으로 웃었다.
“엘프와 나눠먹을 것 없이, 태오 님, 호, 혼자 드셔도 좋습니다. 아까 오전에 챙겨두었던 것입니다. 제게는 태오 님의 안위가 가, 가장 우선시 되는 법.”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아삭, 아삭.
사과 한 알은 금방 사라졌다.
사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 몸은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처럼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저녁으로 먹었던 열매나 잣, 말린 고기도 양이 부족했었지.
그런 와중에 발란이 내미는 사과를 먹으니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네.
“그래서, 제게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번에, 오팔을 쓰러트린 것에 대,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습니다.”
아, 그렇구만.
나 역시 발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다. 둘만의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뒤로 미루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기회가 생긴 김에 벨호크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가볍고 간단하게 설명을 끝내주었다.
“그, 그렇군요.”
한참 이야기를 듣던 발란은 오팔이 죽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시무시한 오팔이, 그렇게나 초라한 최후를 맞이하다니. 꼬, 꼴 좋습니다. 후후, 저 발란 드 사브르나크. 녀석에게 당했던 걸 생각하면….”
“그런데, 오팔이 말하기로 솔로몬이 아직 살아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발란 교수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 있다라….”
발란은 잠깐 침음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하나 슥 펴올린다.
“아주 가능성, 어,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저 발란 드 사브르나크에게 있으니…. 또, 태오 님께서도 그 증거를 매일 같이 보고 계실 것이라고 봅니다.”
“증거를?”
“저 발란은, 왕께서 창조하신 역작. 하지만 주문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창조자의 죽음 이후에는 사그라지는 것이 대다수. 제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솔로몬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의 뒷받침이 된다는 말입니까?”
“바, 바로 그렇습니다. A학점 드리고 싶네요.”
“…음.”
듣고 보면 마르마르도 그런 말을 했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상태창. 이것은 솔로몬의 마법으로 창조된 세계의 규칙이라고.
상태창이 보인다는 건 솔로몬이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나.
“…하, 하지만 옛 마왕은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저 발란 드 사브르나크가 하는 말이니, 믿어주셔도 좋습니다. 만약 살아있다면…, 태오 님의 안에 깃든 부분들이겠죠.”
발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마왕은 세상에 한 명밖에 없는 직업이라 그랬던가. 내가 소마왕으로 전직한 이상 솔로몬이 살아있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이 세상은 자주 발생한단 말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
* * *
━그이이이익!
“스텔라 님, 그 쪽으로 한 마리 갑니다!”
“알았어!”
피슝, 촤아악.
스텔라가 발사한 화살이 괴상하게 생긴 사마귀의 몸통을 꿰뚫는다.
작은 화살에 맞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린 곤충은 바들바들 떨더니 이내 미동조차 않게 되었다.
“후, 끝도 없네.”
스텔라는 나무에 박힌 화살들을 회수했다.
그녀의 말처럼 끝도 없는 마물의 공격에 당하기를 몇 번. 마물들이 소란을 일으키면 또 그 소란을 듣고 몰려드는 마물을 상대하고 또 그 소란을….
이래서야 끝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발란은 이 마물들의 광란이 꽤 기분 좋은 듯했다.
“흐흐, 불길한 마력이 잔뜩….”
마물들의 시체에서 불길하고 사악한 마력을 잔뜩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마’의 길에 빠진 자들은 이렇게 상대가 가진 힘을 흡수하며 강해지는 게 보통이라고.
사실 그녀는 본디 마왕군의 초고위 간부였던 가미긴. 이대로 힘을 쭉쭉 흡수하면 분명 우리들의 생존에 있어서 힘이 될 터.
“흥, 흑마법사들이란.”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스텔라는 그 광경이 맘에 들지 않는 것처럼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찝찝하게 보이는 게 당연할 테지. 내가 봐도 좀 으스스하니까.
━갸아아악!
그때 우리 뒤쪽에서 날카로운 포효가 들렸다. 입이 목까지 쭉 찢어진 늑대가 우리를 향해 덤벼는 것이다.
물론 스텔라는 예상했다는 것처럼 뒷걸음질을 쳐 거리를 벌린 후,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던져 녀석의 미간에 박았다.
━캐개갱!
촤아악.
피를 뿜으며 죽는 헬 하운드. 녀석의 미간에서 단검을 뽑아낸 스텔라가 주위를 둘러봤다.
“피 냄새를 맡고 또 몰려올 거야. 일단 빨리 벗어나자. 몸에 묻은 먼지나 피 냄새도 좀 씻고 싶은데. 근처에 물가는 없나?”
스텔라가 나를 바라봤다.
“태오 군, 혹시 근처에 물가 없어?”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죠?”
“님프들은 도랑물이나 개울물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잖아. 태오 군도 반은 님프니까 그런 게 가능하지 않을까?”
님프에게 그런 편리한 생존 기능이 있었다고? 나로서는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요정학을 전공한 스텔라가 없는 이야기를 할 리 없는 법.
그래서 나는 이 참혹한 현장에서 눈을 돌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이 몸은 숲에서 태어난 님프. 숲에 흐르고 있는 물줄기 하나 정도야 노력한다면 찾을 수 있을 터.
─조르르르르-.
그런 나의 귀에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그마한 물줄기가 매끄럽게 흘러가는 소리다.
「당신도 이제 능숙한 도랑물의 님프입니닷…!
‘반요정’의 직업 경험치를 획득합니닷…! + 50」
“이쪽인 것 같네요.”
나는 스텔라와 발란 교수를 이끌고 내가 찾은 물줄기를 향해 나아갔다. 도중에 마물들이 습격해오긴 했다만 스텔라와 발란 교수가 있어서 포위를 뚫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곳은 자그마한 계곡이었다. 타락한 숲에 있다고는 생각되지도 않을 만큼 맑은 계곡. 물은 차갑고 흐름은 빠르다.
수심은 어느 정도지? 깊어보이지는 않는데.
내가 무어라 말할 순간도 없이 스텔라와 발란 교수가 계곡에 몸을 첨벙첨벙 담그고는 새처럼 자신의 몸을 닦아냈다.
“으, 차가.”
“사, 살 것 같습니다. 저급한 마물들의 피냄새가 지워지는 기분….”
참방, 참방.
옷도 벗지 않고 몸을 담군 이유는 옷에 묻은 피와 마물의 파편 등을 닦아내기 위함이겠지. 어차피 옷이야 나의 바람 마법으로 빠르게 말릴 수 있으니까.
촤르르르.
젖은 생선 꼴로 물 밖으로 나오는 그녀들에게 나는 꼬리 완드를 내밀어 1위계 마법 건조한 바람을 시전 해 주었다.
감지를 피해 마력의 양을 최대한 줄였지만 사람의 몸을 말리는 것 정도야 쉬운 일.
“아, 이제야 개운하다.”
스텔라가 만족스럽게 웃을 즈음이었다.
솨아아아아아-.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수풀과 나무를 흔들었다. 덕분에 잎 새와 나뭇가지가 서로 찰랑찰랑 흔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감각.
역시 낯설지가 않다.
다만 살짝 어색한 부분도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혼자 생각해내고 있을 때 머리칼을 마저 털고 있던 스텔라가 말했다.
“여기, 원래는 님프가 관리하고 있었던 계곡인가 봐. 여기 보면 바위나 돌멩이에 그림들이 그려져 있지?”
스텔라의 말에 나는 그때서야 계곡 주변에 놓인 바위와 돌멩이들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진짜 그림이 있네.
스륵.
내가 그림 그려진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었을 때 스텔라가 말을 덧붙였다.
“담당하는 개울이나 도랑물이 있는 님프들은 이렇게 돌멩이에 그림이나 글자를 그려서 영역을 표시한다더라. 물론, 대부분의 님프가 도시로 몰려든 요즘은 이런 걸 보기 어렵지만….”
그림들은 뱅글뱅글 돌아가는 태양부터, 새, 구름과 꽃 그리고 나비까지 다양했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림이라기보다는, 마치 어린 아이가 스케치북에 그려넣은 낙서 같은 모습이다.
“과연, 스텔라 님은 아는 게 많으시네요. 교수님 답습니다.”
내가 스텔라를 향해 가벼운 칭찬을 건넬 때였다.
그때 발란이 발끈한 것처럼 한 마디 했다.
“꽃과 풀을 빠, 빻아서 만든 염료들을 사용한 그림인가 보네요. 저, 저도 이 정도는 아니까 잘난 척하지 마, 말아요 스텔라 교수.”
“뭐? 내가 언제 잘난 척을 해? 그냥 아는 걸 말한 것뿐이지. 물론 발란 교수는 전공이 다르니 잘난 척 하는 걸로 들릴 수도 있겠….”
무언가 말하려던 스텔라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쿠우우웅-.
동시에 무언가 폭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대한 땅울림이 일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에 나는 그만 손에 쥐고 있었던 돌멩이를 놓치고 말았다.
“엇.”
그것을 줍기 위해 비틀거리던 나는 결국 바닥에 넘어졌다. 물론 가볍게 넘어진 정도라 다치지는 않아서, 그저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스아아아-.
다시금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바닥에 주저앉았기 때문에 한층 더 높이 보이는 나무들이 낯익다. 나무도 수풀도, 개울의 바위도 높고 커다랗게 보이는 시야.
━꽃을 그린 다음에는 항상 나비도 같이 그려주는 거야.
━나비.
━그래, 꽃에는 꿀이 있고. 꿀을 먹기 위해 나비가 오는 거지.
어린 아이의 시선.
그래, 어딘가 느껴지는 위화감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보니 자세를 낮춘 사람에게만 보일 법한 표식과 그림들이 나무 밑동에 그어져 있다.
“…저, 이곳에 와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잘랑, 잘랑.
방울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요정나무.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나의 눈에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그래, 나는 분명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의외로 머리보다 몸이라는 것은 기억력이 좋을 때가 있기 마련.
나의 몸은 하나 둘 붙어 있던 진흙이 말라 깨지는 것처럼 감각이 생생해졌다.
물이 흐르는 소리와 어딘가 피어 있을 꽃들의 향기.
풀내음.
젖은 흙들의 냄새.
세상이 한 층 더 생생해지는 감각. 내 머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한계가 커다랗게 확장되는 기분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생각에 잠기려고 할 즈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확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다.
“태오 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이번 마물은 차원이 좀 다른 것 같거든!”
스텔라 벨호크다.
그때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쿵, 쿠우웅-하고 무겁고 육중한 것이 대지를 내려치는 소리가 숲을 커다랗게 울려댔다.
우저저저적, 우직끈.
동시에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있고, 그것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가 있었다.
“이 인근의 숲 주인인 것 같아…! 보통 기척이 아니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