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29)
EP.330)# 3
330 – 시간문제 # 3
“어릴 적에, 자주 먹었던 음식들이야. 눈 게. 북부의 눈 속에서 사는 게들로, 살결이 비단처럼 보들보들해서 맛있거든.”
레드니 백작의 성의를 담은 대접에 아이라의 기분은 제법 좋아보였다.
덕분에 점심식사는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뤄질 수 있었고.
나 역시 한 숨 놓을 수 있었다.
아이라가 나타나자마자 내 삶은 긴장으로 가득해지네.
물론 내 목에 걸려 있었던 밧줄이 조금 느슨해졌다는 것뿐이지 아직 위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슥슥.
누군가 테이블 아래에서 내 무릎을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물어볼 것도 없이,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리오네스 영애-엘가다.
“저기, 잠시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덕분에 나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됐다. 엘가가 어째서 내 무릎을 자신의 발로 슥슥 건드리는 건지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달각, 달각.
포크와 나이프로 게의 살을 썰고 있던 아이라는 나를 가볍게 올려다보니 말 한다.
“그러렴. 그리고 태오야, 혹시 바빠 일정이 갈릴 수 있기 전에 미리 말해두겠는데. 할 이야기가 많으니 오늘 밤은 시간을 비워두렴.”
“…오늘 밤요?”
나는 아이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이라는 아무렇지 않게 입술 사이로 하얀 게살을 삼키고 있었다만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작은 목소리로 숙덕거리기 바빴다.
━밤에 시간을 비우라니…. 혹시 그 소문이 사실일까? 태오 경이 사실은 아이라 여왕님의 정부라던가 하는 것 말이야.
━궁정 마법사의 자리를 몸으로 꿰찼다던가 하는 그런 거?
이거 또 좋지 못한 소문들이 왕창 퍼지겠구만.
그때 오늘 한 동안 묵언 수행이라도 하듯 입을 다물고 있었던 미르나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후 작게 말했다.
“혀가 잘리고 싶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어대는 게 아니랍니다.”
제법 살벌한 이야기였다.
덕분에 숙덕거리고 있던 하녀들도 서로의 눈치를 슬쩍 살핀 뒤에 빈 그릇을 갖고 얼른 장소를 벗어난다.
괜히 분위기 어색해지네.
물론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당사자인 아이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눈을 깜빡일 뿐이다. 진짜 아무것도 모를 확률이 높지만.
요즘 나는 종종 아이라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그런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조금 의심이 갔다.
그때 이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레드니 백작이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하녀들은 더욱 똑바로 교육시켜두도록 하겠습니다. 덕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네요. 악사들이라도 부르는 게 좋을까요?”
그 차분한 이야기에 후후후-부드럽게 웃는 아이라.
“그런 것이라면, 우리 궁정 오락 담당관에게 부탁하면 그만이야. 태오는 언제나 나를 즐겁고 재밌게 해주거든. 태오야, 네가 잘하는 걸 보여주렴.”
나한테 갑자기?
마치 상사에게 “야, 장기자랑이라도 좀 해봐라.”라고 이야기를 들은 신입사원의 기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리자 갑자기 확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대로 “저는 그런 거 못합니다.”라고 뺄 수도 없는 노릇.
“저, 그럼 잘 젖지 않는 종이 하나만 좀 주세요. 팔라다르에서 만들어진 먹지가 있으면 딱 좋은데. 혹시 좀 있나요?”
그래서 나는 주변에 부탁해 종이를 하나 건네받았다. 그것을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사람들의 표정에 제법 많은 의문들이 깃든다.
━지금 뭐하는 거야?
━…몰라, 종이를 먹나 봐!
━아니, 아니야. 잘 봐봐, 입 안에서, 입 안에서 종이를 접고 있어!
눈치 챈 사람이 있나.
실제로 나는 입 안에서 종이를 접고 있었다.
혀와 이 그리고 입술을 유연하게 이용하는 거지.
마법의 영창을 위해 입 안의 바디 컨트롤을 훈련할 때 종종 배웠던 건데. 내 입으로 종이접기는 대마법사 하이낙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잘하는 것 같다.
“아.”
마침내 나는 입을 크게 벌려 완성품을 모두에게 내밀었다.
━이, 입으로 종이학을 접었어!
━마법인가?
━요, 요술이다. 이건 요술이야. 요승이 요술을 부린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거북이도 접어줘요!
거북이?
“거북이는 좀 시간이 걸리는데요. 그 전에, 저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잠깐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엘가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는 것 같단 말이지.
* * *
나는 인적이 드문 발코니에서 잠깐 바람을 쐤다. 내가 분위기를 띄웠던 게 꽤 효과가 있었는지 연회장의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하다.
━저거 봐, 꼬리가 빛나고 있어! 꼬리가 빛나는 임프는 처음 봐!
━모두 으뜸동지 마르마르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이다…!
임프들이 재롱이라도 부리고 있는 모양이네. 마르마르와 그 친구들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보러갈 수가 없었다.
“야, 태오.”
저기 멀리서 엘가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녀 또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잠깐 자리를 비운 걸 테지.
내게 다가온 엘가는 발코니 아래로 빛나는 꽃과 정원을 바라보며 슥 물었다.
“야,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봐. 왜 드레이코 자매가 진짜 쌍둥이처럼 나뉘어져 있는 거냐? 그것도 네가 부린 요술이냐? 누가 미르나고 누가 나르미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
“그걸 설명하려면 좀 시간이 걸릴 거에요. 아무튼, 엘가 님.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반갑고 좋네요.”
나는 엘가의 왼손 새끼손가락 끝을 살짝 붙잡았다. 오랜만에 닿는 엘가의 체온은 내가 매일 밤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살짝 높다.
그 아주 미묘한 온기 덕에 우리들의 만남에 더욱 현실감이 생겨났다. 물론 엘가는 내 손을 슬쩍 뿌리쳤지만 말이다.
“흥. 말은 아주 청산유수야. 내가 없어도 잘 지낸 것 같던데. 아주 잘 지낸 것 같더라.”
“…….”
“스텔라 교수랑은 언제 그렇게 된 거야? 너, 스텔라 교수랑도 했지?”
몸 쪽으로 날아오는 꽉 찬 데드볼. 그것에 얻어맞은 나는 잠깐 의식이 몽롱해졌다. 역시 엘가는 봐주거나 빙빙 돌리는 것이 없구나.
곧바로 답하고 싶었으나.
저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르나가 보였다.
“당신들 둘만 내버려두기는 좀 그래서, 저도 나왔어요. 그래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요?”
차분한 미르나의 목소리에 엘가가 말했다.
“스텔라 교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얘랑 스텔라 교수랑 했는지 안 했는지 물어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네가 나왔지. 그래서 대답해 봐. 난 알 권리가 있으니까.”
다들 알 권리는 충분히 있지.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하루에 한 번씩 꾸준히 하고 있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엘가의 표정은 몹시도 찌푸려졌다.
마치 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감은 그녀가 이윽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문지르며 말했다.
“장벽 너머에서 그 힘든 와중에 여자도 유혹하고. 지금은 아주 없어서는 안될 만큼 푹 빠지게 만들었다는 거지? 역시 내 남편감이야. 대단해.”
이게 칭찬인지 아니면 비꼬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화를 냈으면 어떻게든 받아들였을 텐데. 엘가 답지 않은 모습에 나는 오히려 오싹한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저, 그게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사과를 왜 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거잖아. 여러모로 할 말이 많긴 한데. 정말 진심으로 칭찬하는 거야.”
진짜인가.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미르나가 혀를 내둘렀다.
“리오네스 영애, 그 동안 머리가 어떻게 됐나요?”
“갑자기 나누어진 너네만 하겠어? 하지만, 아무튼 나름 진심인 말이야.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하루 빨리 태오가, 잔뜩 해줘야 해. 진짜 시간이 없다구.”
시간이 없다는 말에 나는 엘가의 배를 슬쩍 쳐다봤다.
펑퍼짐한 드레스로 모습을 가리고 있지만, 내가 기억했던 마지막 모습보다 배가 살짝 더 부풀어있는 기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숨길 수 없는 상황이오겠지.
그때 미르나가 말했다.
“역시 하렘의 일원답다고 해야 할까요. 리오네스 영애, 당신의 그 개방적이고 열린 마음은 한 편으로는 존경스럽기까지 할 정도네요.”
“뭐야, 갑자기.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오히려 무섭잖아. 무슨 나쁜 꿍꿍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 아냐? 왜 그래?”
엘가는 미르나가 자신을 칭찬해오는 것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그에 미르나도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려버릴 뿐.
이 둘 사이는 도무지 친해지질 않네.
그렇게 골이 더 깊어지나 싶었을 때.
슬쩍.
가느다랗게 미르나의 눈이 엘가를 향했다.
“확실히, 숨기기 힘들 정도로 커지긴 했네요.”
“그래. 요새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러워. 조금만 얇은 옷을 입어도 티가 확 나니까. 앞으로 더 커지겠지.”
“무섭거나 하진 않나요? 기분이 막 싱숭생숭하다거나.”
“몰라. 그런 단계는 이제 좀 지났어. 지금은 그냥 그래. 뭐라 설명하기가 힘든데. 언젠가 너도 겪어보면 알겠지.”
그때 미르나가 긴 콧소리와 함께 묻는다.
“흐응, 그럼 한 번 만져 봐도 되나요?”
“그, 그러던가.”
허락에 떨어지자 미르나의 새하얀 손가락이 천천히 붉은 드레스를 향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고도 느릿느릿하게. 그 광경이 자아내는 기묘한 긴장감에 나는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스륵.
그 손가락이 마침내 엘가의 가슴에 닿았다.
엘가가 묻는다.
“뭐하는 거냐?”
“만져보라면서요. 이렇게나 부풀어서는, 맞지 않는 옷도 잔뜩 있겠죠. 갈수록 더 커질 거고. 정말 힘들겠네요.”
주물주물.
미르나는 엘가의 가슴을 손으로 만져댔다. 그 손가락이 드레스 사이를 파고 들어가는 모습이 꽤 대단해서 나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다만 이 상황에 엘가는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네가 배를 만질 줄 알았지. 가슴 말하는 거였어?”
“배는 그리 나오지 않았잖아요. 삼사 개월 차니까 그리 극적이게 변화할 일이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은 동의한답니다.”
슥.
손을 떼는 미르나.
“아마 시간문제겠죠.”
자신의 손을 슥슥 매만진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스텔라 교수는 아직 저희 쪽으로 온전히 포섭하지는 못했지만. 태오 경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그쪽도 시간의 문제일 뿐이겠죠.”
“그렇다면 남은 건 한 명이라는 말이네.”
“한 명이죠.”
미르나와 엘가의 눈이 향하는 곳은 연회장. 그 닫힌 문 너머에 있을 여성이리라.
마지막 남은 한 명.
아이라 폰 타란테라.
늘씬한 다리에 검은 눈을 번뜩이는 고고한 여왕.
이제 오직 그녀만이 남았다.
하지만 여왕의 함락만을 남긴 내 마음과 어깨에 눌린 중압감은 지금까지의 배 이상.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여왕 아이라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이 되질 않는다.
내가 늘 복종해왔던 그 아이라를.
침대에 눕혀서 애정을 속삭이는 나의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는 것이다. 이는 커다란 문제였다. 계획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구상에서 이루어지는 것.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 상상이 구체적이고 세밀할수록 일을 성공시킬 확률이 높아질 터.
다만 아이라의 경우는 도무지….
그때 미르나가 말했다.
“기회가 있다면 비무제겠죠. 비무제에서, 태오 경이 우승을 해서 아이라 여왕과의 결투에서 이기는 것. 그만한 왕도가 더 없을 거에요.”
그 말에 뒤통수를 긁는 엘가.
“그렇긴 한데. 미르나, 너 오늘 아이라를 보고도 아무런 생각 안 들었냐? 그 녀석, 최근 더 강력해졌어. 이미 경지가 높고 뭐고 할 수준이 아니야.”
“봤어요. 하지만, 강한 힘에는 분명 대가가 있고. 약점이 있을 거에요. 그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몸에 품고 있으니 분명 작은 틈이 하나 있을 테죠.”
“뭐, 작은 구멍 하나가 댐을 무너뜨리는 법이긴 한데. 그 구멍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단 말이야. 막상 싸우는 건 태오일 것이고-.”
미르나와 엘가가 서로의 의견을 나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나는 문득 뱃속 깊은 곳에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웃어버렸다. 조금 오랫동안.
“…….”
“…….”
내 갑작스러운 웃음에 미르나도 엘가도 대화를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이 녀석이 갑자기 왜 그러지-하는 표정이라 나는 가볍게 설명했다.
“아뇨, 그냥. 저희가 이렇게 함께 음모를 꾸미는 게. 어딘가 현실적이지 않는 것 같아서요. 살다보니 이런 일이 다 생기네요.”
내가 눈가를 슥 닦아내자 엘가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뭐야, 네가 원하는 그림이 이런 거 아니었어? 우리 이미 한 배 탔어. 자칫 삐끗하면 진짜로 다 죽을지도 몰라. 진지하게 해, 인마.”
“이제는 태오 경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건 동의해요.”
그런가.
그녀들의 말대로였다.
내가 바라고 있었던 건 누군가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이것저것 해쳐나가는 것이었을지도.
나는 이런 몸이 되고 나서…, 아니 생각해보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늘 혼자 많은 일을 해와야만 했으니까.
내 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늘 꿈 꿔 왔었지.
마침내 이뤄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함께 배를 탄 영애들을 향해, 나만이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주기로 했다.
“아이라 여왕님의 실력에 족쇄를 달 수 있을 방법이 하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 혼자서는 힘들고, 꽤 많은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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