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78)
EP.379)고성의 생존자 # 5
379 – 오랜 고성의 생존자 # 5
미르나가 노트 위에 적힌 구불구불한 글자들을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갔다.
교단의 교육시설 아크에서 고대 사어에 대한 강좌를 들었던 그녀라면 노트에 적힌 글자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재차 물어지는 나의 질문에 그녀가 답했다.
“태오.”
“태오?”
“그렇게 적혀 있어요. 발음 그대로 읽어보자면 그렇죠.”
태오라니. 그것은 나의 이름이었다. 마물들에게 점령되고 버려진 성채에서 발견된 노트. 그곳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다니 다소 놀랍다.
어쩌면 노트의 주인이었을 이사야 가스펠은 내가 이 장소에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일까? 그때 미르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태오 경의 이름을 뜻하는 글자는 아닐 거에요. 애초에 고대의 사어에서 이 태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건 하나 뿐이거든요.”
“그게 뭡니까?”
“신이죠. 이 노트에는 옛 언어로 신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네요. 어떤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꽤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을 수도 있겠어요.”
슥.
미르나는 어딘가 기대어린 표정으로 노트의 가죽 표지를 펼쳐봤다.
하지만 곧 그녀의 표정으로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번지고 만다. 함께 노트를 들여다본 나르미가 말했다.
“내용들이 다 번졌어! 이래서야 뭐라 적혀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나르미의 말대로 노트에는 잉크나 먹으로 글자가 적혀 있었던 듯했는데. 꼭 빗물에 맞아 다 씻겨 내려간 것처럼 괴상하게 번져 있었다.
마물 가득한 성채에 십 수 년 이상 남겨졌던 노트니까. 그 글자가 보존되고 있지 않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제 보니 노트가 발견된 쪽은 무척 습해서 곰팡내가 잔뜩 났다.
나르미가 말했다.
“애초에 이런 곳에 버려진 노트였잖아.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안 적혀 있었을 거야. 애초에 무슨 내용을 기대한 건데?”
그 질문에 무슨 내용을 기대했는지 잠깐 상상에 잠겨봤다. 나는 어쩌면 저 가죽 노트가 이사야 가스펠의 일기장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 먼 곳까지 왔는지.
마물 가득했을 이 가르가타 성채엔 어떤 이유로 숨어들었는지.
또 이 임프를 내버려두고 또 어디로 갔는지.
혹 그에 대한 이유가 적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또 그가 만났던 님프 베아트리스에 대한 이야기나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잔뜩 물에 젖어서야 복원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읽기 힘들겠지.
번쩍.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내 머리에 번개가 하나 스치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미르나의 손에서 노트를 건네받은 후에 걸음을 옮겼다. 이것을 누구에게 가져가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을지 알 것 같았으니까.
그녀는 예전에 내가 불태워버렸던 책을 복구해 읽었던 적이 있었지. 그렇다면 물에 젖어 번진 잉크 정도야 불에 탄 종이를 복구해내는 것보다 훨씬 쉬울 터.
분명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라의 방문 앞에 다시 섰다. 이제 슬슬 오후 한 시. 아이라의 잠도 깨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후 으흠-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문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렸다.
“아이라 님, 혹시 일어나 계십니까?”
바스락.
그러자 이번에는 방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와.
마침내 떨어진 허락에 가벼운 손길로 문고리를 열자 끼이익 열리는 문.
그 안에는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속옷차림 아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은 깨어있지만 몸은 아직 누워있고 싶은 상태 같은 걸까?
나는 아이라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라는 근처에 놓인 물병을 손으로 가리킨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물병 근처에 놓인 컵에 쪼르르 물을 따라 아이라에게 건네주었다.
슥.
“…….”
아무 말 없이 물 컵을 받아 들은 여왕. 그녀가 곧 옅은 벚꽃색의 입술을 잔에 가져다 대고 그 안의 물을 들이켰다.
단순히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정수기나 음료 CF같이 보여서 신기했다. 그 장면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을 때 잔을 근처에 내려놓은 아이라가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 온 거니?”
“저, 그게.”
나는 아이라에게 내가 발견한 임프와 그 주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가 남겨놓은 노트 등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다.
* * *
“그렇게 된 겁니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을 만큼 간단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건지 아이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렇구나. 나는 영락없이 아까 전의 것을 이어 하고 싶어 온 줄 알았는데.”
“아까전의 것요?”
내가 되묻자 아이라가 허공에 손을 펼치더니 무언가 움켜쥐는 것처럼 손바닥을 오므렸다.
마치 여성의 가슴을 만지는 듯한 행동에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가슴을 만지러 온 줄 아는 모양이구나.
갑자기 기대치가 마구 솟는다.
“그래도 되나요?”
“그럼, 어디 그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렴.”
아이라는 간단히 내 말을 무시했다. 안 된다는 뜻일까? 머리까지 차오르고 있던 기대치가 다시 발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라는 사람을 들었다 놓는 것에 꽤 재주가 있구나.
혹시 이게 밀고 당긴다는 건가?
과연, 직접 겪어보니 얼마나 많은 수의 남자들이 미인의 밀고 당기기 앞에서 하늘로 용솟음쳤다가 땅까지 곤두박질쳤을지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라의 여유만만한 얼굴이 마치 ‘너와 내 관계는 내가 꽉 붙잡고 있어. 너는 내 밑이야.’라고 자신이 가득 넘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는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저 아이라의 얼굴이 언젠가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숨을 헐떡이는 꼴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솟았다.
그러나.
일단은 책을 먼저 보여주는 게 우선이겠지. 주섬주섬 꺼낸 책을 아이라의 손에 넘긴다. 먼지가 묻은 가죽 커버. 그것을 앞뒤로 슬쩍 확인한 아이라.
촤르르르르.
마침내 아이라는 가죽커버를 넘겨 그 안의 책장을 하나 둘 넘겼다. 여기저기 번진 잉크가 아이라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와중 그녀가 작게 말했다.
“오래된 책이구나.”
“읽어보실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글자라는 것에는 뜻과 의지가 담긴다고 했잖아요. 불태웠던 책에서도 의지를 읽으실 수 있으니. 물에 젖은 글자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니. 이런 글자 정도야 쉽게 읽을 수 있지. 하지만 내가 글을 읽어준다면, 태오, 너는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니?”
“제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식도에 스티로폼 같은 것이 막힌 기분이 들었다. 아이라가 내게 대가를 요구해 온다니. 그런 적은 변덕스러운 그녀의 기행에 있어서도 처음이었으니까.
그녀가 설명해주었다.
“배우자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주고받는 것이라지. 그래야 건전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니까.”
“그렇군요.”
나름 일리 있어 보이는 말이긴 했다. 서로 오가는 것이 있어야 행동에 대한 감사함 같은 것도 늘어나는 법이지.
아이라 역시 나와의 부부생활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걸까? 아니면, 이것도 단순한 밀고 당기기의 하나?
내가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아무것도. 나는 여왕이야. 앙그마르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지보와 부 그리고 명예와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지니고 있지. 그렇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답례는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는 아이라의 표정은 무척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거지.
답례를 달라고 했으면서 그 뒤로는 답례 따위 필요가 없다니?
몇 년 째 함께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나는 아직 아이라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렵구만.
촤르르르르-.
아이라가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법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구깃구깃해진 종이 위로 글자들이 하나 둘 선명하게 복원되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성격은 좀 괴상하지만 역시 아이라의 마법실력은 굉장했다.
팔락.
마침내 아이라는 모든 글자를 완벽히 복구했다.
그녀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후 그것을 펼쳐보자 그곳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필체의 글자가 보였다. 그때 내 안의 종이거미 바엘이 사부작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히오옹…!
나도 알아. 예전에 네가 보여주었던 솔로몬의 일지와 필체가 아주 똑같아. 이사야와 솔로몬은 아주 같은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이것저것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그래서, 뭐라 적혀 있는 거니?”
아이라의 물음에 나는 첫 장부터 글자를 읽어나갔다.
* * *
별 내용은 없네.
그게 내가 느낀 첫 감상이다.
복구해낸 글자들을 읽어나가며 알아차린 바. 이 책은 이것저것 잡다하게 적어 놓는 메모장 같은 것이었다.
근처에 사는 마물들의 습성이나 주변 지리에 대한 것. 혹은 오늘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적어 놓는 스케쥴러. 혹은 일기를 겸하기도 했다.
좀 더 이목을 끌 만한 정보는 없나? 그렇게 생각을 하던 찰나 뒤쪽 페이지를 향할수록 기묘한 것들이 적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뒤쪽으로 갈수록 문장들이 이어지지 않고 있는데요. 혹시 잘 복구한 게 맞나요?”
내 물음에 아이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원래부터 그렇게 적힌 거야.”
원래부터 이렇게 적혀 있다니. 위와 아래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나, 단어들이 군데군데 비어있는 곳도 많다. 일부러 이렇게 적은 건가?
암호문?
아니, 나는 이것이 일종의 조현병 환자들의 기록과 닮았다는 걸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뒤쪽으로 나아갈수록 작성자의 정신이 점점 괴이해지는 듯하다.
아이라가 말했다.
“내가 추측하건데. 작성자의 상태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어. 일종의 편집증이나 망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들이 느껴졌거든. 앙그마르의 피에 흐르는 저주지.”
저주라.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어째서 앙그마르 가문 사람들은 갑자기 미쳐버리거나 하는 거죠?”
그에 아이라가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앙그마르의 태오 가스펠.”
“제가요?”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듣지 못할 것을 듣지.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고,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었다고 해. 태오야, 너도 그렇지 않니?”
“글쎄요….”
“앙그마르 인들은 그것을 계시라고 불렀다지. 그것이 그들을 왕으로 만들어주었고. 끝내는 미치광이로 전락시켰지. 머릿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삭임. 그것이 그들의 신인거야.”
신.
문득 이 노트의 제목이 신을 뜻하는 단어였다는 게 떠올랐다. 광인이 무작정 써내려간 계시록인가. 어쩐지 으스스해진다. 혹시 광염 교단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을까?
앙그마르 가문과 광염 교단은 탄생의 운명 자체를 같이 했었지. 이런 걸 물어보려면 누굴 만나야 하는 걸까. 신학자들? 고위 사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답례를 받아야겠구나.”
“아까, 답례는 필요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바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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