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89)
EP.390)# 1
390 – 친구 # 1
나는 꽤 마초적인 사람이었다.
내 반요정 같은 모습을 보면 누구도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남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를테면 책임을 지는 일이나 도전하는 일. 의무 같은 것들 말이다.
내게 있어서 남성성이란 생존력과 책임감이었으니까.
결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결혼할 때 남자의 역할은 가장(家長).
남성이 아내 되는 여성이나 아이들을 지키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그런 고정관념 같은 게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어쩌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가져보지 못한 내 머릿속에는 위와 같은 것들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으로 자리를 잡은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포즈, 구혼이라는 것은 내게 남성의 도전 같은 것이었다.
멋진 이벤트나 근사한 반지 같은 건 없더라도. 남성이 여성을 향해 ‘나와 결혼해 줘.’라고 일생일대의 포부를 말하는 것. 그랬기에 아이라의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이건, 타란테라 가문에 내려오는 구애의 춤이야.”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아이라.
마침내 그녀의 다리에 신겨져 있던 모든 스타킹이 스르르 벗겨진다.
하얗고 아담한 맨 발로 성채의 돌바닥을 사뿐사뿐 걷는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던 건지, 하나 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몰라. 뭔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구경은 어디서 또 못할 것 같아.
여왕 아이라의 어색한 춤사위.
그것은 사람들의 시선과 이목을 끄는 구석이 잔뜩 있었다. 문제는 아이라가 자신의 옷을 하나 둘 벗고 있다는 거지.
이제 아이라의 몸에 남은 것은 상의와 하의 그리고 그 아래에 있을 속옷 정도였다. 상의 버튼이 하나 둘 풀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내 머리에 피가 확 솟는다.
“아이라 님,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네가 허락해주기까지, 이 춤은 멈추지 않아.”
아이라의 태도는 꽤 단호했다. 그렇지만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녀와 나는 서류마저 인정하고 있는 부부. 그런 와중 굳이 내게 이러한 춤을 추며 구애를 해올 필요가 있을까?
다만, 어떻게든 그녀를 멈춰야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여왕의 하얀 살결을 모두의 앞에서 드러내고 말 거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매혹적인 여성이 내 연인과 아내라면 어디서든 자랑하고 싶긴 하겠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
“알겠어요, 아이라 님. 일단 멈춰주세요.”
나는 아이라의 어깨를 붙들고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에 땀과 이런저런 감정으로 얼굴을 몹시 붉게 물들인 아이라가 내게 물어온다.
“지금 이건 수락하는 걸로 봐도 되는 거니?”
“수락하고 자시고, 저희는 이미 결혼했잖아요.”
“그건, 그래. 하지만 지금 것은 조금 달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비무제에서 누구도 우승하게 할 생각이 없었어. 우승자가 나왔더라도, 결혼 생활을 이어갈 생각도 없었고.”
아이라의 말에 주변이 크게 한 번 술렁였다. 나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아이라 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겁니까?”
“…태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거짓말은 해.”
아이라의 이야기는 꽤 길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어떠한 충격적 고백이 더 나올지 모르기에 나는 일단 상황을 무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자리를 뜨시죠.”
이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라가 여기저기 벗어놓고 걸어놓은 옷가지들을 모두 챙긴 후에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인적이 드문 성채로 호다닥 달려 도망쳤다.
나와 도피하는 와중 아이라가 말했다.
“그럼 춤의 다음 동작들은 나중에 태오, 너와 단 둘이 있을 때 네게만 보여주어야겠구나.”
“그게, 진짜 전해져 내려오는 춤 맞나요?”
“그래,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그랬어.”
확실히, 그런 이상야릇한 춤을 추면서 구혼을 해 온다면 실패할 수가 없겠지. 그 이후의 동작들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살짝 기대가 됐다.
그리하여 모퉁이를 돌아 우리는 사람 없는 복도에 도착했다. 을씨년스러운 노을빛 복도. 그 노랗고 붉은 빛에 아이라의 하얀 허벅지가 반짝반짝 빛을 낸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가 신발조차 신지 않고 맨발로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옷부터 입으셔야겠네요.”
그래서 아이라의 허벅지에 아직 온기 남은 스타킹을 입혀주거나 구두를 발에 신겨주거나 했다. 아이라는 내 손길에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고결한 여성이 내게 몸을 맡겨온다는 건 꽤 멋진 일이다. 그녀를 잘 보필해서 더 멋지고 예쁘게 만들어줘야지-라는 기묘한 책임감도 생긴다.
그러다가 모든 옷을 몸에 다시 걸쳤을 때 아이라가 한 마디 해 왔다.
“남성이 여성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은 사랑의 증거라고 했어. 정욕은 옷을 벗기지만, 사랑은 옷을 입혀준다고 그러더구나.”
“그런 말이 있습니까?”
나름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그런 비슷한 말을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저는 아이라 님께 옷을 입혀주는 것만큼이나 벗겨드리는 것도 좋아하니까요.”
내가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내가 이런 성희롱 같은 이야기를 다 하다니. 하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라의 얼굴은 몹시도 붉어서, 꽤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라의 표정이 꽤나 다채로워졌구나-. 그런 감탄을 하고 있을 즈음 저 멀리서 우리들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엘가다.
“야, 태오. 미르나 그 계집애가 너 찾더라. 무슨 뭐, 임프를 찾았다고 그러던데.”
편한 단화를 끌며 나타난 엘가. 그녀는 내 옆에 서 있는 아이라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게 있는 듯한 모양새다.
둘 사이가 오늘 아침 확 틀어져버렸다는 걸 떠올려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라도 엘가도 서로 가시 돋힌 말을 했었지.
그때 아이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침에는 미안했어.”
그에 엘가의 눈이 잠깐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의 팔을 슥슥 문지르며 몸을 바르르 떠는 데 꼭 멀미라도 앓는 사람 같이 보였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완전 안 어울리네. 무슨 저주 때문인지 머리가 아프다고 듣기는 했는데. 진짜 제 정신이 아닌가보다 너.”
“…….”
엘가의 비아냥 같은 대답에 아이라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가 아까와 다르게 확연히 편해졌다는 걸 나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애초에 둘은 내가 나타나기 전부터 가족이었다.
아이라가 폭군으로 두려움을 사고 있을 때에도 유일하게 겁을 먹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하던 것이 엘가였고, 아이라는 그런 엘가를 꽤나 신뢰했었지.
굳이 내가 걱정할 것 없이 알아서 잘 지낼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문득 여성들끼리는 사이가 어떤지 궁금해졌다. 아이라는 미르나르미 아가씨들이나 스텔라 교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또 스텔라 교수는 다른 영애들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을까?
지금까지는 나와 그녀들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영애들끼리의 관계를 신경 써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아이라 님은 엘가 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순수한 질문에 엘가가 “갑자기 뭐라는 거야.”라고 툴툴거린다. 남들 앞에서 함부로 물어보기는 좀 무례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는 하지.
그때 아이라가 말했다.
“엘가는 좋아해. 남자였다면 어렸을 적에 약혼했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사촌이고 나이또래도 비슷하니까.”
그 담담한 말에 엘가는 몹시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으엑, 네가 날 그렇게 보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는 너 싫어. 너랑 결혼하면 일년내내 비위나 맞춰야 할 것 같거든.”
“농담이야.”
아이라는 농담을 잘 못했다. 하지만 둘은 웃기 시작했다. 그 웃는 모습이 꽤 닮아서 문득 사촌이라는 것이 부러워지고 만다.
* * *
여러모로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 성채 어딘가에 깃들어 있을 임프 찾기를 계속했다.
이미 해가 저물어 작업에 난항이 있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르나가 꽤 수완 있는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이 근처 어딘가에 있어요. 이제 보니 음기가 강하게 느껴지고 있군요. 혹시 다른 곳에서 항아리나 저주 같은 게 더 발견된 곳들이 있나요?”
미르나의 물음에 스텔라가 어딘가에서 가져온 가르가타 성채의 지도를 촤르륵 펼치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 성채의 각 모서리 기둥마다 마법진이 적힌 기둥이 바닥까지 묻혀있더라. 꽤 대규모의 폭발마법이라고 해. 작동하면 성채 일대를 날려버릴 수 있다던데.”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것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아니,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라 말하는 편이 좋을까?
엘가가 말했다.
“함정이었던 거야. 어쩐지 성채가 쉽게 함락된다 했지. 지금이라도 좋으니 이 성채에서 사람들을 뒤로 물려야 해.”
사람들의 시선이 아이라에게로 몰린다. 한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라가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번 원정은 꽤 급박하게 치러졌지. 하지만 실패했다고는 말 하지 않겠어. 덕분에 알게 된 것도 많으니까. 오늘 새벽 전까지 군을 다 물리도록 해.”
의견이 모이면 행동까지 옮겨지는 건 빨랐다.
성채 안에서 쉬며 많은 체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금방 짐을 쌓아 하나 둘, 줄을 이루어 성벽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을 바라보며 엘가가 말했다.
“그래서, 아이라 너는 이 원정에서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냐? 단지 북쪽 땅을 수복하려고 했던 것만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허를 찌르고 싶었어. 하지만, 상대 쪽이 나보다 아무래도 한 수 앞서 있는 모양이네. 역시 정공법으로는 되지 않는 것 같아.”
“네 이야기는 여전히 뜬구름 같지만. 네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는 건 알겠다.”
엘가는 그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이제 우리들의 시선은 미르나가 이리저리 틈을 살피고 있는 막다른 벽으로 다시 향했다.
“얼른 그 임프라는 녀석을 찾아 성불시켜야 우리도 빠져나갈 거 아냐. 미르나, 잘 찾고 있는 거 맞아?”
“조용히 좀 해 봐요. 집중 중이니까.”
엘가의 물음에 미르나가 살짝 신경질을 부렸다. 그에 우리들 모두 멋쩍어지기를 잠시.
“야, 비켜 봐.”
엘가가 자신의 머리에 비녀처럼 꽂혀 있는 막대를 뽑아들었다. 그것을 좌우로 잡아당기자 주우욱 늘어나 거대한 할버드-분쇄자가 된다.
“지, 지금 무엇을-!?”
“언제 하나하나 찾고 있어. 부숴보면 알겠지.”
후웅, 무거운 할버드가 뒤쪽으로 힘껏 당겨지고. 마침내 화살처럼 쏘아진 그것이 미르나를 스쳐 지나가 막다른 벽을 힘껏 후려갈겼다.
콰아앙-.
후두두둑, 와르르르.
벽은 마치 부서지기 쉬운 과자처럼 뜯어졌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은 까만 어둠이다. 대략 일 미터는 될 법한 두께의 벽 뒤로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니.
무척 새까만 공간이었다.
“라이트.”
불빛을 비추자 그것이 어딘가로 이동되는 계단형 통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제가 가보죠. 엘가 님이랑 아이라 님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곳에서 계세요. 미르나 아가씨께서 지켜주시구요. 그럼 저랑 같이 가실 분은, 스텔라 님과 나르미 아가씨로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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