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90)
EP.391)# 2
391 – 친구 # 2
“천 백 하나, 천 백 둘….”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 나르미의 목소리만이 작게 퍼졌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꿉꿉하게 나는 곰팡내와 이상야릇한 냄새들이 꽤 거슬린다.
“이천 오백 이십 이….”
나르미의 입에서 언급되는 숫자는 점점 더 커졌다. 분명 꽤 깊숙하게 밑으로 내려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계단이라는 것은 좀처럼 끝이 보이질 않았다.
대체 이 성채에 이렇게나 깊숙한 계단을 만들어놓은 이유가 뭐지? 그것까진 알 수 없겠지만 이곳 아래쪽에 임프의 영혼이 있다면 나는 계속해서 더 내려가 봐야만 했다.
“후, 좀 서늘하네. 태오 군, 혹시 뭐 느껴지는 거 있어?”
스텔라의 물음에 나는 가만히 감각을 기울여봤다. 그녀의 말대로 공기가 매우 서늘하다는 것을 빼면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계단의 끝이 보였다. 바닥에 땅을 디딘 우리의 앞으로 나타나는 것은 제법 튼튼하고 무거워 보이는 문이다.
잠금 같은 건 없었지만 꽤나 묵직해서 힘으로 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함께 그 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철문이 기기긱 녹슨 소리를 내며 육중한 몸을 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것을 밀고 들어가자, 한층 더 검고 어두운 내부가 보였다. 마법으로 불빛을 피워 사방을 비추자 여기저기 놓인 도구와 뼈들이 보였다.
“감옥?”
누구의 말이었을까?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했다. 이곳은 감옥 같았다. 철창과 수갑 그리고 족쇄나 죄인을 고문했던 형틀 같은 게 잔뜩 보였으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말라 굳어버린 것 같은 핏자국들이 곳곳에 검게 그을려 있어서 상당히 으스스했다. 이런 곳에 임프가 있다니.
나르미가 말했다.
“잔뜩 사람들이 죽은 곳 같아. 그것도 굉장히 끔찍하게 살해당했어. 대체 어째서 이렇게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죽인 거지…?”
영매 체질을 타고 난 나르미에게는 내가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이고 들리는 듯했다. 나로서는 그냥 이곳을 얼른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기분만 느낄 뿐.
스텔라가 말했다.
“이 가르가타 성채까지 도주한 마왕 솔로몬은 꽤 몰려 있었어. 잔혹한 학살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그랬지. 궁지에 몰리면 누구나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이곳이 솔로몬의 궁지였나.
나는 이곳을 누비고 다녔을 마왕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를 묘사하는 그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떠오르지 않는 구석이 잔뜩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여기가 어디냐는 것보다 임프가 어디 있냐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바삐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임프. 그 녀석을 찾아 성불을 시키고 항아리를 파괴해야만 저주가 완전히 해주 된다고 그랬었나.
한 번 불러볼까?
“임프, 혹시 임프 있어?”
내가 말하면서도 무척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생각하게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별명이라도 좀 붙여줄 걸.
애초에 이런 부름에 녀석이 나올 것이었으면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성채를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겠지.
“누가 날 부른 거야?”
바스락.
그때 어둠 속에서 붉은 머리칼이 하나 불쑥 빠져나왔다. 곧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진짜로 부른다고 나올 줄이야.
“뭐야, 태오인 거야. 주인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야.”
녀석은 내게 다가와 실망한 티를 역력히 냈다. 그때 스텔라가 묻는다.
“태오 군, 거기에 뭐 있어?”
그녀의 물음에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스텔라에게는 이 작은 임프가 보이질 않는구나. 이렇게 생생히 존재하고 있는 녀석을 보지 못한다니.
신기하다.
그때 나르미가 말했다.
“나도 흐릿한 형태로밖에 보이지 않아. 그냥 여기에 무언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좀 무섭게 일렁이는 것 같아.”
결국 이 임프를 제대로 본 것은 나와 미르나 정도밖에 없었다. 정말 유령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어딘가 으스스하면서도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항아리 안에 갇혀 죽은 임프라니. 솔로몬은 임프들을 몹시도 아껴준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래서 마르마르도, 타르타르 같은 임프들도 마왕 솔로몬이 다시 나타나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나가길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마왕은 단순히 왕을 넘어서서 신앙이나 숭배의 영역이었어. 하지만 그런 존재가 이런 임프를 항아리에 가두고 저주로 만들어버렸다니.
마르마르나 다른 임프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지하 깊숙한 곳에서 비밀리에 행해지고 있던 일들이니까.
내 눈은 이 지하 근처 여기저기에 놓인 항아리들을 바라봤다. 그 안은 비어 있는 듯했지만, 여러 개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에서 제법 끔찍함을 느꼈다.
그때 임프가 내게 말했다.
“그보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주인님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였는데!”
“너를 찾으러 왔지. 어서 이곳에서 나가자.”
* * *
나는 생각보다 손쉽게 임프를 발견해서 녀석을 성채 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넓은 훈련장. 커다랗게 모닥불이 피워진 곳으로 녀석을 이끌고 오자 미르나가 짝-박수를 쳤다.
“역시 태오 경에게 맡기면 일이 금방금방 해결 되네요.”
나로서는 일이 너무 쉬워서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었다만. 곧 녀석을 찾아 데려오는 것이 고작해야 앞으로 있을 것의 기초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녀석을 찾는 게 아니라 녀석을 성불시키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임프를 모닥불 근처의 항아리로 데려갔는데.
“히에엑…!!!”
임프가 몹시도 불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마치 저 항아리가 자신에게 있어서 무척 끔찍하고 괴로운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어찌할 줄을 몰랐다.
미르나가 말했다.
“임프의 영혼을 항아리 안에 집어넣어야 해요. 태오 경, 제가 다리 쪽을 잡죠. 태오 경이 머리 쪽을 잡아주세요.”
그 말에 나는 임프의 팔목을 붙잡았는데. 녀석은 마치 오랜 학대를 당하다 도망쳐 다시 붙잡히고 만 유기견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히에에엑…!!! 이, 이거 놔! 나 저거 싫어! 누가 날 좀 도와줘! 살려줘! 이, 이 녀석들이 날 죽이려고 해! 임프 혐오자! 괴물!”
그 버둥버둥거리는 모습을 보자 무척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끔찍한 항아리에서 달아나 겨우 이 성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 기구한 삶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니.
“태오 경, 무슨 생각 하는 지는 알 것 같은데. 이대로 임프가 멋대로 돌아다니는 걸 방치하는 쪽이 더 가혹한 일이에요.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모든 걸 잊고 정말 악귀로 전락하게 되어버릴 테니까요.”
미르나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나는 미르나와 임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항아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마침내 깊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했다.
“…못하겠습니다.”
아까 전 나는 임프들을 괴롭힌 솔로몬을 비방했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성불이라는 목적이 있다고는 하나 억지로 이 임프를 항아리에 집어넣는다면 나도 옛 마왕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또 이 녀석에게서 언제나 날 응원해주던 친구 마르마르의 얼굴이 겹쳐보여서, 이대로 녀석을 항아리에 집어넣는 게 몹시도 나쁜 짓처럼 느껴졌다.
나도 안다.
감성으로 일을 멈추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대로 녀석을 내버려두는 것보다 저 항아리에 집어넣어 그 기구한 삶을 끝내주는 것이 더 녀석을 위한 일이라는 걸.
그때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던 엘가가 말했다.
“뭐가 잘 안 돼? 내가 할까? 그래서 그 임프라는 녀석은 어디에 있는데?”
엘가는 바로 앞에서 비명 지르고 있는 임프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 태평한 이야기에 미르나가 한숨을 내쉰다.
“볼 수도 없는 사람이 만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리오네스 영애, 당신은 너무 기가 세요. 유령을 보거나 만질 수 있을 리 없어요.”
“기가 세다는 말은 리오네스 가문 여자들에게는 칭찬이거든.”
“그래서 안 된다는 거에요. 아무튼, 태오 경이 망설이고 말 것이라는 건 사실 알고 있었어요. 태오 경은 임프 애호가니까. 억지로 항아리에 넣는 게 아니라도,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미르나의 말에 나는 화색이 돌았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임프의 영혼이 생각보다 증오 없이 맑다는 것 정도에요. 이러면 말도 통할 것이고, 성불을 위한 방법도 모색할 수 있겠죠.”
“성불이라면, 혹시 이 땅에 남긴 미련 같은 것이라도 풀어주면 되는 걸까요?”
내 물음에 미르나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굉장히 잘 알고 계시네요.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는 비법 중에 하나인데.”
내 말에 미르나가 놀라는 것에서 오히려 나는 더 놀랐다. 영혼을 성불시켜줄 때 미련을 없애주는 건 꽤 흔한 방법이지 않나? 이 세상에서는 또 다른가.
가끔 이렇게 이 세상의 사람들과 내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지.
나는 일단 항아리를 이 임프가 보지 못하는 곳에 멀리 치우도록 했다. 곧 바들바들 떨고 있었던 임프의 상태도 조금씩 호전 됐다.
“너희들, 못 됐어! 저게 대체 뭐야? 뭔 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내게 내밀지 마!”
임프는 끔찍한 것을 자신에게 내밀어온 우리에게 화가 난 듯했다. 저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걸까? 지금 느끼는 것이지만, 이 녀석은 자신이 이미 죽은 유령이라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런 녀석에게 너는 사실 아주 오래 전에 죽었고 이제 성불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 내가 물었다.
“임프야, 혹시 하고 싶은 일 있어? 먹고 싶은 음식이나. 방금 내가 크게 잘못했으니까. 그 답례로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
“…….”
녀석은 나를 몹시도 노려봤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한 뒤끝이 남은 것이겠지.
내가 느낀 바 임프들은 대체로 고양이와 비슷해서, 신뢰를 쌓기는 무척 어렵지만 그 신뢰가 떨어지기는 정말로 쉬웠다.
“…정말 아무거나 말해도 돼?”
다만 이 녀석은 좀 다른 듯했다. 마르마르처럼 이마에 뿔이 나지 않은 임프니까. 그런 임프들은 대체로 순진하고 착한 구석이 많다. 이 녀석도 분명 그랬겠지.
“진짜 아무거나 말해도 소원 들어주는 거지? 꼬리 걸고 약속해.”
슥.
손에 쥔 별 모양 꼬리를 내미는 임프.
그에 나 역시 손에 감아두고 있던 마르마르의 하트 모양 꼬리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두 꼬리가 서로를 향해 구부러지며 마치 새끼손가락을 걸은 듯한 모양이 됐다.
임프가 말했다.
“하트 모양 꼬리는 제법 희귀한데. 어디서 난 거야? 혹시 다른 임프한테서 억지로 뽑아내거나 그런 거 아니지? 나처럼.”
“아냐, 이건 친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친구….”
임프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말했다.
“나, 하고 싶은 것이 생각난 거야! 그럼, 태오야 귀 가져다 대 봐.”
그 뒤 임프는 내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닥속닥 거렸다.
“…정말 그거로 괜찮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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