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410)
EP.411)블루 # 2
411 – 메리지 블루 # 2
“그래서, 태오 네가 봤을 때는 어때? 이건 조금 살쪄 보이지 않아? 그리고 이건, 좀 너무 말라보이네. 기다려 봐, 입고 올 테니까.”
“…….”
“뭐야, 표정 안 풀어? 나랑 같이 드레스 고르는 게 힘들어?”
엘가의 으르릉거림에 나는 표정을 활짝 풀었다.
“너무 좋습니닷…!
물론 내 과장된 님프적 반응에 엘가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내 볼을 붙잡아 위로 죽 들어올린다.
“오늘 우리들 도와주기로 한 건 너잖아. 네가 신랑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괜히 딴청피우거나 하지 마라. 알겠냐?”
“…네, 넵.”
엘가의 말대로다. 나는 오늘 결혼을 준비하는 영애들과 함께 모나크 시티의 고급 상점가에 나왔다.
이 나라의 귀족 여성들에게 있어서 결혼이라는 건 하나의 화보촬영과 마찬가지.
또 이게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나라의 커다란 행사를 겸하고 있는만큼 준비하거나 구매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일단은 드레스다.
새하얀 드레스.
내가 보기엔 다 비슷하게 예쁘건만, 다섯 명이나 되는 여성들은 하나하나 옷을 입어보며 내게 반응을 물어왔다.
“태오야, 이건 어떠니? 님프 화이트. 고풍스러운 색상이지. 그렇지만 저쪽에 있는 퓨어 화이트도 마음에 드는데.”
“태오 경, 이건 너무 가슴 쪽이 파였으려나요…?”
“태오 군, 엘프들은….”
다섯 명이서 한 마디씩만 해도 다섯 마디다. 나는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런 일을 앞으로 열흘 전까지 계속 해야 한다고?
차라리 교단의 내분을 종식시키고 오는 게 편하겠어.
물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는 했다. 이건 하렘을 추구하는 남자로서의 의무. 그래서 나는 불평불만 없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모조리 받아들여주고, 맞춰주기로 했다.
나야 그녀들이 무엇을 입든지 아름답고 예쁘게 보일 뿐이지만.
한 번 뿐일 결혼식이다.
한 번 뿐이어야만 하는 결혼식이니까 다들 완벽하게 하고 싶은 것이겠지. 지금까지 삶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날이 되어야 할 터. 나도 진지하게 임한다.
“일단, 저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가게 바깥으로 빠져나와 잠깐 숨을 고른다.
“후읍.”
가슴에 잔뜩 숨을 담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앙그마르의 수도 모나크 시티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 중에는 정말 입이 쩍 벌려질 만큼의 부자들도 많았다.
그런 부자들이 자주 오가며 물건을 구매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귀족들의 거리. 본디 우아한 신사숙녀들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 다니는 이 거리가 유난히 적막하다.
“차원이 다르다니까.”
그 이유야 별 것 없다.
오늘 하루, 편안한 쇼핑을 위해 이 귀족들의 거리를 내 아내들이 전부 대절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권세는 하늘을 찌른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서 이런 막무가내 같은 일이 실제로 가능했다.
하긴 뭐, 여왕이 거리를 통제한다고 하는데 누가 반대하겠어. 그렇게 가볍게 몸과 머리를 풀어준 나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 일찍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들어간 그녀들이 가게 밖으로 나서게 된 것은 늦은 점심을 먹어야만 할 때였다.
* * *
예전에 스텔라 교수와 함께 갔었던 곳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가을의 점심.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전부 대절한 고급 식당의 테라스에서 먹는 빵과 고기. 맛있다.
문득 나도 이런 궁정의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졌구나 싶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적응하고 마는 것이구나.
물론, 이 떠들썩함은 적응하려면 오래 걸리겠지.
“그러니까, 입장할 때는 우리들이 태오랑 합류한 순서대로 하는 게 제일 좋지 않겠어? 내가 가장 먼저 서고. 그다음 차례대로 알아서.”
엘가의 이야기에 스텔라가 인상을 좁힌다.
“나이순은 어때?”
물론 아이라는 반대했다.
“이런 건 신분의 우위로 정하는 게 당연하지. 여왕인 내가 가장 먼저 식에 입장하는 게 당연한 일이야. 그게 보기에도 옳고.”
그에 미르나가 말했다.
“저는 나르미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순서를 정해야 하는 일에 익숙하죠. 제 생각에는….”
그때 나르미가 끼어들었다.
“알았다! 그냥 한 번에 다 같이 입장하자고 그러는 거구나! 좋은 생각이야! 그냥 다섯 명 다 같이 한 번에 입장하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결혼식장의 붉은 융단을 누가 먼저 밟아야 하는 것인가로 식사 내내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다들 의견도 많고 할 말도 많아서 좀처럼 결정되질 않는다.
으흠-헛기침을 하는 엘가.
“그럼 지금은 내가 안주인이니까. 대강 결정 내리도록 한다? 일단은 그럼 나르미가 말했던 것처럼 모두 한 번에 입장하는 걸로 하면 되겠네.”
엘가의 말에 모두 깜짝 놀란 것처럼 엘가를 바라본다.
엘가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왜? 뭐,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나 먼저 입장하고 싶어할 것 같았어?”라고 되묻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엘가는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가져야만 속이 풀리는 여성이었으니까.
“나도 양보할 줄 알아. 나눠 먹는 법, 알거든.”
하지만 엘가도 나름대로 여러모로 일을 겪으며 성장한 모양이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한층 더 가정적인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 건가?
신기하구만.
사람이란 변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내가 이 화려한 궁정의 식사와 예법, 예식 등에 적응해가는 것처럼 엘가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그에 미르나가 흥-하고 코웃음을 친다.
“그 말괄량이가 드디어 길들여진 모양이네요. 그 리오네스 영애가 이렇게 얌전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죠.”
“누가 누굴 길들여? 난 야생 그 자체야, 인마. 그러는 너네야 말로 갑자기 둘로 분신술 써서는 두 사람이서 종알종알. 너희가 이렇게 시끄러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언니는 원래 시끄러웠어. 잘 때 가끔씩 이도 갈아. 숙녀답지 못하게.”
“나, 나르미…! 너는 대체 누구 편이야…!?”
“나는 내 편! 앗, 그보다 교수님, 그거 뭐야, 반지 카탈로그잖아? 나도 봐봐!”
“아, 이거는 얼마 전에 새로 들여온 보석들 목록인데….”
영애들은 스텔라의 카탈로그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기 바쁘다. 예쁜 반지를 손에 끼워 넣는 것으로 결혼식이 마무리되는 거니까.
아니, 그럼 나는 손가락 다섯 개에 모두 반지 껴야 하는 건가. 나는 다섯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채 희희낙락하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보다가 그만 뒀다.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살짝 고개를 흔들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그녀는 여왕 아이라였다. 모두가 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아이라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아이라 님은, 반지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가요?”
“글쎄. 굳이 내 몸을 보석으로 치장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말이야. 어떤 보석을 착용하더라도 내 앞에서는 빛이 죽어버릴 테지.”
“…그렇군요.”
“농담이야.”
요즘 자주 느끼는 거지만, 아이라는 농담을 잘 못했다. 별로 재미없는 사람인가. 하지만 그 예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막 재미있어지는 것 같고 그렇다.
무릇 미남미녀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라고 한 마디만 해도 옆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보가 터지기 마련이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이라에게는 농담 센스가 없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내 아내가 된다니. 그녀 뿐만이 아니라, 이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내 아내다.
문득 유리 상자 안의 개다람쥐 컹컹이가 떠올랐다. 갈색 털에 검은 줄무늬가 귀여운 다람쥐들이 유리상자 안에 바글바글했었지.
컹컹이는 나름대로 여러 암컷에 시달리느라 힘들어보였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은 꽤 재미있고 귀여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만약 누군가 지금의 나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면 나도 개다람쥐 컹컹이처럼 보일까? 만약 누군가 내 모든 것들을 지켜보았다면….
문득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돌아보게 됐다. 내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비춰질까.
솔직히 똑바로 살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손가락질 받지 않을 정도로는 열심히 살았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내가 겪어왔던 모든 일들을 글로 남겨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제목은 빌런 사냥꾼…과는 달라야 하겠지. 이건 사냥꾼이 아닌 내 이야기니까. 다만 마땅히 떠오르는 제목이 없다. 그때 나는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이라가 묻는다.
“태오야, 울적하니?”
“아뇨, 기분 좋은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시나요?”
“그냥, 네가 어딘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러고 보면 요즘 태오, 너는 좀처럼 진정하질 못했지. 혹시 메리지 블루 마법에 걸린 건 아니니?”
“메리지 블루 마법요?”
내가 묻자 미르나가 말했다.
“옛날, 결혼하지 못한 마녀 메리지가 사람들에게 건 저주라고 하죠. 결혼 전에 우울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경우가 있는데. 메리지의 저주에 걸렸다고 해요.”
저주에 대해서는 처음 듣지만 결혼 전 우울에 대해서는 나도 안다. 내가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구나. 확실히, 그녀들의 평가는….
나름대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최근의 나는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로만이나 그라시아에 다녀온 것도 어쩌면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그냥.”
말로서 하면 조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냥 좀, 실감이 안 나서요. 솔직히 실감이 나질 않아요.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 또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아내 다섯을 둘 예비 신랑이라니. 내가 배워왔던 상식과는 너무 달라서, 뒤 늦게 서야 현실감이 사라졌다. 마치 한 편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진짜 못된 마녀의 마법에 걸려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걸지도. 그때 엘가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솔직히 나도 믿겨지지 않기는 해.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뭔가에 홀렸던 게 분명해.”
그에 후후 웃는 미르나.
“그러고 보면, 고대의 님프들은 사람을 홀리는 못된 요정들이었다고도 했었죠. 사람을 현혹시켜서 물에 빠트린다구요.”
“미르나 양, 그거 인어 전승 말하는 거지? 하긴, 뭐. 인어들은 옛날 바다에 살던 님프들이었다고 하니까.”
여성들은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옆모습을 보고 있을 때, 내 옆자리에 앉은 아이라가 내 손을 슥 붙잡아온다.
“꿈이 아냐. 내가 잘 알아. 태오, 네가 깨어나도 우리들이 사라질 일은 없어.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문득, 웃음이 났다. 내가 설마 아이라에게 이런 위로를 들을 날이 올 줄이야. 내가 그녀를 길들였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그녀들이 나를 길들인 걸지도.
그래서 나는 그 손바닥의 말랑한 온기와 부드러움과 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가을의 수다스러움에 내 안에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사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사실 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누구였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 지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만약 내가 언젠가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 타이밍은 지금 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 예민한 감수성이 마치 귀뜸을 해오는 기분이었다.
내가 말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 모두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신혼 여행지라고 해도 좋고. 아니면 뭐라고 불러도 좋지만….”
그에 나르미가 물어온다.
“태오야,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었어? 그게 어디인데?”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려왔다.
나는, 오랫동안 내 가슴 안에 묻혀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제 고향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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