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412)
EP.413)블루 # 4
413 – 메리지 블루 # 4
가까이 다가갈수록 창문에서 뿜어지는 빛은 점점 더 선명하게 내 몸을 감쌌다.
마침내 그곳에 도달해 그 바깥을 쳐다봤을 때, 나는 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광경에 머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이곳을 안다.
이곳은 원래 내가 있어야만 하는 곳이었어. 낡은 그네가 삐걱거리는 놀이터. 흙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들과 선생님들.
특히 저 멀리 비춰지는 붉은 노을은 내가 보기에도 꽤 멋졌다. 그래, 이 창문은 내가 아는 그 어떠한 장소보다 노을이 멋지게 보이는 곳이었지.
그래서 나는 늘 노을이 지는 시간이면 이렇게 창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대고 앉아서 언제나 노을이 지는 걸 바라봤다.
아니, 아냐.
노을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앉아있었다고 모두에게 말했었지만. 사실 나는 노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었다.
내 눈은 오직 울타리와 녹슨 정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모퉁이를 향했다.
나를 이곳에 두고 갔던 사람이 저 모퉁이를 돌아 언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었지. 그 익숙한 모습이 저곳에서부터 나타나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걸 매일 기다렸다.
“그래, 난 늘 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어.”
하나 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렸던 기억 같은 것들. 그러나 정작 그 누군가의 얼굴이나 모습 같은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대체 누굴 기다렸던 거지?
그런 내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직접 찾아가십시오. 창문의 너머로. 본디 당신이 그러하길 원했던 것처럼.
창문의 너머라. 그래, 그것도 기억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창가에 앉지 않게 되었지. 그러나 그것을 넘을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찾아보려 했었어.
나를 두고 갔었던 내 어머니를 말이다.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찾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도 하고 마침내 대강 그 위치를 알아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내 세상이 크게 변했다.
이 둘의 인과관계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누군가의 지독한 장난에 휘말렸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던 때도 있겠지만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늘 한 명이었던 거야.”
창문을 넘으라고 했지.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모퉁이를 향해 가고 싶었다. 그래서 창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어 잠금을 풀자, 녹이 잔뜩 슬고 말았는지 창문은 쉽게 열리질 않았다.
그것을 한참 삐걱거리고 있을 때, 무언가가 내 얼굴에 차갑게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스르르 눈을 뜨자 누군가가 흐릿한 내 시야 앞에 아른거린다.
이마에 닿는 것은 차갑게 젖은 수건인가.
“엄마…?”
“내가 왜 네 엄마야.”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눈을 더욱 부릅뜨자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그때서야 내 앞의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엘가 님.”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나도 몰라.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네 집무실에 있더라. 그리고 네가 픽 쓰러지더니 일어나질 않았어.”
그렇게 됐나.
방금 그것은 꿈이었을까?
비몽사몽하고 있을 때 엘가가 차가운 수건을 내 이마에 확 끼얹는다. 얼음물에 담궈두고 있었던 수건인지 내 정신은 삽시간에 깨어났다.
“히에엑…!”
“히에엑은 무슨. 그러니까 미완성된 마법진에는 타지 말자니까. 내 의견이 아니라, 뱃속의 레오노이가 타지 말자했던 거야.”
“레오노이가요?”
“그래, 이 녀석,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 내 배를 막 차.”
배를 찬다니. 태동이 느껴진다는 걸까? 아직 활발히 태동이 느껴질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엘가가 그냥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다만 미완성된 마법진으로 인해 정신을 잃었던 건 사실이리라.
아무래도 공간의 이동마법에는 내가 모르는 오류들이 있었고, 그로 인한 마력의 역류가 내 머리에 과부하를 일으킨 탓에 절전되듯 정신을 잃은 것이겠지.
그대로 이성을 붙잡고 있었으면 과부하 된 마력이 내 머릿속 마나 회로를 몇 군데 태웠을지도 모른다. 그럼 두통을 잔뜩 앓았겠지.
그래서.
방금까지 보고 있었던 창문은 꿈이었던 걸까?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했어.
내가 물었다.
“저는 얼마나 누워있던 겁니까?”
“글쎄, 한 한 시간 정도 됐나.”
시간은 얼마 안 지났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어깨를 붙잡는 엘가.
“야, 좀 더 누워있지?”
“괜찮습니다. 그냥 졸음이 부족해서 쓰러진 거지, 사실 별 거 아니에요.”
슥.
따뜻한 털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은 후 천천히 창밖으로 다가갔다. 바깥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빗줄기 덕에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엘가가 말한다.
“하늘에 구멍 뚫린 것처럼 비 내리는데, 결혼식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다른 날로 미뤄야 하는 거 아냐?”
그녀의 물음에 문득 생각났다. 잔뜩 비가 내리다 어느 날만이 가장 맑고 고요하다고 했었지. 그래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칠 거에요.”
* * *
━컹컹!
무언가 내 얼굴을 간지럽혀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너무나도 가볍게 뜨이는 눈꺼풀에 스스로조차 놀라웠다.
“뭐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몸은 언제 어느 때보다 최고조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다.
“좋아.”
━컹컹!
“너도 좋다는 거겠지.”
개다람쥐 컹컹이의 밥그릇에 아몬드나 호두 같은 먹이를 가득 부어서 담아준 후 오랫동안 쳐두었던 커튼을 삭 걷어본다.
촤르륵.
그러자 제법 눈부신 아침의 햇살이 방 안에 스며들었다. 며칠 비가 내려 눅눅했던 방안이 그것만으로도 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날씨가 좋네.”
나는 내친 김에 창문을 아주 열어버렸다. 열린 틈새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젖은 흙내음, 아침 특유의 이슬내음이 내 코를 적신다.
며칠 내리던 비가 바사고의 말처럼 열흘째가 되던 날 맑게 개었다.
그 동안 비가 내렸기 때문인지 세상은 한층 더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곳으로 변한 듯이 보였다.
숨어있던 새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개다람쥐 컹컹이의 여자 친구들이 열린 창문으로 쪼르르 들어온다.
그러자 컹컹이는 입 안에 잣과 땅콩을 잔뜩 집어넣은 채 여자 친구들과 창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뭐야, 여자들을 보고 싶어서 창문 열어 달라 한 거였냐? 정 없기는.”
개다람쥐 컹컹이의 여자친구들은 야생 개다람쥐들이었다.
이름은 미르노, 노르미, 엘사, 아이리, 스텔리. 내가 아는 누군가들이랑 이름이 비슷한 건 우연이 아니다.
개다람쥐 컹컹이는 어쩐지 나와 같아서, 녀석의 여자친구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과 비슷하고 닮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래도 신기한 점은 가끔 이름 불렀을 때 녀석들도 내 무릎 위로 올라와서 주머니를 뒤적이거나 한다는 것이다. 암컷 다람쥐들도 자기를 부르는 줄 아는 걸 거야.
그래서 녀석들 또한 컹컹이처럼 길들여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잘 안 되서 그냥 바깥과 안을 드나들도록 했다.
그 때문에 녀석들은 컹컹이의 아내가 아닌 여자친구다.
내게 아내라는 것은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사는 개념이고, 여자친구는 따로따로 사는 개념이니까. 개다람쥐 컹컹이도 비슷하겠지. 컹컹이도 결혼하면 좋을 텐데.
똑똑.
그때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태오 님, 이, 일어나셨습니까?
발란 교수의 목소리였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결혼식 날이라 일찍 일어나셔서 준비를….
그래.
그랬지.
“일어났습니다.”
나는 오늘 결혼을 한다.
한껏 단장을 하고, 멋지게 붉은 융단 위를 걸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까탈스럽고도 동시에 그만큼 아름다운 아내들과 가족이 된다.
어쩌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비가 내린 며칠은 이런저런 준비와 대화들로 너무나도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내가 오늘 사람들 앞에서 다섯 신부의 신랑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엄청 기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따뜻한 입안 속 차가운 샤베트처럼 사각사각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안다.
비유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엘가였다면 “알아먹을 수 있는 말로 해!”라고 내 머리통에 꿀밤을 때렸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지금 내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말 이런 비유 정도밖에 들 수 없었다. 신기한 기분. 혹시 이게 결혼 전의 메리지 블루라는 걸까?
다들 어떤 기분이려나.
나는 이 어딘가에서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을 아가씨들을 떠올렸다.
식을 올려서, 붉은 융단에 그녀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신랑은 신부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된다고 했었나.
그녀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내게 나타날지 기대하며 나는 방문을 열었다.
“발란 교수, 좋은 아침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바사고 놈의 말대로 정말 날씨가 맑아졌어요. 태오 님께서 결혼을 하셔서, 다섯 여, 영애들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아주 좋은 날이죠.”
“그렇네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발란의 뒤를 따라 신랑들이 머물러야 하는 준비실로 향했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임프 도우미들이 각종 붓과 화장품을 가져와 내 얼굴에 칠하기 시작한다.
“나 푸르푸르는, 먹물의 임프로도 일하는 것이야…! 우리들의 으뜸으뜸 동지 태오노이를 그 어떠한 임프와 님프보다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것이야…!”
곧 내 몸에는 평소 칠해본 적 없는 화장품이 발렸다.
“이 흉터는….”
푸르푸르가 내 오른쪽 눈을 죽 그어 내린 흉터를 보며 잠깐 고민하는 것 같기에 의자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가볍게 말했다.
“그건 그냥 그대로 둬. 난 이제 이 흉터도 맘에 드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 결혼식은 이 흉터 덕도 잔뜩 봤었거든.”
“……?”
나와 엘가의 일을 알 리 없는 임프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 거릴 뿐. 그때 마르마르가 나타나 내게 여러 옷을 보여주었다. 다 멋진 턱시도들이었다.
“신랑의 복장은 아무래도 까만 게 좋겠지! 임프 블랙! 소악마들이 좋아하는 색깔이야…!”
내 몸에 척-하고 연미복을 대 보는 마르마르. 이제보니 마르마르의 고운 손바닥이 제법 트고 갈라져 있는 게 보였다.
“마르마르, 그 손은…?”
내 말에 완장의 임프 타르타르가 답했다.
“으뜸 임프 마르마르 동지가 직접 옷감을 수선하고 재단하여 만든 연미복인 것이다…! 물론 블랙 앙그마르 컴퍼니의 우리 임프 주주들도 한 땀 씩 도와준 것이다…!”
마르마르와 임프들이 옷을 직접 만들었다니. 이런 솜씨가 또 있었을 줄이야. 그러고 보면 마루마루 인형 같은 걸 만든다고 한 동안 봉제를 실컷 했었지.
“고마워, 마르마르 그리고 임프들아.”
내 칭찬에 임프들은 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들이 결혼을 하는 것처럼 준비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한다.
내 머리를 빗어서 뒤로 넘기고 무엇인지 모를 왁스를 잔뜩 칠해 놓자,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내 모습은 어느덧 어디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잔뜩 꾸민 귀공자가 되었다.
사실 이 얼굴은 예전부터 잘생겼다고 생각했긴 했었지. 내가 꾸밀 줄을 모르기도 했고, 외형을 가꿀 여유가 없어서 방치해두었지만.
이렇게 보니까 새삼 와 닿는다.
이 얼굴로 평범하게만 자랐다면 여자들 좀 울렸을 거야.
“으뜸으뜸 동지 태오노이가 마치 왕자님 같은 것이야…!”
“엄밀히 따지면 원래는 왕자님이 맞는 것이다…!”
호들갑을 떠는 임프들, 그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준비실을 나섰다. 신랑들은 사람들 앞에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었나.
요 며칠 잔뜩 연습했었는데 막상 진짜로 하려니까 꽤 긴장된다.
기이익.
마침내 문을 열고.
나는 세상을 향해 나섰다.
“세상아 보아라, 오늘의 주인공 앙그마르의 태오 가스펠이 여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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