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497)
EP.498)– 아주 오래오래 # 3
외전 – 아주 오래오래 # 3
누전차단기 혹은 두꺼비집이라 불리는 게 있다.
가정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과전류가 발생되면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전기를 차단해버리는 장치다.
사람의 몸에도 그와 비슷한 기능이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한 번에 와르르 몰아닥치면 때때로 ‘머릿속이 하얘진다.’라는 표현을 하고는 하는데. 그것이 일종의 의식을 차단하는 두꺼비 집이였다.
지금 내 머릿속이 그랬다.
“……!”
굉장한 일을 겪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머리가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히오옹….
내 마음 속의 도우미 거미 바엘도 밀려드는 정보량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정의 홍수에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야, 이성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내 뇌리에 팍 박혔다. 이 목소리를 듣는 것은 대략 칠 년만인가.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듣고 나니 기억이 확 떠오른다.
“너는….”
내 앞에는 여자가 있었다.
단발로 짧게 잘라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적당히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한 화장.
그리고 청바지에 하얀 티를 입고 그 위에는 수수한 체크 셔츠를 걸쳤다.
인상 깊은 것은 새하얀 운동화정도인가.
캠퍼스 내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외형적으로 특징을 잡자면 털털하고 쿨한 보이쉬한 느낌의 여학생. 실제로도 그랬다.
과에서 가장 예쁜 여신…춘향이 정도는 안 되도, 그 옆에서 재미있게 떠들고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향단이 정도 되는 느낌.
그래도 10점 만점의 이성보다는 6~7점의 이성이 남자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 법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손에 닿을 것 같이 느껴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친구는 평범한 사람 중에선 가장 예쁜 사람이었다.
“너 왜 학교 안 나왔어? 수강신청까지 다 해놓고.”
그런 친구가 내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평범한 모습이었으나 내게는 마치 자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걸 일부러 과장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너 출석 안하면 전부 F먹는다? 적어도 내가 조교하고 있을 때 졸업하는 게 좋지 않겠어? 너 후배들이랑은 안 친해서 다음 조교랑은 말도 못 섞을 거 아냐.”
툭.
친구는 웃으며 내 어깨를 주먹으로 툭 두드렸다. 무척이나 스스럼없는 터치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이러한 터치 하나하나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었지.
지금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남자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녀석의 핸드폰은 바쁘게 웅웅거리고 있었으니까.
이 녀석.
내가 이 녀석에게 환승이별 당해 헤어지고 나서 군대 가 있는 동안에도 CC를 몇 번이나 했었다지?
그 때문에 학과 내에서 알게 모르게 은근히 따돌림도 받았다고 했는데. 결국 과조교까지 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생활력이라고 해야 할지….
“연락도 안 되서 새우 잡으러 갔다고 막 애들이 그러던데. 건강해 보인다? 새우잡이 갔다 온 건 아닌 것 같네.”
슥슥.
친구는 내 모습을 위부터 아래까지 가볍게 훑었다. 그러다가 곧 그 시선이 내게서 떠나 내 옆에서 와글거리고 있는 아내들을 향한다.
“그보다 여기 이 사람들은 누구…? 아는 사이야? 에타에 글 올라와서 구경 나와 봤던 건데. 네가 있으니까 깜짝 놀랐잖아.”
그렇구만.
궁금했던 건 내가 아니라 내 뒤쪽 사람들인가. 이에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니, 굳이 설명해줄 필요가 있나?
얘가 나한테 뭔데?
다만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눈앞의 친구가 아니라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내 아내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내가 이 눈앞의 여성과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방금 있었던 대화나 눈빛 혹은 숨소리에서 전부 파악했겠지.
아내들에게 전 여자친구를 들킨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많은 일을 겪어온 내 삶이었지만 그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도통 예상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여러모로 조졌다는 정도.
“여기는…?”
그때 아이라가 나른한 표정으로 우아하게 턱을 들어 올려보였다. 눈빛을 보면 이미 대강 다 파악한 것 같은데 굳이 물어보는 걸 보니 설명을 입으로 듣고 싶은 모양이다.
후-.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할 짐. 까짓 거, 결단을 내리지 뭐.
“여기는 김유나, 제 대학 동기구요. 여기는 아이라 님이야.”
내가 간단히 서로를 소개하자 김유나는 오-하고 동그랗게 입을 벌렸다.
“아이라, 역시 외국인이구나. 그런데 대학 동기라니. 섭섭하네. 너랑 나 사이가 겨우 그것밖에 안 돼?”
이 녀석,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여자들 간의 기싸움 그런 건가? 나는 외제차 타는 과선배에게로 환승해놓고 지금 와서 수작질을 부리는 김유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보라도 발동한 건가.
불뚝. 나는 악동으로서의 못된 심보가 몸 안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옛날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를 부여하던 나라면 모를까, 지금 와서 이 못된 녀석에게 휘둘려질 만큼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못된 계집애들을 갱생시키는 것에 있어서 나는 나름의 전문가니까.
“여기 김유나는 제 전 여자친구에요.”
“오.”
김유나는 내가 자신과 나 사이를 스스럼없이 밝히리라는 생각지도 못한 듯이 동그랗게 입을 벌렸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아이라 님도 내 전 여자친구야.”
“─뭐?”
“그리고 저기에 보이는 금발이나 쌍둥이, 저기 아기 안고 있는 사람들도 내 전 여자친구야.”
“…뭐래?”
김유나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겠지. 그때 엘가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전 여자친구라니,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돼? 엄밀히 따지고 보면 맞기는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니 섭섭하잖아.”
스르륵. 엘가가 내 팔에 팔짱을 꼈다. 푹신푹신하고 말랑말랑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을 때 김유나는 몹시도 당황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나르미가 와락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전 여자친구라니! 완전 웃긴다! 근데 맞아! 나는 전 여자친구였어!”
그리고는 내 남은 팔에 와락 팔짱을 껴는 나르미였다. 덕분에 나르미의 등에 매달려 있던 잉잉이가 공중으로 부웅-떠오른다.
━잉잉야잉.
“쉿, 잉잉아. 움직이면 안 돼.”
한쪽 팔을 뻗어서 잉잉이를 붙잡는 나르미의 웃음소리에 김유나의 얼굴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혹은 모욕을 당했다는 것처럼 울긋불긋해지기 시작할 즈음-.
“아빠는 이 체육관 관장이라는 것을 이겨주는 것입니닷…! 이 레오노이의 초코리타가 자꾸만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닷…!”
레오노이가 내 팔을 죽죽 잡아당겼다. 그런 레오노이를 품에 안아 들어 올리고 있으려니 김유나가 “아빠…?”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얘는 내 애야.”
“애…!?”
“그래! 여기 모두 내 아내들이고! 나는 사실 아랍 왕자야!”
“……!!!”
김유나는 무언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곧 몹시도 굴욕적인 당황으로 변하더니 휙 고개를 돌려 우리들에게서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 하는 것이라 생각하려나? 사실 아랍왕자는 아니긴 하다. 그래도 비슷하잖아.
아무튼.
내 말을 믿든 못 믿든, 이제 저 녀석은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하겠지. 신경 쓰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몹시도 통쾌해졌다.
동시에.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을 느끼든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다만 아내들이 뭐라고 할지는 상당히…두렵다.
“아무래도 좋으니 아빠는 빨리 이 님프혐오적인 체육관 관장이라는 것을 쓰러트려주는 것입니닷…! 초코리타가 자꾸만 쓰러지는 것입니닷…! 부활초도 다 써버리고 만 것입니닷…!”
* * *
“부럽네. 누구는 이런 벚꽃 나무 아래에서 데이트도 하고. 이렇게 얼음 담긴 커피라는 것도 잔뜩 마시면서 히히덕거렸겠지.”
캠퍼스를 걸으며 엘가가 중얼거렸다. 마치 날 더러 일부러 들으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실제로 듣고 찔리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겠지.
이럴 때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납작 엎드려야 하나? 그때 미르나가 말했다.
“그래도, 이런저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태오 경이 저희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때의 일들이 지금의 태오 경을 만든 거니까, 저는 탓하지 않아요.”
미르나의 자비로운 말에 엘가가 몹시도 발끈했다.
“뭐야, 지금 너만 혼자 점수 따겠다 이거야? 나 혼자 남자 과거에 질투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저한테는 전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도 말 안 해줬었잖아요.”
그때 스타노이를 목마 태우고 있는 스텔라가 이야기에 끼어든다.
“나는 못 들었어도 어렴풋이 예상은 했는데. 태오 군은 능력 있고 귀엽잖아. 우리 만나기 전에 다른 여자와 사귀었더라도 이상하지 않지.”
개방적이고 장수하는 엘프답게 마음이 열려있구나. 나중에 스텔라 차례의 밤이 되면 여러모로 보답을 해줘야지 마음먹게 된다.
영애들은 한참 그 뒤로 자신들끼리 열 띈 토론을 벌였다.
나름대로 심각하면서도 우스운 그 상황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게임기를 쥐고 있는 마르마르와 그 옆에서 떠들고 있는 레오노이가 보였다.
“거기서는 파괴광선을 사용하는 것입니닷…!”
“이렇게?”
“아앗-! 이번에도 급소에 맞춘 것입니닷…! 마르마르는 굉장한 것입니닷…! 주머니 마스터로서의 소질이 보이는 것입니닷…!”
평화롭다.
이 세상은 이렇게나 평화롭고 즐거운 곳이다. 대학로를 걷고 있으니 대학생으로 돌아온 기분도 들고. 또 청춘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에 삶이 충족되는 듯한 기분도 느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어째서 그렇게 치열하게 인상 찌푸리면서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내 옆에서 내 웃음을 찾아준 가족들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가족들과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생각에 나는 말했다.
“그럼 대학생들이 흔히 놀러가는 곳으로 가볼까요? 근처에 동물원 있는데. CC들은 거기서 데이트 많이 한다고 들었거든요.”
“태오 군은 가본 적 없어?”
“없어요.”
나도 가본적은 없다. 동물원을 혼자서 갈 만큼 담이 크지 않기도 했고. 겨우 사귄 여자친구와는 동물원에 가보기 전에 차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는 가보기 전에 차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을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대학로에서 파는 토스트로 점심을 해결하고, 제법 큰 승합차를 렌트해서 근처의 동물원으로 향했다.
동물들이 잔뜩 있는 곳에 오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야옹이와 잉잉이가 마구 이리저리 날뛴다.
━야오옹.
━규이잉.
“이제 숨길 생각도 없구나, 너희.”
나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동물원에 입장해서 여기저기 봄볕 아래 나른히 누워 있는 동물들을 구경했다. 다들 동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동지, 이거 봐! 여기 컹컹이들이 잔뜩 있어…!”
“걔네는 개다람쥐가 아니라 그냥 다람쥐야. 컹컹 짖지 않아.”
“세상에, 다람쥐들이 컹컹 짖지 않으면 대체 무슨 소리를 낸다는 거야…!? 끔찍한 세상이야!”
나도 모르겠다. 다람쥐는 무슨 소리로 울지?
그러다가 말들을 보고 있을 때 미르나가 물었다.
“말들이 정말 많네요. 혹시 유니콘도 있나요? 저는 유니콘 보기를 좋아하거든요. 우아하고 기품있는 동물들이잖아요.”
“유니콘은 없는데요.”
“세상에, 동물원에 유니콘도 없다니. 그럼 페가수스는 있나요?”
“그것도 없는데요.”
“목이 길고 뿔이 두 개나 달린 기린도 있으면서 겨우 머리에 뿔 하나 달린 말은 어째서 없는 거죠?”
미르나는 몹시도 실망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미르나의 기분을 띄워주고 이 21세기 동물원의 대단한 점을 알려줄까 싶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다.
“유니콘은 없어도 그 대신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기 동물원에는 오리너구리가 있어요.”
“오리랑 너구리랑 합친 상상속의 동물이죠?”
미르나는 웃기는 농담이라는 것처럼 픽-웃었다.
“거짓말 말아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작은 미르나라면 모를까 저는 그런 것에 속을 나이가 지났어요.”
그러자 나르미가 흐흐-웃는다.
“그러는 것치고는 언니, 아까 전에 자동차 탈 때 신발 벗고 타야 한다고 하는 거 믿었잖아.”
“조, 조용히 해…!”
아내들이 투닥 거릴 즈음 내 머리에 무언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저쪽 세상에는 없고 이쪽 세상에는 있는 것.
그 힌트를 떠올린 것만 같았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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