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68)
EP.69)드리우는 그림자 # 5
069 – 아크에 드리우는 그림자 # 5
좁은 석벽의 복도를 지나치자 넓은 광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타났다.
굵은 기둥이 높은 천장까지 쭉쭉 솟아있는 넓은 공터.
물론 햇볕도 들지 않고 횃불이나 등불 같은 것도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둠만이 뻥 뚫린 사방으로 물밀 듯이 들이닥치고 있을 뿐이다.
이 낡은 성채에 이렇게 넓은 공터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나는 이곳이 뭘 위한 공간일까 생각해봤다.
기름 냄새가 나는데.
“그아아악-!”
그때 비명을 지르며 괴한이 엘가를 향해 덮쳐들었다.
물론 엘가는 황소처럼 돌진해오는 그 몸을 슬쩍 옆으로 피하며 그대로 무릎을 놈의 복부에 꽂아 넣는다.
퍼억.
“겍-!”
바닥으로 털썩 쓰러진 사람의 머리통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엘가가 말했다.
“우리가 한 열 다섯 명 쯤 쓰러트렸나?”
“저희 수강 인원이 스무 명이라고 했으니까. 저와 미르나 님을 빼면 앞으로 세 명 정도 여기 더 있을 수도 있겠네요. 후-.”
나는 호흡을 골랐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지끈거리는 두통이 머릿속을 안개처럼 뿌옇게 만든다.
내 주문을 열 번 정도 사용했으니 이제 슬슬 나의 마력적인 한계도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실전에서 마법을 사용하니 내 마법의 위력과 한계에 대해서 확연히 알게 됐으니까.
내 마법 파이몬은 일종의 샷건과 같았다.
공기의 탄환으로 된 샷건.
가까이 있을수록 위력이 증대되고, 멀리 떨어질수록 그 위력이 떨어지는 샷건 말이다.
임프 꼬리 완드로 위력을 약화시켜 안정성을 높인다고 해도 이걸 가까이서 맞으면 사람의 뼈를 부수고 내장에 커다란 손상을 입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 걸 머리에 맞춘다면 당연히 죽는 목숨이고.
고작 2위계 정도에 오른 마법사의 마법 솜씨로도 이 정도라니. 그렇다면 10위계에 달했던 앙그마르 마왕의 주문 ‘파이몬’은 대체 어땠을까?
그런 마왕을 제압한 네 가문의 용사들은 대체 뭐였던 거지?
아무튼.
나는 공격 마법을 열 번 정도 쐈다. 내 어림짐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두 번 정도 영창을 하는 것이 한계라는 기분이 든다.
마나 오링이 거의 다 됐다는 소리.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겪으며 이게 아마 상대의 노림수였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이렇게 자신이 유리한 장소로 우리들을 초대해서 천천히 소모시키는 것이 발란 교수의 목적이지 않을까?
나라도 계속되는 전투에 지친 상대를 급습하는 전략을 택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지친 것은 나 뿐으로 엘가와 미르나는 상당히 쌩쌩했다. 역시 나랑은 실전의 레벨이 다르구만.
엘가가 리오네스 가문의 보물인 거대 할버드 분쇄자를 꺼내들며 말했다.
“그래서 미르나. 여기가 맞냐? 뭐 느껴지는 거 있어? 얼른 끝내고 저녁이나 먹자고.”
“여기 어딘가에 있습니다. 제 아버지의 기운이 여기 어딘가에서 느껴져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야, 태오. 주변을 밝히는 섬광 마법 같은 건 못 쓰냐?”
“그런 건 못합니다.”
“쯧-.”
못하는 걸 어떻게 해.
하지만 이런 건 할 수 있었다.
스르륵.
나는 침착한 사고를 유지하며 주변으로 귀를 기울여 봤다.
나, 태오의 귀는 남들의 배 이상 청력이 좋다.
그래서 이렇게 넓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있다면 그것을 간파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런 나의 귀에 마침내 무언가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Bul’s Jack.
동시에 화르륵-하고 커다란 불덩이가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화염구-!? 다들 내 뒤로 피해!”
엘가가 깜짝 놀란 것처럼 소리쳤다. 그에 나도 미르나도 엘가의 등 뒤로 숨는다.
엘가는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수박만한 불덩이를 향해 도끼를 들어올렸다.
그것을 힘껏 내려치자 스릉-하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잘리는 소리와 함께 불덩이가 반으로 쪼개져 좌우에서 펑펑 커다란 폭발을 일으킨다.
쾅, 쾅-!!!
화르르르-.
그것으로 주변 일대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아까부터 은은하게 나고 있었던 기름 냄새가 원인이었을까?
화르르르르-.
타오르는 불꽃은 마치 무언가를 그리듯 동그랗게 이어져서 불길의 벽을 이뤄낸다.
나는 그게 일종의 마법진 혹은 주술진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마법진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 검은 그림자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좀비와 스켈레톤 같은 망자들이었는데. 아까 전 만났던 아크의 학생들과는 다르게 부패도 살기도 장난 아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미르나 드레이코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삼촌-. 고모.”
엘가가 사방으로 거대한 할버드를 겨누며 묻는다.
“아는 시체들이냐?”
“드레이코 가문의 시체들입니다. 저희 무덤이 아주 파헤쳐진 모양이네요! 보통 언데드들과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조심해야 해요!”
“아-. 이래서 드레이코 놈들이 싫어. 죽어서도 말썽을 부리잖아. 그래서 미르나. 뭐 좋은 방법 없어? 이대로 포위 되서 싸워야 하냐?”
“방법….”
“나 혼자라면 충분히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데. 내가 너희까지 지킬 만큼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아.”
엘가의 눈은 공중에 붕 떠올라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하얀 백발을 늘어뜨린 검은 로브의 언데드.
고위 리치 알레이스터 경이었다.
━Itum kalli. Hur Bolt Jack.
화르르르.
고위 리치의 앙상한 양 손에 푸른 불꽃이 일렁인다. 며칠 전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저 손으로 내게 사탕을 주었었는데.
━Exack Skarrrrr…!
이제는 정체 모를 발란 교수라는 강령술사에게 통제권을 빼앗겨 말 그대로 산자들을 살육하는 터미네이터 같은 도구가 되었을 뿐이었다.
“솔직히, 저걸 어떻게 이겨야 할지 모르겠네. 우리 아빠만큼 강해보이잖아.”
엘가는 알레이스터를 보며 자신의 아버지인 라인하르트 경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라인하르트와 알레이스터 둘은 호적수이고 동기였다. 그렇기에 엘가는 아버지인 라인하르트의 실력을 가늠하며 알레이스터의 전투력을 측정했을 터.
“야, 드레이코. 너희 아빠한테 뭔가 약점 없냐? 리치라면 라이프 베슬 같은 거 있잖아. 영혼을 숨겨 놓는 유골단지 같은 거.”
“알레이스터 드레이코는 저희 가문 최고의 역작입니다. 그런 뻔한 약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럼 저걸 어떻게 쓰러트려야 하는데? 내가 베어 내봤자 계속 살아나는 거 아냐?”
“만약 약점이 있다면 조종하고 있는 술자겠죠. 발란 교수를 찾아야 합니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에요. 저는 그 동안 가능하면 통제권을 되찾아 볼게요.”
━그르으아악-!
그때 우리를 향해 드레이코 가문의 좀비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좀비답지 않게 매우 빠르고 날렵했다.
“여기서, 얼굴도 모르는 교수를 찾으라고?”
스릉, 촤아앙-!
엘가가 거대한 할버드를 휘둘러 드레이코 가문의 좀비들 몸통을 반으로 잘랐다. 거대한 도끼가 휘둘러 질 때마다 팔과 다리가 사방으로 튀며 피와 시체의 파편을 만들어낸다.
“별 거 없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엘가를 향해 무언가 중얼거리는 엘드리치 알레이스터.
━Halo Dasi Tumb!
동시에 그의 손에 일렁이던 푸른 불꽃이 더욱 커다랗게 타오른다. 뭐가 됐든 별로 좋아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우뚝 멈춘다.
━Grrrrrr.
“죽음은 끝과 안식이 아닌 시작이리니-.”
미르나 드레이코가 무언가 기도문 같은 주문을 읊는 게 효과가 있는 탓이겠지.
“뱀과 용이 비늘과 허물을 벗듯 새로운 삶과 나선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라. 가라사대-.”
━Grrr….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무래기들이, 끝도 없네! 뭐든 좋으니까 빨리 좀 해 봐라!”
사방에서 밀려닥치는 좀비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엘가.
“그러므로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걸을 지라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우는 마귀들의 목을 잡을 것이고….”
━Grrrrrrr…!
자신의 아버지를 제어하려는 미르나.
둘은 모두 자신이 맡은 일로 무척 바빠 보였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디선가 조종하고 있을 본체, 발란 교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이다.
“후-.”
호흡을 고른다.
내가 알기로 언데드를 부리는 강령술사는 자신의 졸개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 해야만 한다고 들었다.
망자들과 너무 거리가 멀어지면 통제권을 잃고, 너무 가까우면 굳이 졸개들을 부려 대신 싸우게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이 어둠속 어딘가에 발란 교수가 숨어있다는 말일 터.
어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한 번 허공에 대고 외쳐볼까?
“발란 교수! 썩 모습을 보이시죠!”
━푸흐흐흐, 애처롭구나. 어린 계집들아. 저항해봤자 소용없다.
이 넓은 공간을 울리는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스르륵-하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검은 로브를 몸에 걸치고 있는 발란 교수였다.
손에는 십자가 모양의 단검과 긴 스태프가 한 손에 하나씩 쥐어져있고, 목에는 굵은 쇠사슬이 목걸이처럼 감겨 있다.
“자,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어떻게 할 테냐?”
뭐야, 진짜로 내가 불러서 나온 건가?
교수가 말했다.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 무용. 불필요. 헛된 일. 너희들이 발악해도. 장벽은 무너진다. 장벽 너머로 외면하고 있던 악의가 세상을 잠식할 거야.”
강의 시간에 말을 더듬었던 것과 다르게 발란 교수는 음침하지만 유창하게 말을 했다. 엘가가 그 이야기를 받는다.
“장벽? 뭔 뜬금없이 장벽 타령이야? 미쳐버린 흑마술사였잖아?”
엘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만 나는 좀 그것을 다르게 들었다.
장벽이 무너진다는 말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이라의 처형 이후 찾아오는 소설의 에피소드 2부.
북쪽의 장벽이 무너지고 그로부터 밀려오는 어둠의 군세를 막기 위해 용사 교육기관 아크가 최후의 보루가 되어 싸우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아이라가 원작의 스토리대로 처형당하지 않는 이상 장벽이 무너질 일은 없다. 그런 설정이니까.
그때 미르나가 소리쳤다.
“발란 교수! 이제 그만 항복하고 저 미르나 드레이코의 소유물들을 돌려주세요!”
그에 흐흐흐-웃는 교수.
“발란 교수? 그런 멍청이는 이제 없어. 이건 껍데기만 남아있을 뿐. 제법 저항을 했었지만. 이제 정말 껍데기 뿐이다.”
“발란 교수가 죽었다는 말인가요?”
“비슷하지. 이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강령술조차 못하는 드레이코의 반푼이. 그리고 조상의 성물을 다루지 못하는 리오네스 애송이….”
스르르.
발란 교수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너는 누구지?”
“태오 가스펠인데요. 교수님 강의도 듣는데 모르십니까?”
“모른다. 그보다 님프인가? 이제야 알겠다. 하찮고 쓸모없는 요정이로구만.”
너무해.
“흐흐흐, 아무튼 너희로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는 가미긴. 마왕 솔로몬의 4석. 위대한 강령술의 주술, 가미긴이니까.”
“가미긴…!?”
미르나가 깜짝 놀란 듯이 소리쳤다. 그에 엘가가 묻는다.
“그게 뭔데?”
“마왕 솔로몬의 주술입니다! 스스로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4개의 대주술…. 그 중에 하나에요!”
“그게 뭔 소리야? 마왕 솔로몬은 토벌 됐잖아. 그럼 녀석이 남겼던 주문도 다 없어졌던 거 아냐?”
엘가는 이야기를 하며 여유롭게 망자들을 난도질했다.
━그르에에엑….
━히에으….
엘가가 잔뜩 베어냈던 드레이코 가문의 망자들은 어느새 모두 난도질당해 바닥을 뒹굴고 있는 상태.
그렇지만 아직 강력한 사령술사인 알레이스터와 자신을 가미긴이라고 밝힌 발란 교수는 멀쩡히 존재하고 있었다.
저들이 다시 주문을 읊으면 망자들은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 움직이겠지. 그게 강령술사와의 싸움이니까.
다만 발란 교수, 아니 가미긴은 우리를 곧바로 쓰러트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마왕 솔로몬이 죽었다고? 앙그마르의 피가 끊겨? 웃기는 일이야. 앙그마르는 살아있다. 내가 아직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헛소리!”
엘가는 들을 것도 없다는 것처럼 으르릉거렸다. 하지만 미르나 드레이코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아주 파랗게 보일 정도였다.
“미르나 드레이코. 너라면 알고 있겠지. 너희 가문은 알고 있었잖아. 앙그마르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걸.”
“…그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엘가는 믿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그에 가미긴이 깔깔 웃는다.
“드레이코 가문은 알고 있었어. 앙그마르의 의지가 결코 끊기지 않았다는 걸. 모르겠으면 물어 봐. 나보다 더 잘 알테니까. 흐흐흐.”
“야, 그게 무슨 소리냐?”
엘가가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되물었다. 피 묻은 엘가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혹감 그리고 불신이 아른아른 비추고 있었다.
나는 이게 저 가미긴이라는 녀석의 노림수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엘가와 미르나를 이간질하는 것 말이다.
그렇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앙그마르의 의지가 살아있다니?
날 말하는 거 아냐?
나밖에 없다.
내가 앙그마르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시스템이 못 박고 있으니까.
하지만 드레이코 가문이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니…?
아니,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빨리 해명해 봐! 앙그마르가 살아있다니. 그리고 그걸 숨겨? 너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는 거냐?”
스륵.
엘가는 미르나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나 미르나는 반항할 것도 없이 태연히, 마치 언젠가 왔어야 할 것이 오고 말았다는 것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죠. 사실입니다. 앙그마르는 살아있어요. 정확히는 마왕의 핏줄이…. 금지된 유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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