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00
당문전생 (99)
사인교자(四人轎子)와 여인
젊은 거지가 엄지를 우뚝 추켜세웠다.
“서안이란 동네는 거만하게 뒷짐 지고 헛기침이나 툭툭 내뱉으면서 군자연하는 정파의 바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동네거든.”
당찬일에게로 몸을 숙인 젊은 거지가 슬그머니 어깨동무를 했다.
“내가 이래서 당문을 좋아한다니까? 예로부터 우리 개방과 당문은 비슷한 구석이 많거든. 몸은 정파 쪽에 기울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자유롭다든가, 무림맹의 케케묵은 관습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든가.”
개방은 구파일방에 속해서 몸이 정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당문은 아니다.
당문은 모든 면에서 정파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모두가 당문을 정사 중간의 세력으로 인식한다.
괜히 당문과 친한 척을 하면서 젊은 거지가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겼다.
“내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무림맹 섬서 지부장인 작랑이란 작자도 하는 짓거리를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거든. 누가 사파인지, 누가 마도인지 알 도리가 없다 보니 전전긍긍 눈치만 살핀다니까?”
당찬일이 고개를 돌려서 혼자 신이 난 젊은 거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입만 털지 말고 직접 나서 보든가.
“아하하…… 하하…….”
당찬일의 어께에서 슬그머니 손을 내린 젊은 거지가 뻘쭘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하하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거지들은 친화력 하나로 먹고사는 종자들이라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이곳을 지나치곤 하지.”
나름 열과 성을 다해서 변명했지만 당찬일의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젊은 거지가 다시 떠들었다.
“우리가 제일 피하는 게 쓸데없는 다툼이라니까? 그래서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우리 개방도 서안에선 성질을 죽이는 편이라오!”
개방의 비겁한 태도를 열심히 해명하는 젊은 거지를 멀거니 응시하던 당찬일이 태평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식.
젊은 거지는 당찬일에게 서안에서 벌어지는 정사마의 세력 싸움을 파헤쳐 보라고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헛웃음을 흘리던 당찬일이 문득 병법 삼십육계 가운데 하나의 전법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그건 바로…….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 * *
따각따각―.
서안에서 달린 마차가 아미산의 초입에 이르자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낙산사태가 젊은 거지에게 불쑥 물었다.
“전했는가?”
“대충이요.”
“뭐라던가?”
“웃더군요.”
“걸물답군.”
“그러게요.”
단문과 단답으로 무심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동감합니다.”
낙산사태와 젊은 거지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불법을 전하는 비구니가 백주에 살해당하지 않나, 신성한 도장(道場)을 범하는 자가 있지 않나. 대체 무슨 말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무슨 말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사태께서 정확히 파악하시고 계실 텐데요?”
천장을 보며 젊은 거지가 피식 웃자 낙산사태가 혀를 끌끌 찼다.
“허이구, 귀신은 뭐 하나. 저 버르장머리 없는 비렁뱅이를 안 데려가고?”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귀신은 태업을 일삼나 봐요.”
젊은 거지의 밉지 않은 너스레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낙산사태가 곧 침중한 얼굴이 되었다.
“려군이가 강호에 다시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모르겠네.”
“사태께선 아미파를 찾아온 사람이 사신이라고 단정 지으시는군요?”
“암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려군이를 몰라봐서는 안 되지.”
낙산사태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젊은 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짓궂은 젊은 거지라도 이런 순간까지 장난을 칠 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 아이는 세상으로 왜 다시 나온 걸까? 아니…….”
낙산사태의 시선이 물리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을 향했다.
“왜 떠났던 걸까?”
잠시의 침묵.
낙산사태는 조용히 휘몰아치는 침묵의 바다로 발을 담갔고, 젊은 거지는 그녀의 상념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숨마저 작게 내쉬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낙산사태가 고개를 미미하게 흔들면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아무튼 려군이가 재출도를 했으며 불법을 전하는 우리 제자들이 살해를 당했어. 거기다 얼마 전에는 청성에서도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군.”
“그 소식은 저 역시 들었습니다. 당찬일 소공자를 납치했던 정체불명의 무림인들이 청성의 뇌옥에서 상잔을 벌여 모조리 죽었다더군요.”
“그 시주들이 아마 백일야 소속이었다지?”
낙산사태가 쳐다보지도 않고 묻자 젊은 거지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모르시는 게 뭡니까?”
“아는 거 빼고 전부.”
콕콕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낙산사태를 젊은 거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곁눈질했다.
아미는 정보력이 뛰어난 문파가 아니다.
그런데 저 온화한 노비구니는 모르는 것이 없다.
‘심지어는 우리 개방에서도 긴가민가하는 내용까지 들여다보는 눈치니, 원.’
술이라도 있었으면 한잔 빨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손을 꼼지락거리던 젊은 거지가 낙산사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공자가 사옥정에 관한 언급을 하더군요.”
“흐음.”
젊은 거지가 당찬일과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낙산사태가 큰 숨을 내쉬었다.
“정파의 보물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으니 사파의 귀보도 나타나야 균형이 잡힌다…….”
당찬일의 말을 곱씹던 낙산사태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밝음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어둠이 뒤따른단다.
이는 음양설(陰陽設)의 기초 중의 기초지만 고작 열다섯 소년이 떠올릴 법한 생각은 아니다.
“음양은 상호대립(相互對立)하면서도 결국에는 상호의존(相互依存)하나니…….”
낙산사태가 고즈넉하게 중얼거리자 젊은 거지가 늙은 비구니의 고등 철학을 받았다.
“내가 나인 것은 나 아닌 네가 있기 때문이다. 현상세계 모든 것에는 그 대(對)가 되는 상대(相對)가 있다.”
다시 낙산사태가 젊은 거지의 이론을 받았다.
“우리는 반대와 모순의 대, 상대를 기다리는 대대(待對)의 존재이다.”
잠시 숨을 멈추었던 낙산사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의 상대가 있음으로써 나이다.”
음양설을 총체적으로 떠올린 낙산사태가 고개를 돌려 서안 방면을 응시했다.
“잠잠하던 서안에 풍운이 몰아치려나.”
* * *
―공자님.
어디선가 고혹적인 음성이 들려와 당찬일은 실눈을 떴다.
‘뭐지?’
잠에서 깨어난 당찬일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방은 아직 정돈하지 못한 짐들과 어제 풀어 놓고 정리를 시작한 서적들이 뒤섞여 다소 난잡할 뿐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당찬일이 다시 몸을 누이려는 순간 예의 속삭임이 그의 귓전에 내려앉았다.
―공자님.
이번엔 확실히 들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 자신을 불렀다.
더군다나 이 전음술(傳音術)은 육합전성(六合傳聲)과 더불어 최상승 경지라 일컬어지는 어기전성(御氣傳聲)이 아닌가.
‘대체 누구지?’
정신을 차린 당찬일이 몸을 일으키자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지부 앞 공터에서 뵙겠습니다.
초대치고는 고압적이고, 강압치고는 정중하다.
“흠.”
이 모순적인 초청에 침음을 삼킨 당찬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르륵.
지부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공터로 나간 당찬일을 맞이한 건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와 사인교자(四人轎子)였다.
‘대단하군.’
네 명의 가마꾼들은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형형한 눈빛을 빛냈기에 당찬일은 내심 긴장감을 올렸다.
이 정도의 기도를 발산하는 자들이라면 능히 일류를 넘어서는 고수들일 거다.
‘설마 안개도 가마꾼들이 불러왔다는 건가?’
안개는 당문 서안지부 앞의 공터에만 머물렀기에 당찬일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가마꾼으로 신분을 위장한 사람들은 고수다. 일류를 훨씬 상회하는 무인들이란 말이다.
저런 자들을 고작 가마꾼으로 쓰는 집단은 대체 어디일까?
당찬일이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데 그의 앞으로 어떤 인영이 꿈결처럼 다가왔다.
“천녀(賤女)가 당찬일 공자님을 뵈어요.”
궁장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이십 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대단하군.’
폭발적인 아름다움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여인은 고혹적인 눈매와 불처럼 뜨거운 입술을 지닌 미인(美人)이었다.
거기다 몸매.
여인의 몸은 말 그대로 호리병처럼 풍성하면서도 잘록해서 보는 이의 가슴을 진탕시키기에 충분했다.
여인은 경국지색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용모에 넋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매력적인 여인은 어기전성을 구사할 정도로 고강한 무위를 지닌 진짜배기 무인이란 말이다.
“당신들은 나를 정확히 알고 있군요.”
당찬일이 묻자 여인은 다소곳이 포권했다.
본래 포권이란 무인들이 나누는 격식이라서 딱딱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인이 취하니 어딘지 모르게 야들야들해졌다.
“최연소 어전호위를 역임하신 당문의 당찬일 공자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당찬일이 입꼬리를 올리며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덧붙이듯 물었다.
“성도부엔 언제 방문했었소?”
당찬일이 기습적으로 묻자 여인이 흠칫 놀랐다.
“얼굴을 알아야 신분을 맞춰 볼 수 있는 법. 당신들이 성도부를 찾지 않았으면 어찌 내가 당찬일이란 걸 알 수 있었겠소?”
당찬일의 질문은 자못 예리했기에 여인이 얼른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런 야심한 시간에 나를 찾은 연유가 무엇입니까?”
당찬일이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으면서 묻자 여인이 귀밑으로 내려온 머리칼을 매만졌다.
“아…….”
여인이 손가락을 놀리자 기이한 염기(艶氣)가 전달되어 머리가 띵해졌지만, 당찬일은 그녀의 유혹어린 몸짓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 염혹수(艶惑手)는 일류 고수들이라도 단숨에 굴복시킬 정도인데, 역시 흠차대인의 눈에 들 정도의 저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으리라.
여인이 염혹수를 쓰자마자 당찬일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발하여 그녀의 색기(色氣)를 때로 흩어버리고, 때로 밀어냈다는 것을.
그의 눈은 모든 것을 한발자국 떨어져서 보기에 여하한의 유혹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염혹수라는 희대의 섭혼술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찬일이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자 적이 감탄한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과연 듣던 대로 영민한 분이신 것 같으니 돌려 말하지 않겠어요.”
전신을 타고 흐르던 염기를 씻어 내고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희와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흠.”
제안을 들은 당찬일이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먼저 당찬일은 자신을 곁눈질하는 여인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
‘이 여자는 결정권자가 아니로군.’
만약 여인이 일을 꾸민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굳이 데려가려고 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망울엔 불안감이 조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대기 중인 사인교자.
‘나를 납치하려 들었다면 굳이 사인교자를 동원할 이유가 없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