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03
당문전생 (102)
마성의 아름다움
동모가 당찬일을 환자의 옆방으로 인도했다.
“오시었습니까?”
마차의 여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놀라셨지요?”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당찬일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했다.
동모가 당찬일에게 찻잔을 내밀자 여인이 차를 따랐다.
쪼르륵―.
대함에 부족함 없는 모습이었지만 당찬일은 좀처럼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기이한 초대를 받은 것에서부터 전백안의 사내를 만난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까지 도통 오늘 일은 쉬이 넘어갈 일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의원이 아닙니다. 시술을 받고 싶으시다면 당문의 실력 좋은 의원을 소개해 드리지요.”
말을 뱉으면서도 하나 마나 한 소리란 걸 당찬일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무공을 가지고 이 정도의 장원을 소유한 집단이 의원 하나 수배하지 못해서 자신 같은 소년에게 환자를 보였을 리가 없으니까.
“당문에 뛰어난 의원들이 많다는 건 이 늙은이도 익히 알고 있지요. 어지간한 황의(皇醫)보다 나은 분들이 수두룩하다더군요.”
찻잔을 들어 올리는 동모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저희는 반드시 당찬일 공자님이어야만 했습니다.”
동모의 음성은 간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그건…….”
차 한 잔을 입에 머금은 동모가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당찬일 공자님도 오랜 가사 상태에서 깨어나셨다지요?”
그랬구나.
이제야 이들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겠다.
“그렇긴 하지만 환자와 저는 엄연히 상태가 다릅니다.”
당찬일과 환자는 날 때부터 가사 상태에 빠졌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하지만 당찬일은 이 년 전에 깨어났고, 환자는 아직도 그대로다.
당찬일이 속으로 자신과 환자의 차이점을 생각하는데 동모가 나직이 질문을 던졌다.
“소공자님께선 열세 살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실은 열 살 전후로 간혹 정신이 돌아오시곤 하셨다지요?”
쿵!
이런 비밀까지 알 줄이야.
당찬일로서도 이번만큼은 굳는 표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동모의 말처럼 당찬일은 열 살 정도부터 가끔씩 정신을 차렸다가 혼절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기절과 깨어남을 반복하는 삼 년 동안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뒤에야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하지만 이건 본인만이 아는 사실이다.
대체 이들이 어찌 알고 있는 것인가!
‘이건 당문 사람들은커녕 아버지도 모르는 일인데…….’
백안의 사내에게 물음을 들었을 때처럼 당황한 당찬일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동모를 바라봤다.
“불편한 이야기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동모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고 의혹이 풀리는 건 아니니 당찬일은 여전히 무언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가져오너라.”
동모가 명하자 대기 중이던 여인이 커다란 보따리를 다탁에 올렸다.
“보시지요.”
동모가 보따리를 가리키자 당찬일이 그것을 풀었다. 보따리에서 나온 것은 여덟 권의 두툼한 책이었다.
당찬일은 첫 번째 서적을 열었다.
[칠월 십이일.맥박 정상. 호흡 정상.
가끔 몸을 뒤척이지만 아직까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음.]
“이건?”
병상일지(病床日誌).
당찬일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온 다음부터 어째 통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다.
[구월 사일.맥박 정상. 호흡 정상.
눈동자의 움직임이 활발하고 배변, 배뇨 활동도 원활.
하지만 여전히 깨어날 기미는 없음.
십이월 칠일.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말이 부쩍 증가. 극심한 심적 갈등을 겪는 것으로 사료 됨. 아울러 손가락의 경련이 잦아짐.
이대로라면 조만간 커다란 변화가 예상됨.
일월 십육일…….]
“언제부터 나를 관찰했습니까?”
숨을 고른 당찬일이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공자님이 여섯 살 되던 해부터였지요.”
“제 일거수일투족을 살핀 이유는 물론 이 환자 때문이겠군요?”
“극존(極尊)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이들을 수소문하다가 당찬일 공자님을 알게 되었지요.”
극존.
이들은 환자를 극존이라는 말로 높이 칭하나 보다.
동모가 담담하게 인정하자 당찬일이 자신의 병상을 돌보았던 가문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무리로군.’
자신은 무려 십삼 년이나 자리보전을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러 왔는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판국에 병상일지의 기록자를 찾아내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울 터.
기록자를 색출하려던 마음을 접은 당찬일이 일지를 뒤로 넘겼다.
[유월 이십이일.기식(氣息)이 불규칙하고, 안색이 창백함.
온전히 정신을 놓은 사람으로 보기 힘든 상태이지만 다른 반응은 없음.]
자신이 열 살 되던 해의 기록이다.
‘맞아, 이때부터 가끔 정신이 돌아왔었지.’
곧 다시 혼절했지만.
그 뒤로 당찬일이 드문드문 정신을 차린 것이 일지엔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대단히 세심하구나.’
책을 덮은 당찬일이 보따리를 동모에게로 밀었다.
“나를 관찰했다면 그에 맞는 해결책도 찾았을 텐데요?”
보따리의 매듭을 다시 묶은 동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찬일 소공자님께선 삼 년 남짓 혼절과 깨어남을 반복하시다 온전하게 일어나셨지만, 그 이유를 도통 알 길이 없었으니까요.”
힘주어 보따리의 양 매듭을 당긴 동모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공자님을 모신 겁니다.”
동모의 눈동자엔 애절함과 절박함이 듬뿍 담겨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자신도 해답을 모르는 것을.
“미안하지만 저도 제가 어쩌다 그런 상태로 태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죠.”
“뒤척이셨던 삼 년 동안도 떠오르시는 것이 없으십니까?”
이 부분은 있지만…….
“네.”
“하찮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정말로 없었습니까?”
있었다.
“없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서 발생한 부작용으로 가사 상태에 빠졌을 거란 추론을 동모에게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당찬일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렇군요.”
놀랍게도 동모는 어떠한 아쉬움이나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당찬일의 대답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동모가 병상일지를 담은 보따리를 옆으로 치웠다.
“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공자님께 바란 부분은 침상에서 보낸 삼 년의 시간에 대해 듣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럼 무엇을 바라고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걸까?
당찬일이 자신을 응시하자 천천히 일어선 동모가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부디 극존께서 깨어나시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상했던 부탁이라 놀랍지도 않다.
문제는 자신에게 환자를 도울 방법이 전무하다는 거다. 자신은 침 하나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명의도 아니고, 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절한 무인도 아니니까.
“물론.”
난감해하는 당찬일의 표정을 읽은 동모가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께 의술적인 소견이나 의학적인 처치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럼요?”
당찬일이 의문을 표시하자 숨을 들이켰던 동모가 내뱉듯 말을 토했다.
“가사 상태에서 극존이 어떠한 일을 겪으시는지, 그 기억을 일깨워 주시길 바랍니다.”
가사 상태에서 환자가 겪는 일?
“짐작하셨겠지만 극존께선 가사 상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음.”
“가사 상태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를 위로 올린 동모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시지요.”
동모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지어는 당신께서 가사 상태에 빠진다는 자각조차 못 하시는 실정입니다.”
그렇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혼절하는 순간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하물며 기절한 상태에서의 기억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동모의 말을 곱씹던 당찬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다면 상태가 호전되리라고 여기시는군요?”
“맞습니다. 역시 공자십니다.”
진심으로 탄복하며 동모가 포권을 풀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의원과 영약 그리고 추궁과혈을 비롯한 온갖 처치를 했습니다만, 극존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단다.
“여느 때처럼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극존께서 저희에게 들려주실 이야기가 있는 눈치였지요. 그러나 그것을 도통 기억해 내지 못하셨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동모가 설렘을 가득 담아서 당찬일을 직시했다.
“극존께선 그러셨지요. 그것만 떠올리면 멋들어진 일이 벌어질 거라고,”
당찬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그 말 하나만 믿고 이 수선을 부린다고?
환자가 오랫동안 차도를 보이지 않아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가 본데, 그런 마음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당찬일의 표정을 읽었을까.
꿈꾸듯 뇌까리던 동모가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압니다. 제가 몽상가처럼 보인다는 걸. 철없는 어린아이보다도 사리 분별을 못 하는 늙은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요.”
동모의 웃음은 어쩐지 애잔해서 지켜보는 당찬일의 마음 한구석에도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극존의 사라진 기억이야말로 저희의 마지막 동아줄인데.”
몰락하는 왕조를 어떻게든 지켜 보려 안간힘을 쓰는 늙은 충신.
‘역시 이들은…….’
환자에 대한 동모의 충정을 보노라니 이들의 정체가 얼핏 유추되었다.
하지만 당찬일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만약에라도 거래가 불발되면 이들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우는 편이 나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이 문제는…….”
이때 건넛방에서 옅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쿠, 쿨럭! 쿨럭! 동모.”
벌떡!
와장창!
동모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기에 찻잔이며 주전자를 비롯한 다기(茶器)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는 이런 것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극존!”
벌떡 일어난 동모가 환자의 방으로 가려고 문을 잡았다.
“손님도…… 모시고 오세요.”
꿈틀!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준 동모가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환자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에 앉은 채로 동모와 당찬일을 맞이했다.
‘어떻게 이런 사내가 있을 수 있지?’
당찬일이 입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혀를 막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사내, 환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전백안일 때의 사내는 눈동자가 온통 하얘서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정상적으로 돌아온 지금은 달랐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전부 간직한 존재가 있다면 단연코 사내를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허리까지 내려온 풍성한 백발은 고고한 자태를 풍겼고, 다소 야윈 얼굴과 몸은 동정심을 넘어서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윽한 눈동자와 백설보다도 고운 피부.
그리고 화룡점정과도 같은 연분홍빛 입술까지 어우러져 사내는 그야말로 퇴폐미의 극한을 선보였다.
‘이거 미모로만 말하자면…….’
미모로 천하를 홀렸던 당숙정보다도 아름답다.
하얀 피부, 눈처럼 하얀 머리, 심지어는 눈썹마저 하얘서 모든 것이 순백인 빙정(氷晶)의 사내.
이런 경우를 두고 마성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