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09
당문전생 (108)
꿈결 속에서 걷는 길
환자가 짐짓 인상을 구겼다.
“우린 초면이었는데?”
내 말이.
“거기다 그때는 내가 그대를 볼 수도 없었는데?”
그러니까 말이외다.
“생면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런 말을…… 가만?”
무언가를 깨달은 환자가 돌연 당찬일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의 외관이 아니라 내면의 무엇을 감지하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도 몰라요!”
참으로 대단한 발견을 하셨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떠올릴 법한 추리를 기발하다는 듯 늘어놓은 환자를 보노라니 어쩐지 안쓰러워서 당찬일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나는 그대의 무엇을 감지했던 걸까? 냄새? 분위기?”
팔짱을 끼고 고심하던 환자가 피식 웃었다.
“천천히 찾아보도록 합시다. 시간은 많으니까.”
* * *
그 뒤로 당찬일은 전백안의 사내를 세 차례 더 만났다.
명목은 ‘꿈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사내의 기억’을 현실 세계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목 자체가 뜬구름 잡기다 보니 진척은 형편없었고, 결과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가끔은 두려워요.”
전백안의 미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라도 내가 꿈결 속에서 그릇된 길을 걷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견딜 수가 없어요.”
사내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거거든.”
꿈결 속에서 그릇된 길을 걸을까 두렵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 * *
당찬일이 혈해지사의 사건 현장을 방문해서 무림맹의 심기를 건드린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은 예상보다 빨리 움직였다.
무림맹의 입장에선 그만큼 당문이 껄끄러웠다는 얘기일 거다.
무림맹의 무인들이 몰려오자 당인이 서둘러 그들을 맞이했다.
오라는 수련생들은 안 오고, 웬 무림맹이란 말인가?
“이 사람이 당문의 서안 지부를 책임지는 당인이라 하오이다. 무슨 일이시오?”
당인이 나서자 선두에서 무인을 지휘하던 사람이 그를 보고 급급히 포권했다.
“위명도 드높으신 당인 대협이로군요! 소인은 무림맹 서안 지부의 작랑이라고 합니다.”
작랑은 무림맹의 서안 지부장이다.
한마디로 서안 지부를 총괄하는 자가 바로 작랑이란 소리다.
필요 이상으로 당인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작랑.
본래 성품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어서 이러는 건지.
“아, 무림맹의 서안 지부장이셨구려. 그래, 지부장께서 우리 당문엔 어인 일이신지?”
당인이 묻자 양손을 비비며 작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글쎄, 귀문의 젊은 영재들이 야심한 시간에 저잣거리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신고가 들어왔지 뭡니까?”
“우리 당문 아이들이 밤에 저자에서 난동을 부려요?”
“그렇습니다. 뭐, 작은 소란 정도야 제가 어떻게든 손을 쓰면 무마할 수 있는 부분인데…….”
당인의 눈치를 살피며 작랑이 입술을 쭈뼛거렸다.
그가 뜸을 들이자 속이 답답해진 당인이 자신의 가슴이라도 칠 표정을 지었다.
“또 뭐가 있습니까?”
“아니, 그것이, 음…….”
말꼬리를 엿가락처럼 늘이던 작랑이 털어놓듯 입을 열었다.
“현장에 우리가 수배령을 내린 아이도 동석했다고 해서…….”
무림맹서 수배령을 내린 아이.
진소운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럴 리가?”
정문 앞이 시끌벅적해지자 당문의 의원들 그리고 젊은 교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누가 야밤에 시전 저자에서 난동을 부렸다나 봐.”
의원으로 차출된 인원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기에 바빴고.
“아이, 씨.”
“대체 무슨 일이람?”
젊은 교관들 가운데서는 짜증 섞인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는 이들과 작랑이 뭐라고 하든 열심히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지부장께서 말씀하신 아이가 진소운이요?”
“그렇습지요.”
양손을 맞잡은 작랑이 비굴한 웃음을 짓자 당인이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에 소운이를 데리고 외출한 사람이 있느냐?”
당인이 엄하게 묻자 절은 교관 몇몇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당인과 작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론 당인을 힐끔거릴 때는 미안함과 면목 없는 눈이었고, 작랑을 직시할 때는 분노와 울화를 녹인 표정이었다.
“저희입니다, 지부장님.”
이들의 말을 빌자면 어젯밤, 진소운이 동성반점의 국수가 너무나 먹고 싶다고 교관들을 졸랐단다.
“국수 하나 먹이고 귀환하면 될 것인데 무슨 난동이란 말이더냐? 너희가 얼마나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이곳으로 투입되었는지 정녕 몰랐더냐?”
“난동이라니요, 지부장님! 저희는 말 한마디 덜렁 남기고 소운이를 끌고 가려는 무도한 이들에게서 아이를 지켜 낸 것뿐입니다!”
동성반점에서 한참 국수를 먹고 있는데 열 명가량의 우락부락한 무인이 들이닥쳤단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다짜고짜 진소운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려 해서 젊은 교관들이 소속과 이름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결국 무인들과 충돌한 젊은 교관들은 그들을 가볍게 제압했지만 패퇴하면서 그들은 우리가 누군 줄 아느냐며 두고 보자는 유치한 협박을 남기고 사라졌단다.
“무림맹의 무인들이 우리 교관들에게 관등 성명을 밝히지 않았다는데…….”
“서안에서 수배령을 운운할 집단이 우리 무림맹 말고 또 어디가 있겠습니까?”
슬그머니 당인 옆으로 붙으며 작랑이 아첨을 부렸다.
“으음.”
당인이 인상을 구기자 작랑이 하소연을 늘어놨다.
“그 아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저는 상부의 문책을 받게 됩니다.”
징징징징.
작랑이 찡얼거리자 당인이 눈을 감았다.
난감하다.
서안부의 치안을 관이 아니라 무림맹에서 맡는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무림맹 서안 지부에서 진소운에게 수배령을 내렸다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는 노릇.
“진소운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안심하셔도 좋습니다요. 우리는 저 아이를 보호 차원에서 데려가니까요.”
작랑의 엉덩이에서 없던 꼬리가 솟아나서 살랑거리는 착각마저 일어서 당인이 고개를 저었다.
“알겠소이다. 데려가시구려.”
무림맹의 무인들에게 끌려가는 진소운을 보며 당인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그렇지만 서안부는 서안부의 법칙이 있는지라 거부할 수는 없다.
“설마 무림맹인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 * *
그날 저녁, 대흉이 당찬일에게로 찾아왔다.
“오! 벌써 내가 부탁한 일을 끝낸 건가?”
“뭐, 그냥.”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건가?”
피식 웃던 당찬일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만화루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던가?”
술 먹느라 못 봤다.
“무림인과 관료들이 타인의 눈을 피해 합석하던가?”
노느라 못 봤다.
대흉이 아무런 응대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당찬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날은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나?”
“그렇다고 치자고.”
대흉이 얼버무렸지만 당찬일은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무심히 물었다.
“그럼 그냥 술이나 한잔하고 왔다?”
“어.”
“그랬군.”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찬일이 몸을 돌리자 대흉이 갑자기 생각난 듯 소리쳤다.
“아, 맞다! 그때 말이야!”
“그때?”
당찬일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대흉을 돌아보았다.
“그때라니? 뜬금없이 그때 타령은 왜 하는 거야?”
“뜬금없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때!”
“그러니까 그 그때가 뭐냐고.”
아무리 유도해도 당찬일이 넘어오지 않자 결국 한숨을 팍 내쉰 대흉이 입을 열었다.
“에휴, 그때 있잖아. 나한테 줬던 거.”
어떻게든 돌려서 말하려는 대흉의 속내가 가소로웠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당찬일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동작을 취했다.
“그때는 언제이고, 줬던 건 또 뭔데?”
“아, 진짜!”
복장이 터진다는 시늉을 하던 대흉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한테 육십 냥짜리 전표를 줄 때! 같이 주었던 봉투!”
“음? 아아!”
이제야 기억난다는 표정을 짓던 당찬일이 곧 심각한 표정으로 대흉을 추궁했다.
“설마 그걸 열어 본 건 아니겠지?”
“아, 아니야아! 사람을 뭘로 보고 그래?”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대흉을 바라보던 당찬일의 마음에 작은 파랑이 일었다.
원래 대흉과 하남팔흉은 악한이었다.
살인이나 방화 같은 중한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법과 도덕을 일상적으로 어기는 범법자였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소소한 약속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처지가 되었다.
‘사람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보는 것도 달라진다더니.’
어쩐지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인 것만 같아서 당찬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지 않았으면 됐다.”
당찬일이 시치미를 떼자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던 대흉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근데…….”
짐짓 딴청을 부리면서 대흉이 슬쩍 당찬일에게 물었다.
“거기 뭐가 들었어?”
“말했잖아.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
이미 알아, 이 자식아!
……라고 외치면서 당찬일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울화를 눌러 참은 대흉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뭔지 안 알려 주면 이거 그냥 버릴 거다?”
덩치에 맞지 않게 들러붙는 대흉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당찬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거기 든 건…….”
대흉을 바라보며 당찬일이 빠르게 속삭였다.
“위조 전표다.”
이런 썩을!
당찬일이 확인 사살 하자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대흉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려는 영혼을 가까스로 부여잡느라 무진 애를 썼다.
일부러 가짜를 넣어 두었다니! 실수였기를 바랐는데!
허탈해서 고개를 숙이는 대흉을 곁눈질하며 당찬일이 능청스레 중얼거렸다.
“얼마 전부터 성도부를 중심으로 위조 전표가 돈다는 제보가 있었다. 봉투에 넣어 둔 건 견본품이었고.”
“그런데 왜 열어 보지 말라고 한 거야?”
대흉이 힘없이 묻자 당찬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가짜 전표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했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맡길 수는 없잖아.”
“그렇군…….”
어깨를 축 늘어트린 대흉이 쓸쓸한 얼굴로 돌아서다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만화루라는 홍루 말이야.”
“음?”
“뭔가 있지?”
당찬일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온 대흉이 의뭉스레 물었다.
“네 성격상 어딘가를 콕 짚어서 얘기하면 반드시 이유가 있었거든.”
당찬일을 힐끔거리면서 대흉이 관심을 보였다.
“대체 만화루에 뭐가 있는데 그래?”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대흉을 돌아본 당찬일이 빙긋 웃었다.
“천, 사, 련.”
“히에엑!”
화들짝 돌란 대흉이 미친 듯 뒤로 물러서며 금붕어처럼 입을 끔뻑거렸다.
“처! 처! 처! 천사련!”
버벅버벅 말을 더듬던 대흉이 발을 굴렀다.
“이런 망할! 그딴 말은 안 해 줬잖아! 이제 어쩔 거야! 이제 어쩔 거냐고!”
당찬일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대흉이 마구 말을 퍼부었다.
“아, 미치겠네! 천사련한테 찍히면 숨을 곳도 없다고! 천사련은 무림맹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야! 역시 너랑 엮여서 좋은 꼴이 없어!”
마구 말을 쏟아 낸 대흉이 돌연 몸을 틀었다.
“어디 가려고?”
“알 거 없어! 알 거 없으니까 신경 꺼!”
대흉이 벼락처럼 사라지자 홀로 남은 당찬일이 지나가는 투로 중얼거렸다.
“수고했어.”
대흉이 사라진 쪽을 보면서 당찬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로 들쑤셔 놨으니 만화루의 정체가 천사련이든 무엇이든 간에 곧 움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