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17
당문전생 (116)
깨어나라
파바박!
네 개의 마조 패가 사방으로 꽂히자 자색의 운무 사이로 감(坎), 진(震), 이(離), 태(兌)의 괘가 솟아났다.
번쩍!
사상의 괘가 뚜렷한 형태를 띠며 자리를 잡자 이번에는 다른 네 개의 마조 패를 사유로 던지면서 제갈진수가 낭랑하게 외쳤다.
“사유(四維)의 이름으로 삿된 마음의 찌꺼기를 가둔다!”
또 다른 네 개의 마조 패가 사방의 사선으로 박히자 건(乾), 곤(坤) 간(艮), 손(巽)의 괘가 떠올라서 먼저의 것들과 힘차게 어우러졌다.
“아버지! 이것은……?”
“이것이 충무후(忠武侯)의 진정한 팔진도(八陣圖)이니라!”
제갈세가의 시조는 충무후 제갈량이다.
그가 기관(夔關) 부근 강가의 산기슭에서 육손을 가둘 때 펼쳤다던 팔진도는 고금 제일의 진법이지만 어느 순간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여 후손들도 복원하지 못했는데, 제갈진수의 대에 이르러 팔진도를 되살렸다는 말인가?
쿠르릉!
진법이 노도처럼 굽이치고 뇌성벽력이 용솟음치자 제갈진수가 적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을 되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던가! 수많은 선조들의 피땀을 잡아먹은 진법이 바로 저것이다!”
촤라락!
부채를 꺼낸 제갈진수가 팔진도를 가리켰다.
“엄밀하게 말해서 저것은 육손을 묶었던 팔괘진이 아니다. 충무후께서 북진하시면서 간신 사마의가 보낸 위병(魏兵)들을 패퇴시킨 팔괘진에 가깝지.”
탁!
손바닥을 부채로 두드리며 제갈진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팔진도와 팔괘진은 이름만 다른 동일한 진법으로 알려졌지만 실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부채로 팔진도를 가리킨 제갈진수가 오연하게 외쳤다.
“팔진도야말로 팔괘의 정수를 모아서 만들어진 팔괘진까지 아우른 궁극의 진법이지. 하여 팔괘진에 갇히면 그 무엇도 빠져나갈 수 없다.”
제갈진수가 눈을 빛냈다.
“전설상의 사옥정이라도 가둘 수 있을 거야.”
“사옥정이라고요?”
제갈청청이 깜짝 놀라자 제갈진수가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혈해아가 읊은 시구를 듣고서도 눈치채지 못했느냐?”
제갈진수가 빙글 몸을 돌려 진소운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혈해아는 옥 안의 삿된 마음이 모인다고 했다.”
“옥 안의 삿된 마음[邪獄].”
“그래. 저 아이는 분명 사옥정에 관한 단서를 토설한 것이지.”
제갈진수의 눈이 광기로 얼룩졌다.
“강호의 절대지보(絕對至寶) 가운데 하나인 사옥정에 관해서.”
제갈진수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만박자 기사흔이 남긴 두 구절의 시구가 사옥정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단 두 구절의 시구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노릇.
이때 서안부에서 혈해지사라는 기이한 혈겁이 벌어진다는 것과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체불명의 노인이 알 수 없는 시구를 읊조린다는 제보를 받았다.
“마지막 구절을 듣지 못해서 아쉽지만 결정적인 단서는 얻었으니 됐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진소운을 힐끔거리며 제갈진수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혈해아가 우리 손에 있으니 얼마든지 마지막 시구를 재현할 수 있어!”
제갈진수가 양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달뜬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제갈청청은 부친처럼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쓸쓸히 나뒹구는 이십여 구의 시신. 그리고 수십 조각의 육편이 되어 버린 사촌 오라비.
이들은 자신과 웃고 떠들던 식구들이자 한솥밥을 먹었던 세가원들이었다.
하지만 스무 명이 넘는 가족들이 학살당했는데도 오로지 사옥정만을 갈구하는 제갈진수의 탐욕은 만인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다.
와락!
제갈청청이 고개를 돌려 제갈진수를 외면했다.
‘아버지…….’
하지만 제갈진수는 딸의 태도를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필요한 건 사옥정이었다.
‘나, 난 사옥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시뻘게진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제갈진수가 팔괘진의 중앙이 격렬하게 들썩이자 인상을 구겼다.
“감히 충무후의 절대 진법을 거스르려 하다니. 대체 저놈은 뭐지?”
그리고 꿈결처럼 들려온 한마디.
―알고 싶나?
“헉!”
대경한 제갈진수가 하늘을 우러렀다.
백발 청년은 분명 팔괘진에 갇혔다. 그렇다면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이 음성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너, 너는!”
교교한 밤하늘에 떠 있는 호월.
밝은 달을 맞으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백발의 청년.
시리도록 하얀 백발을 갈기처럼 나부끼며 공중에 머물던 청년이 손을 들었다.
―깨어나라.
두두두두!
심하게 흔들리던 팔괘진이 결국 진의 힘[陳力]과 안에서 발생하는 정체 모를 충돌로 균열을 일으켰다.
쫙! 쫙!
“마, 말도 안 돼!”
안에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해서 종국에는 진 자체가 붕괴를 일으키는 양상이라 제갈진수가 팔괘진을 보수하려고 또 다른 마조 패를 꺼내 들었다.
“사방과 사유가 기세를 잃는다면 음과 양의 기운을 빌어!”
제갈진수가 바닥에 깔린 힘까지 쥐어짜 내는 순간 돌연 비단 폭이 찢어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쫘아아악!
“뭐, 뭐야!”
팔괘진을 통째로 찢어발기면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놀랍게도 백발 청년을 빼다 박은 소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는 자신을 감싼 의복마저 백색이라서 허공에 머무는 백발 청년의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소년.
둘의 차이라면 소년의 연령이 백발 청년에 비해서 열 살가량 어리다는 정도?
팔괘진을 찢고 나타난 백발 소년이 고개를 쳐들자 그의 눈동자도 하얗게 탈색되었다.
번쩍!
“이, 이놈도 전백안!”
백발 소년마저 전백안을 희번덕거리자 얼굴이 핼쑥해진 제갈진수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너희들이 혈해지사를 일으킨 흉수 놈들이렷다!”
백발 청년에 이어 등장한 백발 소년의 존재는 두려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정파를 대표하는 오대세가의 가주답게 제갈진수는 근엄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물론 음성은 살짝 떨렸지만.
“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충무후의 후손인 제갈진수라고 한다! 너희는 소속과 이름을 밝혀야 할 것이다!”
제갈진수의 외침을 듣지 못했을까?
백발 청년처럼 전백안에서 사이한 백색의 기세를 흘리던 소년이 제갈진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저벅.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벌이느냐!”
저벅.
“이런 건방진……!”
저벅.
“에잇!”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제갈진수가 백발 소년에게 그것을 집어던졌다.
쾅!
“에잇! 에잇!”
쾅! 쾅!
“죽어 버려!”
쾅! 우르르, 쾅! 쾅!
무엇을 얼마나 던져 댔는지 몰라도 제갈진수의 전방은 굉음과 폭음 그리고 흙먼지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자! 이제는 끝장났겠지?”
뭉게구름처럼 솟아나는 흙먼지를 응시하며 제갈진수가 이를 드러냈다.
“초열지옥탄(焦熱地獄彈) 하나면 능히 열 명의 절정고수를 상대할 수 있다고 했다! 무려 다섯 발의 초열지옥탄이 동시에 터졌으니 제아무리 악귀라도 버티지 못했을 터!”
초열지옥탄은 폭약으로 유명한 진천벽력세가가 제조한 물건으로서 강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폭약 중 하나로 알려진 기물이다.
“어떠냐! 당하지 못하겠지!”
침까지 흘리면서 폭발의 잔해를 응시하던 제갈진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초열지옥탄으로 인해서 난장판이 되어 버린 지상을 비웃듯 여전히 교교한 밤하늘.
그리고 청년.
백발의 청년은 지상에서의 일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기세로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다.
치렁치렁한 백발을 깃발처럼 나부끼면서.
“어떠냐, 이 악귀야! 네놈이 보낸 소졸은 초열지옥탄의 밥이 되었다!”
제갈진수가 백발 청년에게 삿대질했다.
“아직도 나에겐 일곱 발의 초열지옥탄이 남아 있다!”
제갈진수의 눈에서 피눈물과도 같은 화광(火光)이 흩뿌려졌다.
“네 몫도 남겨 두었다고!”
결의에 찬 음성으로 제갈진수가 외쳤지만 백발 청년은 그의 외침을 귓등으로 흘리는 눈치였다.
아니, 그의 말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발 청년은 가만히 손을 들어서 어딘가를 가리킬 뿐이었다.
그곳은 초열지옥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공터였다.
“피떡이 되어 버린 졸개를 추억하나? 그런 건가?”
제갈진수가 백발 청년을 올려다보면서 광오하게 외쳤다.
“멋 부리지 말고 썩 내려와! 뜨거운 맛을 보여 줄 테니까!”
제갈진수가 소리쳤지만 백발 청년은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스르륵.
어디선가 한 줄기의 구름이 다가와 백발 청년을 감싸자 제갈진수가 길길이 날뛰었다.
“당장 내려오라니까? 이렇게 도망가는 거냐?”
기세가 오른 제갈진수가 큰소리로 외쳤지만 백발 청년을 가린 회백색의 운무(雲霧)는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이때…….
난무하던 흙먼지가 잦아들고, 한 줄기 돌개바람까지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
“뭐, 뭐야?”
인영의 정체를 파악한 제갈진수가 힘없이 뇌까렸다.
“이건 말이 안 돼…….”
초열지옥탄이 폭발하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금강석도 박살 난다고 했다.
하물며 사람의 육신이라면?
뼛조각 하나 남김없이 산화할 것이다!
그러나 백발 소년은 멀쩡했다. 머리와 옷깃만 살짝 그을렸을 뿐, 백발 소년은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기에 제갈진수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저벅저벅.
소년의 움직임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두어 걸음만으로 제갈진수와의 거리를 지척으로 좁혔다.
“익! 이익!”
제갈진수가 다시 한 번 폭탄을 던지려고 했지만 백발 소년이 자신의 면전에 불쑥 솟아오른 형국이라서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정말이지, 이놈들은!”
어떻게든 대응을 해 보려고 발버둥 쳤으나 제갈진수의 노력은 백발 소년의 유령 같은 몸짓에 무위로 그쳐야만 했다.
스르륵.
“헉!”
또다시 자신을 따라붙은 백발 소년 때문에 화들짝 놀란 제갈진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익! 이익!”
제갈진수는 아직까지 품에서 손도 못 뽑은 상태!
화악!
백발 소년의 장심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자 제갈진수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으윽!”
저 손이 움직인다면 참혹한 일이 벌어지리라.
이때…….
짤랑.
어디선가 청량한 방울 소리가 들리며 장내로 누군가가 날아들었다.
쾅!
제갈진수와 백발 소년의 가운데로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인영.
“다, 당신은?”
바로 당찬일이었다.
자연스레 백발 소년의 진격을 막아선 당찬일이 제갈청청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어, 어떻게?’
당찬일은 열다섯이다. 외부적으로 그렇게 알려졌고, 사천성 성도부에서 자신과 손을 섞었을 때도 그 나이의 소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이점이라면 다소 건방지고, 말이 짧았다는 정도?
그런데…….
‘저 아이가 정말로 열다섯이라고?’
말도 안 된다.
지금의 당찬일은 십오 세 소년의 천진함이 아니라 백전노장의 관록을 선보이지 않는가?
제갈청청에게서 눈을 뗀 당찬일이 고개를 돌렸다.
“네가 저들을 살해했나?”
이미 숨진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뒤로하고 당찬일이 묻자 백발 소년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번쩍!
또다시 작열하는 전백안!
백발 소년의 전백안이 당찬일을 단숨에 불태울 기세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