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43
당문전생 (142)
화음대전(畵音對戰)의 종(終)
‘멋지구나.’
자신의 의지를 붓이 아니라 검을 빌어서 화폭이 아니라 자연에 담아낼 수 있다니.
곤룡자의 한 차원 높은 무학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당찬일이 주먹을 쥐었다.
사정은 관전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허어.”
“사관옥(四冠玉)의 무학이 어느새 저 정도까지 이르렀다니.”
구경하던 이들 가운데 소위 무림 명숙이라는 사람들은 곤룡자가 펼치는 초식의 깊이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의연하게 고개를 들면서 당찬일이 가뿐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내게도 아직 채우지 못한 가락이 있어.’
스스슷―.
공성벽인가? 아니, 진지행인가?
당찬일이 무수한 분신을 만들어 낼 기세로 현란하게 발을 놀린다 싶었는데 어느새 전진수비의 형태를 띠듯 직진하는 모양새였다.
나풀.
정처 없이 나아갈 것만 같은 당찬일의 발치로 이름 모를 잎 하나가 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스칵!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찬일의 몸이 수직으로 상승하며 풍성하게 떨어지는 매화꽃들 사이로 파묻혔다.
오역상(牾逆上)!
삼수삼보의 마지막 보법!
아니, 오역상은 보법이 아니다. 상대의 반응에 맞춰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구적인 움직임이다.
그래서 이름조차도 모든 관념을 거역하며 비상하는[牾逆上] 몸놀림이다.
파앗!
당찬일이 오역상이라는 기상천외한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다가서자 곤룡자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뿌우―.
어디선가 맑은 울림이 귓가를 두드린다.
통소인가?
아니다. 통소처럼 깊지는 않다. 하지만 이 소리는 통소의 그것보다 훨씬 맑고 세련되었기에 마치 극락에서 울려 퍼지는 가락과도 같다.
“호로사(葫蘆絲)…….”
당찬일의 오역상에서 정토의 소리를 엿들은 건룡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건 호로사다.”
건룡자가 중얼거리자 감룡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사형.”
온 누리를 꽉 채울 것만 같은 기세로 퍼져 나가는 수많은 꽃송이를 거스르며 솟구치는 당찬일을 주시하던 감룡자가 충격적인 진단을 내놓았다.
“당 시주는 이사형을 상대로 팔음(八音)을 재현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
이 놀라운 선언에 이룡자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팔음이라니요? 그건 아악에서 쓰이는 여덟 가지의 악기를 말하는 거잖아요? 어찌 초식으로 악기의 소리를 구현한다는 겁니까?”
“이사형은 초식으로 자연이란 화폭을 채우고 있다. 그러니 당 도우가 무공으로 여덟 가지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감룡자가 이룡자를 돌아보았다.
“이사형이 그리는 수묵화가 보이냐?”
“형태 정도는…….”
“그럼 이사형의 매화구변에 어울린 통소는 들리더냐?”
“혹시 아련하게 메아리치던 소리가……?”
“대충이라도 엿보았구나.”
고개를 끄덕인 감룡자가 그 뒤부터 당찬일이 당문본학이란 비파에 덧붙였던 여러 악기를 이야기해 주었다.
“편경에 방향이라고 하셨습니까?”
“물론이다.”
“당 시주의 보법이 어느 순간부터 톡톡 튄다고는 생각했는데 그것이 편경과 방향을 시각화한 것이었다니!”
그렇다!
당찬일은 곤룡자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중반 팔초를 여덟 가지의 악기[八音]로 모조리 받아쳤던 것이다.
“이제…….”
두 사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건룡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양쪽 모두 하나씩 남았다.”
호로사의 맑고 고운 소리에 속세의 업보가 모조리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아서 곤룡자가 목검을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좋다. 정말로 좋아.’
이로써 무위(無爲)로 돌아가야 한다.
짧은 세속의 삶이었지만 이제는 훌훌 벗고 끝도 없는 허무의 세계로 회귀하는 거다.
스르륵―.
더 이상 어떤 기합도 없다. 외침이 없으니 기세를 끌어모을 이유도 없다.
순수한 자연에 혼탁한 속세의 떼가 무에 필요할까?
그저 한마디면 될 것을.
“낙매성우(落梅成雨).”
곤룡자가 담담하게 중얼거리자 수천, 수만으로 불어나 장내를 가득 메웠던 검초들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꽃의 비를 이루었다.
낙매성우!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중반부 팔초를 매듭짓는 절초!
봉오리가 맺히는 순간부터 곧 산화라는 봄날의 이중성을 그려 낸 환검(幻劍)의 시작점!
낙화(落花)인가, 개화(開花)인가.
아니면 이런 이치를 빗댄 인생사(人生事)를 말함인가.
곤룡자의 수묵화는 봄날의 평범한 정경을 그려 냈지만 실상 인간지사의 허무함과 무위(無爲)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유생어무(有生於無)인가?”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유로부터 나오고 유는 무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니 인생의 무상함과 도가에서 이야기하는 무위자연을 약여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파―앗!
순간 당찬일의 눈에 낙엽처럼 내리는 낙화의 비를 맞으며 천천히 산을 오르는 도인이 보였다.
도인에게선 어떠한 욕심이나 갈증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발걸음이 그리도 표홀했는지도.
하지만…….
‘저 도장에겐 눈동자가 없어.’
당찬일이 도인의 초상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이 말인즉슨.
‘아직 검초가 완전하지 않아!’
자칫 낙매성우의 기세에 짓눌릴 뻔했던 당찬일이 가까스로 힘을 내어 한 걸음 전진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꽃송이들, 꽃잎들 그리고 세월과 세상의 이치들.
그 안에서 아직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젊은 도인 하나.
이제…….
‘눈을 뜨시길.’
꽝!
당찬일이 북을 두드리듯 억강일초로 낙매성우의 한가운데를 때리자 장내가 들썩였다.
그리고…….
“음?”
“이게 뭐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묘한 여운.
때로 들리고, 때로 보이고, 때로는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와 닿은 정체불명의 울림에 모든 이들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뭔가…….”
“훌륭한 것을 겪은 것만 같아.”
적이 만족해진 사람들이 봄날의 산들바람에 낮잠이라도 한숨 잘 요량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곤룡자는 망연히 서 있었다.
‘어이없군.’
낙매성우는 변(變)의 끝에서 환(幻)의 초입으로 다가서는 변환 검식의 시작점이었다.
그래서 곤룡자는 언제나 낙매성우의 마무리를 변환의 끝으로 자르느냐, 아니면 환상의 초입으로 들어서느냐로 고심했었는데…….
‘이 모두가 부질없는 고민이었다는 건가.’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신은 세속적인 굴레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변과 환이라는 규격적인 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조금 전까지 갈등했었다.
그런데 당찬일은 한 번의 주먹질로 자신을 일깨웠다.
정신 차리라고.
변이나 환은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의 일환이라고.
마음 가는 대로 흐르라고.
시냇물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곤룡자가 곧 정신을 차렸다.
깨달음은 나중에 복기해도 된다.
우선은 예법에 충실하자.
마음을 추스른 곤룡자가 고개를 돌렸다.
‘충격이 컸나?’
당찬일은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푹 떨어트린 상태였다.
무리도 아닐 터.
자신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제대로 대한다면 어지간한 무인은 주먹 한번 내밀지 못하고 두 손 두 발을 들 것이다.
진정한 이십사수매화검법이란 분위기만으로도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는 패도적인 검학이니까.
하물며 당찬일은 자신의 검초를 직접 상대했으니 비록 중반부의 팔초라도 그가 받은 심적인 타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저벅저벅.
당찬일에게 다가선 곤룡자가 그를 불렀다.
“도우의 가르침에 빈도가 개안했소이다. 정말 감사드리오.”
묵묵부답.
“당찬일 도우의 말씀처럼 당문본학은 처음의 앙상함을 벗어나 튼실한 나무로…….”
이때 당찬일의 모기만 한 음성이 곤룡자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굉장하구나.”
“음?”
“명가의 검이란 사상의 전면이 아니라 배후를 밝히는구나. 이러니 당해 낼 도리가 없지.”
쿵!
놀랍게도 당찬일은 자신의 검초를, 더 나아가 화산의 검학을 분석하고 있었다.
어느새 주웠는지 작은 나무토막으로 기기묘묘한 선을 바닥에 그리며 당찬일이 연신 감탄했다.
“여기서 어떻게 저리로 기세가 갈 수 있는 거야? 매국동이라는 자라면 꿈도 꾸지 못할 움직임이다.”
스치듯 들었다.
오가연합 비무 대회에서 당찬일이 백리천아의 시종인 양학이란 자의 무공을 한 번 견식한 것만으로 파훼했다고.
그때는 그랬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이번엔 자신의 검초를 뜯어보고 있다니.
그리고 당찬일이 어지러운 선들 사이로 짧지만 강렬한 사선 하나를 아로새겼다.
쫘악!
“이것이면…….”
힘차게 선을 그은 당찬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낙매성우가 발동하기 전에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중반부를 틀어막을 수 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당찬일이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단, 상대가 이십사수매화검법으로 싸움에 임해야만 가능하지.”
불끈!
순간적으로 살심이 솟구쳐 올라서 곤룡자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위험하다.
이 젊은 도우의 잠재력이라면 능히 구파의 위상을 뛰어넘을 것이며 어쩌면 화산의 화려한 비상을 막으려고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제거할 수 있다.
지금이라면…….
곤룡자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당찬일이 고개를 들었다.
“아, 곤룡자 도장.”
몇 번 눈을 끔뻑인 당찬일이 벌떡 일어섰다.
“이거 송구하게 되었어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그만.”
“그, 그렇구려.”
속내를 감춘 곤룡자가 억지웃음을 터트렸다.
시기는 좋은데 장소가 최악이다.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도우의 말씀처럼 당문은 다소 앙상하던 기초 무학에 훌륭한 가지를 내리게 되었소이다. 빈도는 진심으로 놀랐소.”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도장의 위대한 기상을 잠시나마 엿보아서 감사드리는걸요.”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진심이었다.
곤룡자는 당찬일에게서 당문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며, 당찬일은 곤룡자란 도인에게서 다듬어지지 않은 명가의 검이 어떤 것인지 목도했다.
그래서 곤룡자는 더 자라기 전에 당찬일이란 싹을 제거하고 싶었고, 당찬일은 곤룡자의 검초에서 아직까지 당문이 변방에 머무는 이유를 알았다.
복잡한 심경을 담아 서로를 응시하던 당찬일과 곤룡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인사했다.
“그럼.”
“그럼.”
서로 포권한 당찬일과 곤룡자가 돌아서자 장내엔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고다!”
“근자에 가장 아름다운 비무였어!”
훗날 화음대전(畵音對戰)이라고 명명될 두 청년 고수의 비무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 * *
당찬일은 방등회의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즉시 떠나려 했지만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아침 공양을 받고 떠나라는 도천 스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피곤하구나.”
도천 스님은 당찬일을 위해서 작은 객방을 따로 내주었다. 본래 아미파가 비구들만의 사찰이다 보니 이런 조치는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아무렇게나 행장을 내던진 당찬일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정말로 피곤하다.
섬서에서 사천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곤룡자란 괴물 같은 도인과 격렬한 비무를 치렀으니 그야말로 몸이 말이 아니다.
다탁에 놓인 물을 따라 마신 당찬일이 일찍 자려고 신발을 벗었다.
이때…….
“팔자 한번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