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44
당문전생 (143)
세월의 퇴적물
시리도록 차가운 음성이 등 뒤에서 내리꽂혔다.
누구라도 깜짝 놀랄 만한 상황. 그러나 당찬일은 침착하게 응대했다.
“오셨어요?”
당찬일의 차분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목소리의 주인이 콧방귀를 날렸다.
“무공은 익히지 않고 간덩이만 키웠나 보구나.”
아니다. 무공을 열심히 익혔기에 방 안의 미세한 인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놀라지 않았던 거다.
“검군 대협은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셨어요.”
“안다.”
툭 던지듯 답한 벽려군이 의자에 앉았다.
“오늘 화산의 어린 말코하고 재미난 짓거리를 벌이더군.”
“즐거웠습니다.”
당찬일이 담담하게 답하자 벽려군이 콧방귀를 날리며 그를 외면했다.
“나중에 어린 말코가 너를 갈아 마시려고 들더구나.”
“그랬군요.”
“그는 진정으로 네게 살의를 품었었다. 설마 몰랐다는 게냐?”
“알았지요.”
“역시 눈치챘었군.”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기울여 물 한 잔을 따른 벽려군이 그것에 입을 가져갔다.
“어떻더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구파일방 가운데서 가장 패도적이라는 화산파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소감 말이다.”
벽려군이 빈정거리자 당찬일이 고소 지었다.
“무림사군자 가운데서 가장 강하고 가장 괴팍하다는 사신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당에 화산의 살생부 따위가 대수이겠습니까?”
당찬일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자 벽려군이 잔을 내려놨다.
한 해 못 봤다고 능글거림이 늘었다. 이 추세대로 장성한다면 뻔뻔함으로 천하를 오시할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순간 떠오르는 어떤 이의 초상.
그녀도 이토록 능글맞은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어린 능구렁이처럼 장난이 많았던 이를.
그는 밉지 않은 장난을 즐겼으며 스스로가 우스개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했기에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하여 그를 싫어하거나 질투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랬다.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나 이 모두는 한순간의 꿈처럼 사그라들었고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의 끝이 막다른 골목인지, 깎아지른 벼랑일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걷는다.
“하염없이……,”
“예?”
“아니다.”
고개를 돌린 벽려군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역시 너는 무공보다 다른 쪽에 재주가 있어.”
잔을 내려놓은 벽려군이 화제를 급히 틀었다.
마치 언젠가의 오후와 그날의 정경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들이 모종의 제안을 할 것이야.”
“저한테 말이에요?”
“따르도록 해라.”
“그들이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따로 논다.
벽려군은 벽려군 대로. 당찬일은 당찬일 대로.
제각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 내는 형국이라서 말과 말이 공전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은 충분히 교류하고 있었다.
“어떤 제안입니까?”
당찬일이 물었지만 벽려군은 아무런 답변 없이 창 쪽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제 할 말만 쏟아 내고 표표히 사라지려는 벽려군을 응시하던 당찬일이 돌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일전에 이곳을 찾으셨지요?”
우뚝!
벽려군이 걸음을 멈추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방문의 연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별일 아니다.”
“그래도…….”
“자연히 알게 돼.”
벽려군이 단언하자 당찬일이 다시 물었다.
“그들이 제게 제안한다는 것과 여협의 아미파 방문에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이놈 봐라?
……그런 표정으로 당찬일을 곁눈질한 벽려군이 곧 오연하게 얼굴을 돌렸다.
“자연히 알게 된다고 했다.”
“그렇군요.”
당찬일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벽려군이 창문틀을 잡았다.
“천마왜를 상대했다지?”
역시 벽려군은 당찬일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있었다.
“아울러 그를 조종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신의 백발 사내와도 스쳐 지나갔고?”
정확하다.
벽려군은 당찬일이 신적인 능력을 발휘했다는 백발 사내와 간발의 차이로 조우하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아는 눈치였다.
당찬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를 뻔히 응시하던 벽려군이 살포시 인상을 구겼다.
“과신하지 마라.”
쿵!
이서악에게서 들었고, 계자에게서도 들었던 충고.
자신을 과신하다 보면 독선적으로 흐를 수 있다.
‘대체 내가 무엇을 과신한다는 걸까?’
한 사람의 지적이라면 단순한 비난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동일한 이야기를 언급하면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사람이 나타난다면…….
내친 김이라고 생각했을까?
혼란스러워하는 당찬일에게 벽려군이 한마디 첨언했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그 속엔 무수한 함의를 간직한 이야기를.
“시간은 흐른다.”
“그야…….”
“무심하게 흐른 시간의 뒤로 남겨진 퇴적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시간의 퇴적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벽려군이 창문으로 둥실 몸을 날렸다.
……켜켜이 쌓였던 세월의 퇴적물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쏟아질 것이니라. 그건 누구도 거스르지 못해.
* * *
다음 날 아침.
발우 공양을 마친 당찬일이 객방으로 향하는데 낙산 사태가 다가왔다.
“잠자리는 편안하셨소?”
불편했다.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예.”
“본가로 가시오, 아니면 서안부의 지부로?”
“지부로 돌아갈까 해요. 이제 지부가 자리를 잡아 가는 마당이니 하루라도 빨리 복귀해서 한 손 보태야지요.”
“삼수삼보 때문에?”
“아니요.”
당찬일이 피식 웃었다.
“삼수삼보는 서안부의 식구들도 익숙해서 굳이 제가 나설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서안 지부의 일이 삼수삼보의 전파만이 아니니까요.”
“흐음.”
고개를 끄덕인 낙산 사태가 이상한 결론을 도출했다.
“결국 급한 일은 없다는 뜻이구려.”
그게 왜 그렇게 돼요?
“하면 이 늙은 비구에게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소?”
이 대목에서 당찬일은 잠시 갈등했다.
놀라움을 표시하느냐, 예상했다는 듯 순순히 따르느냐.
“무슨 일인데요?”
중간으로 가자.
당찬일이 침착하게 묻자 낙산 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당찬일 시주시구려. 어찌 동요조차 보이지 않으시는지.”
벽려군에게서 미리 언질을 들었으니까. 제안자가 낙산 사태라는 걸 몰랐을 뿐.
“청성의 현월 장문을 아시지요?”
아하, 청성!
“현월 장문을 뵈러 가는데 당 시주도 동행했으면 해요.”
“저는 왜……?”
“청성파에서 험한 일을 겪었다지요?”
백일야에게 납치당했던 건을 이야기하나 보다.
청성파를 방문했을 때 벌어진 일이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청성의 경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므로 그들과는 상관이 없다.
또…….
‘자진해서 백일야에게 붙들렸던 거고.’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당문의 방문객을 청성파가 돌보지 못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터.
“당시 당 시주 부자께서 서둘러 귀가하셨기에 그때의 송구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소.”
“그럼?”
“마침 이번 방등일에 당 시주가 우리 아미를 찾으신다 하니 현월 도장께서 행사를 마치면 이 늙은 비구와 함께 청성에 방문하길 바란다고 전했소.”
“예…….”
아미파와 청성파는 사천성 내에 있다.
구파일방 가운데서 가장 근거리에 위치한 문파들이라 하겠다.
“어떻게, 빈니와 동행하시겠소?”
……이렇게 되어 낙산 사태와 청성으로 가기로 했는데.
“왜 노사까지?”
크고 화려한 마차에는 낙산 사태를 비롯해서 제갈외와 제갈청청까지 타고 있었다.
“나도 현월 도장을 못 만난 지 오래되어서 이참에 같이 가려고 했다네.”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제갈외가 당찬일에게 물었다.
“괜찮겠지?”
이런 웃음을 대하고 무슨 재주로 거절하겠는가.
제갈청청은 열심히 당찬일을 외면했다. 행여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제갈외에게 말을 붙이기 일쑤였다.
다 좋은데…….
“가주님은 또 왜?”
자신의 옆에서 무감정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는 남궁천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찬일이 실눈을 떴다.
“그러게 말일세.”
이로써 남궁천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청성파에 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청성파 앞에서 그 양반이 기다리면 금상첨화겠군.’
정말로 그가 기다렸다!
“여깁니다, 여기!”
청성파로 접어드는 초입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 젊은 거지를 발견하고 당찬일이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는가?”
“아니, 잠시 현기증이…….”
남궁천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가볍게 손을 내저은 당찬일이 탄식했다.
대체 청성파에선 무슨 일로 이런 초호화 인원을 끌어모은 걸까?
* * *
“그만하면 잘 싸웠다.”
본문으로 돌아온 곤룡자를 맞이한 이는 화산의 장문인인 무한 진인이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을 빼앗겼습니다.”
무한 진인은 오십 대 후반의 젊은 장문이었다.
속가적인 색채가 강한 화산을 이끄는 도장답게 무한 진인은 도가의 청정한 기운보다 세속적인 강대함을 온몸으로 흘렸다.
“화룡점정을 빼앗겼어?”
곤룡자가 당문의 당찬일이란 소년과 초식의 깊이를 논하다 반걸음 패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상대의 깨달음이 너보다 앞섰다니 그건 어쩔 도리가 없지. 승패는 병가지상사가 아니겠느냐.”
무한 진인이 자애롭게 이야기했지만 곤룡자는 좀처럼 기분을 풀지 못했다.
“차라리 노수(路數)에서 패했다면 모르겠으나 화룡점정을 놓쳤다는 사실이 못내 아픕니다.”
곤룡자의 술회에는 패배감을 넘어서는 무엇이 담겨 있어서 무한 진인의 얼굴이 차츰 심각해졌다.
단순한 승패를 논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감룡.”
“예, 장문 도장.”
감룡자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자 무한 진인이 엄하게 명했다.
“곤룡과 당찬일 도우의 노수 겨룸을 소상하게 복기해라.”
무한 진인의 긁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초식보다 비무자의 감정선을 위주로.”
무한 진인의 명을 들은 감룡자가 당시의 상황을 이론적으로 풀어냈다.
감룡자의 세세한 묘사가 이어지자 중간중간 그의 말을 끊고 곤룡자에게 당찬일의 반응과 그가 받은 느낌을 종합적으로 취합한 무한 진인이 침음했다.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몰라도 무한 진인의 앞에는 삼수삼보가 놓여 있었다.
“다시 되짚어 보자꾸나.”
무한 진인이 감룡자와 곤룡자의 눈과 입을 통해서 당찬일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중반부 팔초를 상대하는 과정을 복습했다.
“하여 당찬일 도우는…….”
감룡자가 당찬일이 삼수삼보 중에서 진지행이라는 전진수비보법으로 곤룡자의 매화인동과 매화점개 사이를 돌파하는 장면을 술회했다.
‘저 보법, 설마?’
무한 진인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감룡자가 자신의 분석을 내놓았다.
“당 도우는 이사형의 중반 여덟 초식을 팔음으로 되받아쳤습니다.”
“으음.”
“그렇게 당 도우는 당문본학이란 볼품없던 비파를 성대한 궁중음악으로 바꿨습니다.”
감룡자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흘러나왔다.
“통소와 방향 그리고 편경과 호로사에 이르기까지.”
감룡자가 비무의 복기를 마치자 곤룡자가 무거운 한마디를 첨언했다.
“마무리는 대고(大鼓)였습니다.”
“흠…….”
무언가를 생각하던 무한 진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따라오너라.”
* * *
아미의 전신이라는 낙산 사태와 무림의 진정한 원로인 제갈외 그리고 남궁세가주인 남궁천이 방문했으므로 당연히 장문인이 맞이해야만 했다.
방문객의 면면이 너무나 화려했으니까.
하지만 청성파에선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제갈외 들을 실은 마차는 청성파의 뒷문에 해당하는 비밀 통로로 접어들었기에 당찬일이 적이 놀랐다.
“스님?”
당찬일이 의아해하자 낙산 사태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걱정 말아요, 당 시주. 설마하니 빈니가 당 시주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고 싶다.
“이제 다 온 모양이구려.”
마차가 멈추자 낙산 사태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청성파의 비처(祕處)에서 모두를 맞이한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옥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