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74
당문전생 (173)
너만은 잡는다!
“왜 그러느냐?!”
당찬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당인이 깜짝 놀랐다.
“또다시 몸이 이상해? 그런 거냐?”
얼른 호민이를, 하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당인을 제지한 당찬일이 무겁게 숨을 토했다.
“이 아이는 분명!”
당찬일의 눈에서 섬전(閃電)이 번뜩였다.
“그자입니다.”
“그자라면……!”
“저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고…….”
잠시 숨을 멈췄던 당찬일이 빠르게 덧붙였다.
“당쾌풍의 목숨을 끊은 백발의 사내가 바로 이 아이예요!”
종이의 모서리를 으스러지게 쥐면서 당찬일이 확언했다.
“아니, 어찌 십구 년 전의 묘사만으로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느냐?”
당인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아들이 뛰어난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다지만 오래전에 남긴 몇 줄의 서술만으로 동일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무려 십구 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그때의 어린 소년은 장부가 되었을 텐데.
“방철기 부대장은 참상의 현장에서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때 입은 부상이 너무도 심각해서 다섯 달을 버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한마디로 방철기는 가까스로 귀환했지만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에둘러서 당인이 표현했다.
“아닙니다, 처주님! 비록 선친께서는 회생 불능의 전상(戰傷)을 입으셨지만 정신만큼은 온전하셨어요! 작고하시던 그날까지도 사리 분별에 흔들림이 없으셨다고요!”
방용규가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네 살이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부친에 관한 기억이라서 어제 벌어진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용규의 의지 넘치는 눈빛에 당인이 탄식했다.
저런 눈으로 역설하는 사람은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 법이다. 조금의 과장이 있을지언정 타인의 입맛에 맞춰서 상황을 꾸미거나 다듬지 않는다.
“고인을 욕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방철기 부대장의 생환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만큼이나 당시의 상황이 처참했다는 뜻이지.”
팍팍하게 마르는 입술을 적신 당인이 침전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그날의 참극으로 누군가는 부친을 여의었고, 누군가는 부인을 잃었다.
그날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사실 방 부대장을 마지막까지 괴롭힌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였다고들 했지. 방 부대장이 나의 병문안을 한사코 거절한 이유도 그날을 반추하기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당인의 묵직한 회고에 방용규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당인의 이야기는 조금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었다. 방철기는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으며 매일 밤 악몽을 꿨다.
그런 그가 당시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
당인이 반신반의하자 당찬일이 고개를 돌려 방용규를 응시했다.
몰랐다, 특찰부가 당인 부부를 호위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방철기 부대장이 당인 부부를 지켜 주었다는 사실을.
그때의 유평월은 무인이라기보다 살수에 가까워서 특찰부의 원거리 경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특찰부 제일 부대가 당인 부부를 경호하다 전원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들의 무덤에 꽃 한 송이라도 바쳤을 텐데.
눈짓으로 방용규에게 감사의 마음을 건넨 당찬일이 종이를 다탁에 내려놓았다.
“하면 내, 외 당주님들께선 십구 년 전의 비극을 왜 감추셨습니까?”
특찰부 제일 부대원을 포함한 서른 명에 가까운 수행원들이 어린 백발귀에게 살해당한 사실을 내당주 당암과 외당주 당진이 함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찬일이 묻자 당인이 방용규를 내보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당찬일이 의아해하는데 당인이 뜻밖의 물건을 입에 올렸다.
“사옥정이란 물건에 관해서 들어 봤느냐?”
쿵!
“넷째 형님은 정마대전에서 돌아가셨다고 알려졌다. 영웅적인 모습으로 말이지. 하지만 그분은 정마대전의 다른 생존자들과 달리 무려 한 달이 지난 후에 가문으로 귀환하셨다.”
옥군도 그리 말했다. 당협은 가장 늦게 복귀했다고.
“그러다 우리 부부와 나들이에 나선 넷째 형님이 발작을 일으키셨지. 그때의 형님은 사옥정을 품은 자들의 통상적인 모습과 일치했다.”
전백안을 번뜩이는 백발인.
“거기다 느닷없이 출몰한 어린 백발귀는 넷째 형님과 연관 짓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른바 외통수.
“전사했다고 알려진 넷째 형님이 비밀리에 귀환했으며, 사옥정을 머금은 자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발작을 일으켰다고 하면 무림인들이 어찌 생각하겠느냐?”
“으음.”
“하여 대가주님께서는 그날의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으며 잔인한 살인극을 벌인 어린 백발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지.”
당인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마치 이번에 서안 지부에서 벌어진 참극처럼.”
백발인으로 변한 당협은 당인을 거꾸러트리고 아이에게 달려들었지만 이한정의 호소와 유평월의 외침을 듣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작을 일으켰다.
이때를 노렸을까?
갑자기 출몰한 어린 백발귀는 당찬일을 안고 있던 유평월에게 일직선으로 날아들었고, 이를 막아선 이한정을 기이한 장력으로 쓰러트렸다.
‘천마악!’
당찬일이 주먹을 쥐는데 당인이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린 백발귀는 유평월이란 자와 대치했지. 놀랍게도 유평월은 강력하기 그지없는 백발귀를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당시를 회고하는 듯 눈을 감은 당인이 눈썹을 실룩거렸다.
“유평월은 날래고 정확한 공격으로 어린 백발귀를 몰아붙였다. 분명 승기는 유평월이 쥐고 있었어. 하지만 어린 백발귀의 몸은 너무나 단단했다.”
천마벽…….
“때리다가 지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상대가 타격을 받지 않으면 공세를 펼치는 쪽은 제풀에 나가떨어지곤 하지.”
번뜩!
당인의 눈이 빛을 발했다.
“결국 때리다 지친 유평월은 궁지에 몰렸고, 어린 백발귀가 그의 목을 틀어쥐었지.”
전생의 자신이 그렇게 당했단다. 그런데 어째서 감회가 없는 걸까?
“이때 넷째 형님께서 어린 백발귀와 어우러지셨다.”
파―앗!
갑자기 떠오르는 봉인되었던 기억!
달빛 아래서 어린 백발귀와 일전을 벌이는 당협을 허망하게 눈으로 담는 자신. 그리고 이들과는 멀찍이 떨어져서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당인은 어린 백발귀가 서른 명에 가까운 수행원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당협을 막느라 주변 상황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찬일이 단편적으로 명멸하는 기억 속에서 그날의 정경을 복구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넷째 형님은 광증이 도진 상태에서 발작까지 일으킨 터라 어린 백발귀의 거친 공세에 전전긍긍이셨다. 만약 형님께서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당하셨을 거야”
기이한 움직임이라면?
“절체절명의 순간, 형님께선 원을 그리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윤무, 형님의 동작을 설명하자면 귀신의 윤무였다고 할 수밖에 없구나.”
“잠시만요!”
당찬일이 손을 들어 당인의 말을 제지했다.
“그날 삼숙께서 추셨다는 귀신의 윤무를 아직도 기억하세요?”
“물론이다. 그걸 어찌 잊겠느냐?”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당인이 목격한 당협의 동작은 인간이라기보다 귀신의 움직임에 가까웠다.
한판의 춤사위를 신명 나게 벌이는 소악귀.
“어린 백발귀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아가던 형님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대결은 끝이 났지.”
정통으로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은 어린 백발귀는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그리고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던 당협도 곧 비틀거리며 달빛 아래로 몸을 숨겼다.
당인이 당협의 초월적인 움직임을 떠올리는데 당찬일이 가만히 일어섰다.
스르륵.
당찬일이 발을 떼자 당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좁은 방안에서 춤이라도 추려는 거냐? 관두어라.”
덩실― 덩실―.
당인이 말렸지만 당찬일은 아랑곳없이 그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어깨춤을 추었다.
장성한 아들이 고단한 아비를 위로하려 선보이는 춤사위인가?
모친의 보살핌이 없었지만 이만하면 참으로 잘 자랐다. 편부 슬하의 자식들이 흔히 보이는 그늘이나 반항심도 당찬일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비록 십삼 년 동안이나 가사 상태였지만 깨어나자마자 당찬일은 세가의 생활에 빠르게 안착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문의 자랑이 되었다.
적이 만족해서 당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리는데 당찬일의 발이 지면을 쏜살같이 스쳤다.
스―팟!
하늘거리던 당찬일이 순간적으로 사라지자 당인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건!”
낙엽처럼 흐느적거리던 당찬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가 빙글빙글 춤을 추며 모습을 드러내자 당인이 몸을 굳혔다.
저거다! 저것이야말로 십구 년 전에 당협이 어린 백발귀를 물리쳤던 귀신의 윤무다!
“네가 어찌 이 움직임을?”
당인은 모를 것이다. 이 동작은 오가연합 비무 대회에서 양학이 용건영과 고수를 상대로 선보였던 몸놀림이었다는 사실을.
“후우.”
귀신의 윤무를 마친 당찬일이 백리천아와 나누었던 대화를 반추했다.
“아버지.”
“으응?”
반쯤 넋이 나간 당인에게 당찬일이 물었다.
“초식에도 표정이 있더라고요.”
“음?”
이제야 현실 세계로 돌아온 당인이 턱을 긁었다. 아들의 기발한 발상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시전자가 초식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면 창안자의 마음까지 구현해 낼 수 있을 거예요.”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 일대종사들이 펼치는 초식을 보면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이 반영된다고 하니까.”
“맞아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당찬일이 백리천아가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의 귀신 춤은 아버지께 어떤 표정을 지었나요?”
“네가 추었던 귀신의 춤이라.”
당찬일이 구현한 귀신의 윤무를 되새기던 당인이 눈동자를 모았다.
“아수라장(阿修羅場)? 정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아수라장이요?”
“통상적인 난장판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전란이 끊이질 않아서 지극히 불안정한 동토(凍土)라고나 할까?”
“전란이 그치지 않는 동토…….”
고개를 끄덕인 당찬일이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직은 백리세가의 의문점을 공표할 수 없다. 조금 더 알아보고 상의하는 편이 옳다.
“아무튼 서른 명에 달하는 수행원의 목숨을 빼앗은 것도, 어머님과 유평월에게 독수(毒手)를 쓴 이도 백발귀였군요?”
“형님에게 상해를 입은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였다.”
오채지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실은 이것이었다.
“만약 넷째 형님께서 전백안의 백발인으로 변신해서 난동을 부렸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한다면 세간에서 우리 당문을 어찌 보겠느냐?”
당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터트렸다.
죽었다던 이의 부활. 거기다 어린 백발귀의 이야기까지 가세하는 순간 당문은 사옥정의 존재를 고의로 은폐했다는 의심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그래서 대가주님은 방철기 부대장의 입을 막았던 거다. 하지만 방철기 부대장은 네 살짜리 아들에게 그날의 진실을 유언처럼 남기고 숨을 거두었던 것이지.”
방용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오채지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오채지의 생존자 가운데 하나인 당찬일이 가사 상태에서 십삼 년 만에 깨어나자 그에게 접근했다.
방철기가 남긴 유언을 전하려고.
“삼 년 전, 네가 참혹한 모습으로 실려 온 직후, 두 형님께서 나를 부르더구나. 이제는 그날의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면서.”
머리를 짚으며 당인이 인상을 구겼다.
“십구 년 전의 어린 백발귀가 정말로 삼 년 전에 쾌풍이를 살해하고, 너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면 그놈은 네 목숨을 두 번씩이나 노린 셈이로구나?”
“세 번입니다.”
“뭐?”
“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억지로 웃으며 당찬일이 쓰게 웃었다. 분명 백발의 사내는 자신의 목숨을 세 번 빼앗으려고 들었고, 그 결과 당찬일의 호위였던 유평월은 당찬일 자체가 되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백발인, 네놈부터 우선 잡는다.’
……그래야 유평월과 어머니의 묘소에 당당히 헌화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