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77
당문전생 (176)
맡겼던 물건
예상했던 바였지만 정확하게 들어맞아서 당찬일이 하마터면 무한 진인을 돌아볼 뻔했다.
화산파도 사옥정을 보관할 수 있다. 아미파만 해도 벽려군이 사옥정을 전달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넘겨받은 사옥정을 사용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정파에서는 사옥정을 마물로 규정했기에 그것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하물며 구파일방의 중추라는 화산파의 장문인이 사옥정을 취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이 기운은 사옥정이 틀림없어.’
무한 진인이 관옥사룡과 자신이 벌인 노수를 핑계로 대면서 수차례 자신을 찾은 이유가 설명이 된다.
그는 당찬일이 백색의 사내와 결전을 벌이면서 사옥정과 소통하지 않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서안 지부를 맴돌았을 것이다.
당찬일이 무한 진인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도 감룡자와 벌였던 노수 때문이었다.
당시 당찬일은 감룡자의 무학에서 정파의 청명한 기운에 가려진 사도의 음습함과 칙칙함을 엿보았다.
종사급의 경지에 도달하면 만류귀종의 원리에 따라 정파의 무인이 사이한 무학을 펼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라면 정심한 무리를 깨우치기도 한다.
하지만 관옥사룡은 후기지수 가운데 도드라질 뿐, 일가를 이룰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정도에서 어긋난 무학을 펼친다면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방증이다.
‘관옥사룡의 사부는 무한 진인이지.’
그래서 당찬일이 병문안을 핑계로 자신을 찾은 무한 진인을 만났던 것이고, 과연 그는 사옥정의 기운을 몸 안에 갈무리한 상태였다.
대체 누가 무한 진인에게 사옥정을 전달했을까?
의문을 품을 사이도 없이 무한 진인이 보낸 사옥정의 순례자가 자신의 몸을 헤집고 다니자 당찬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심해야겠군.’
당찬일은 이미 두 개의 사옥정을 융합하는 중이라서 자칫 잘못하다간 그에게 자신의 기운을 들킬 염려가 있다.
‘그건 곤란하지.’
사옥정의 기운이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당장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여러모로 불편해질 것이 자명하기에 당찬일이 일부러 기이한 반응을 보였다.
“으윽!”
사옥정의 순례자가 노도처럼 기혈을 훑자 당찬일이 인상을 구겼다.
“찬일이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당인이 서둘러 묻자 무한 진인이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살펴보는 중이외다.”
짐짓 인상을 구긴 무한 진인이 뱀처럼 서늘한 눈동자로 당찬일의 전신을 살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삼 년 전의 그날, 당찬일은 백발귀와 일전을 벌이다가 고인이 된 당쾌풍의 희생으로 그를 퇴치했다고 알려졌다.
문제는 당쾌풍이 터트렸다는 폭약 하나로는 사옥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백발귀가 궁지에 몰리지 않았더라면 폭약이 터진다고 해서 퇴각하지 않았을 거다.
‘결국 백발귀를 궁지에 몰아넣은 건 이 아이여야만 하는데.’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돌아오는 건 없으니.
맥을 짚었던 손을 푼 무한 진인이 침착한 표정으로 답했다.
“기혈이 놀랐을 뿐, 다른 이상은 없소이다.”
“그것 다행입니다.”
당인이 안심하고 당찬일이 무한 진인에게 포권했다.
“돌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닐세. 사해는 동도라고 하지 않았나.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우리 화산을 찾아오게나.”
문제가 생기면. 참으로 포괄적인 말이 아닐 수 없어서 당찬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하지요.”
당찬일이 거듭 포권하는데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무한 진인이 검지를 들었다.
“혹시 검군을 아시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무한 진인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단순한 넘겨짚기가 아닐 터.
이럴 땐 빨리 인정하는 편이 낫다.
“우리 가문의 특사셨습니다.”
“특사!”
무한 진인 과장되게 놀람을 표시했다,
“검군 이서악을 식객으로 두었다니! 당문의 품은 넓고도 깊구나!”
다분한 비꼼. 그러나 당찬일이나 당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당찬일이 묻자 무한 진인도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
“감룡에게 소도우와의 비무를 듣다가 질풍파랑보의 향취를 느꼈지 뭔가. 그래서 물었네.”
역시 화산의 장문. 노수의 내용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비무자들이 동원한 수법에 녹아든 무학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니.
역시 화산파의 우두머리답다.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
“연이 닿아서 검군 대협께 몇 수를 지도받았습니다.”
당찬일이 순순히 인정하자 무한 진인의 얇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성이 순진한 건가, 아니면 이 모두가 계산된 응대인가.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거짓을 고하지 않는 눈치인데 이런 식으로 가문의 비밀에 해당하는 내용까지 전부 고해바치는 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고 역(逆)에 역(逆)을 짚을 정도로 심리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나이도 아니니.
“소도우는 운이 좋군.”
맥 빠진 대답으로 무한 진인이 화답했다. 이런 식으로 순순히 답변하면 더 캐물을 것도 없고, 재 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더.”
무한 진인이 고개를 들자 당찬일이 쓴 입맛을 다셨다.
참으로 끈질긴 사람이다. 도통 포기란 걸 모른다. 하지만 무리한 요구나 부탁을 늘어놓지는 않으니 드러내 놓고 반발하기도 힘들다.
“검군의 주위에서 풍채가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나?”
없다. 아리따운 소녀라면 모를까.
당찬일이 고개를 가로젓자 무한 진인이 입술을 한일(一) 자로 굳게 다물었다.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군.’
* * *
당문 서안 지부를 나선 무한 진인이 여산(驪山)을 지나 화음(華陰)의 얕은 산길에 접어들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찬일이란 아이는 천성이 순둥이인 건지, 그냥 성격이 좋은 건지는 몰라도 자신이 묻는 말에 넙죽넙죽 답했다.
심지어는 가문의 비밀이랄 수 있는 특사에 관한 사실마저도 이야기했으니 말 다 한 거다,
거기다 당찬일의 몸에선 사옥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찬일이 상대한 백발귀는 두 명의 천마왜가 품었던 사옥정을 흡수했을 확률이 높은 자라서 폭약만 가지고는 상대하기 난망한 존재였다.
그런 그를 패퇴시켰기에 당찬일이란 아이도 사옥정이나 그에 준하는 힘을 지녔을 거라고 판단했거늘.
“알아보면 되겠지.”
눈살을 찌푸리며 동산에 오르던 무한 진인이 언덕에 나 있는 인위적인 소로(小路)로 접어들었다.
사―악!
순식간에 바뀌는 정경. 이로 미루어 작은 산길에 일종의 진으로 결계를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등산객이나 약초꾼을 피하려고 설치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작은 골목을 통과하자 무한 진인이 익숙한 기세를 감지했다.
휘이잉.
멀리서 자신을 막아선 거대한 사내 하나.
그는 풍채가 좋은 정도를 넘어서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신체를 지닌 사람이었다.
거대한 체구의 중년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무한 진인이 그와 마주했다.
“오랜만이로구나.”
하지만 중년의 사내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무한 진인을 지나치려 들었다.
“인사 정도는 나누도록 하자꾸나.”
스륵.
중년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호한 눈빛. 무심한 표정.
싸늘한 기색으로 무한 진인을 바라보던 중년의 사내가 건성으로 물었다.
“잘 지냈소?”
“억지로 절 받기도 유분수구나.”
무한 진인이 툴툴 웃자 중년의 사내가 쌀쌀맞게 응대했다.
“피차 이러기로 하지 않았소?”
무심하게 답하며 중년의 사내가 그의 곁을 지나치려는데 무한 진인이 입을 열었다.
“당문의 서안 지부를 다녀오는 길이란다,”
눈동자만 돌려서 무한 진인을 바라보던 중년의 사내가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털어놓는 저의가 무엇이오?”
“네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말이오?”
중년 사내의 눈빛은 무척이나 냉담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따진다면 무한 진인도 둘째가라면 서러운지라 두 사람이 대치하자 주변 공기가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냉막적심(冷漠的心).
무한 진인과 중년의 사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무한 진인을 관찰하던 중년의 사내가 곧 어깨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뭔가 착각을 했나 본데, 귀하께서 당문의 서안 지부를 방문했든, 근자에 설립했다는 호남이나 호북 지부를 찾아갔든 내 알 바가 아니요.”
중년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마침 잘됐소. 이참에 빌려주었던 물건이나 봅시다.”
중년 사내가 요구하자 무한 진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신구도 아닐진대 그것을 가지고 다니겠느냐?”
“물론 장신구는 아니지만 귀하라면 늘 품고 다닐 사람이라서 요청하는 거요.”
중년의 사내는 손바닥을 거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무한 진인에게 한 번 더 손을 뻗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변명일랑 거두고 어서 보여 주시구려.”
중년의 사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무한 진인이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정 보고 싶으면 따라와라. 본파에서 보여 줄 테니까.”
“싫소.”
중년의 사내가 어깨를 활짝 폈다.
“내가 그곳을 왜 다시 가야 하오? 일없으니까 여기서 보여 주시구려.”
“허어, 말이 안 통하는구나. 보기 싫으면 관둬라.”
차갑게 내뱉은 무한 진인이 중년의 사내를 지나치려는데 그가 기세를 뿌렸다.
쿠르르―.
휘이잉!
중년 사내의 기세에 무한 진인이 혀를 찼다.
“대체 어쩌자는 게냐? 나와 겨루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필요하다면.”
중년의 사내가 짧게 받자 무한 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하니 알량한 이름값으로 나를 겁박하겠다는 것이냐?”
“굳이 이름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하오.”
중년 사내가 싸늘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사형.”
무한 진인의 얼굴도 중년 사내의 그것 같은 비웃음이 덩그러니 걸렸다.
“역시 너는 이 사형을 알량한 이름값으로 겁박하고 있어.”
몸을 반쯤 틀면서 무한 진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러냐, 도왕?”
중년 사내의 정체는 객잔에서 이서악과 술을 마시던 도왕이었다. 그렇다면 무림사군자 가운데 도를 가장 잘 쓴다는 도왕의 출신이 화산파였다는 말인가?
무한 진인이 빈정거렸지만 도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뚜렷했기에 이 정도의 도발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뺍시다. 나는 그저 사형에게 맡겼던 물건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말에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빌려주었다고 했는데 이제는 맡겼단다.
어느 것이 사실일까?
도왕이 요구하자 무한 진인이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야? 지금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
도왕이 무한 진인의 말을 잘랐다.
“내가 사형하고 하루 이틀 생활한 것도 아닌데 어찌 속이려고 드는 게요? 그 눈과 그 손짓은 사형이 지금 거짓말을 한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소.”
도왕이 손을 들어 무한 진인을 가리켰다.
“내 말이 틀렸소?”
순간 무한 진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말로 귀찮은 녀석이로구나.”
천천히 고개를 든 무한 진인이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네 말처럼 내가 그것을 지금 가지고 있다 치자.”
화―악!
지금까지 곤궁했던 처지를 한 번에 뒤집듯 무한 진인의 얼굴이 완벽하게 표변했다.
“그렇지만 보여 주기 싫다면 어쩔 것이냐?”